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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1/120)

1화

가짜는 진짜가 될 수 없다.

언뜻 외형을 진짜처럼 꾸며도 속은 가짜이니 진짜가 될 수 없다.

샤를로즈 레베크는 그리 생각하며 이 피폐 역하렘 게임 속 여주인공의 빈방을 보며 손톱을 잘근 깨물었다.

새하얀 커튼이 양쪽으로 팔랑거리고 있었다. 날씨가 참 좋은 날에 여자 주인공이 사라져 버렸다. 그것도 창문을 통해 도망간 것인지 흔적도 없이 달아나 버렸다.

샤를로즈는 레베크, 공작 가문의 장녀로서 가짜 언니였다. 그러니깐 죽은 레베크 공작 부인의 애착 인형과도 같은 존재였다. 우연히 보육원에 들린 레베크 공작 부인이 샤를로즈를 보자마자 자신의 것이라고 공작에게 고집을 부려 입양 절차를 거친 부인의 인형이었다.

이물질.

그 단어 하나만으로 샤를로즈를 설명할 수 있었다.

레베크 공작 가문은 명망 높은 가문으로서, 절대 입양아라는 혈통 없는 자는 이어져 내려오지 않았는데 샤를로즈가 그 최초가 되어 가문의 백조 틈에서 미운털 박힌 오리 신세를 지내고 있었다.

사실, 샤를로즈는 지금 제 여동생이 달아난 상황보다는 저 자신이 샤를로즈가 되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나를 놓아줘, 부탁이야> 라는 피폐 역하렘 게임 속 유일한 악역이자, 세상에 불평이 참 많은 여주인공의 악역 언니였다. 가짜 언니란 셈이다.

“이런….”

샤를로즈는 제 여동생 방에 걸려 있는 화장대 거울로 자신의 낯선 얼굴을 관찰했다.

또렷한 금색 눈동자와 이에 전혀 어울리지 않은 칙칙한 흑발을 지닌 여자가 거울을 보고 있었다. 실내복으로 보이는 단조로운 하늘색 원피스가 열린 창문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잔잔한 바다에 밀려오는 파도처럼 흔들렸다.

나무로 만든 둥근 테이블 위에 낡은 편지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샤를로즈는 화장대 거울을 잠시 응시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편지에 테이블 쪽으로 다가갔다.

「미안해.」

짧으면서도 건조한 한마디가 적혀 있었다.

편지지를 잡은 샤를로즈의 두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며 편지지는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구겨졌다.

‘하필 여자 주인공이 도망갈 시점에 빙의하다니.’

그것도 피폐 역하렘 게임 속 유일한 악역에.

샤를로즈는 머리가 핑 도는 것 같았다.

분명 자신은 자신이 빙의된 이 망할 게임을 하다가 엔딩을 보고 잠이 들었다가 추워서 눈을 뜬 것뿐이었다.

그것뿐인데, 흑색의 머리카락은 변하지 않았지만 제 검은색 눈동자가 금괴를 발라 놓은 듯 화려한 금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겨우 마련한 원룸이 아닌 화려하고 고풍적인 방에서 눈을 뜬 것이 화근이었다.

샤를로즈는 마른침을 삼켰다.

도망간 여자 주인공이 다시 돌아오면 남주인공들에게 제거되는 악역.

여자 주인공이 다시 돌아오기 전에 사라져야 한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도망가 버려 목숨을 부여잡아야 했다.

어떻게 도망갈지 고민하는 도중 복도에서 발걸음 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저벅, 저벅.

복도에서 들려오는 뭉툭한 발걸음 소리에 샤를로즈의 몸이 목석처럼 굳어 버렸다.

“……왜 네가 왜 이 방에 있는 거지? 샤를로즈.”

“…….”

그는 샤를로즈의 어깨를 세게 잡고 돌렸다. 그녀의 칙칙한 흑색 머리카락이 돌아간 몸놀림에 아름다운 춤 선을 그리며 허공에 살랑거렸다. 그녀를 내려보는 그의 보라색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왜 네가 티아의 방에 있냐고 물었어.”

그는 레베크 공작 가문의 첫째로 눈부신 은발에 제비꽃처럼 수수한 눈동자가 잘 어울리는 미남자였다. 하지만 그의 고운 얼굴이 샤를로즈의 무감각한 표정을 보자마자 찡그러졌다.

샤를로즈가 말이 없자 그는 우연히 그녀가 붙들고 있는 낡은 편지지에 시선을 두었다. 그리고 잽싸게 빼앗아 편지지 안에 쓰여 있는 짤막하고도 간단한 문장에 한탄하였다.

“……티아가 갑자기 도망을 가?”

보라색 눈동자가 새하얀 커튼이 팔락거리는 창가를 응시하다가 허탈하게 웃었다.

제가 아끼는 여동생이, 도망가 버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오라버니가 제일 좋다며 웃던 그 해맑은 아이가 도망갔다.

곧 그의 눈빛에 불씨가 타올랐고, 그 분노는 샤를로즈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고야 말았다.

“너, 티아를 내쫓으니 기분이 좋아?”

“…….”

샤를로즈는 말을 아꼈다. 괜히 변명을 늘어트리다가 꼬투리라도 잡히면 성가시기 때문이었다.

침묵을 유지하는 샤를로즈를 보며 그는 편지지를 갈기갈기 찢더니 성난 얼굴로 그녀의 멱살을 잡았다.

“네가 오고 나서부터 우리 가문에 불행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어. 이제는 티아까지 도망가 버렸어. 어떻게 책임질 거야?”

스산하고도 음산한 어조.

샤를로즈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조용히 대답했다.

“나갈게요.”

“…뭐?”

샤를로즈의 건조한 금색 눈동자가 그를 쳐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 가문에서 나가겠다고요.”

그것이 가문에 입양되고 난 뒤 샤를로즈에게 있어 첫 반항이었다.

원작 샤를로즈의 악역 행보는 너무나도 일차적인 면모가 있었다. 그저 자신을 이물질로만 아는 가짜 가족들에게 열등감을 느끼다가 괜히 만만한 여자 주인공을 괴롭히고 심지어는 여자 주인공을 사랑하는 남자들의 뺨까지 후려치는 행동까지 하였다.

이미 이 시점을 보아하니, 여자 주인공의 남자들은 다들 샤를로즈에게 뺨 한 대가 아닌 두 대를 내어줬을지도 모른다.

샤를로즈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눈을 내리깔아 제 멱살을 잡은 두꺼운 손을 바라보다가 그 손에 제 손을 포개었다.

샤를로즈는 제게 적대감을 풍기는 이 남자를 잘 알고 있었다. 레베크 공작가의 첫째였다. 그는 티아와 관련된 일이라면 목숨까지 거는 미친놈이었다.

물론, 다른 남자 주인공들은 더 미쳤지만.

샤를로즈는 작게 한숨을 내쉬다가 말을 꺼냈다.

“유진 오라버니, 저는 이 가문에 남아 있고 싶지 않아요. 제가 입양되고 나서부터 어머니와 아버지는 갑자기 자살해 죽어 버렸고, 유진 오라버니의 매우 아끼는 막내 여동생은 떠나 버렸죠. 그러니 저도 이 가문에서 떠나려고요.”

샤를로즈의 고운 목소리가 어째선지 가뭄에 메말라 쩍쩍 갈라지는 땅과 같았다.

분명 아름다운 목소리지만, 건조하면서도 애정 없는 목소리.

샤를로즈는 제 멱살을 잡은 유진의 손을 거칠게 떼어 내고는 어이없어하는 그의 얼굴을 보며 입가를 살짝 올리다가 그를 스쳐 지나갔다.

연고도 없는 남처럼.

복도로 나온 샤를로즈의 입가에 잠시 미소가 지어졌지만, 지나가는 사용인들을 보자마자 입꼬리를 내렸다.

‘일단 남자 주인공들은 다 포기해야겠고, 샤를로즈의 오라버니들은 답도 없고, 내 퇴장을 도와줄 사람은 어디 없으려나.’

샤를로즈는 삭막한 저택 안을 흘겨보다가 조용히 발을 떼었다.

***

샤를로즈의 기억으로 제 방을 찾았다. 방 안에 들어온 그녀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방 안을 쭉 훑어보다가 책상 밑 서랍을 발견했다. 서랍을 열자 새하얀 종이가 몇 장 들어 있었다.

샤를로즈는 등받이 의자에 앉아 새하얀 깃털이 있는 펜으로 종이 위에 펜 꼭지를 툭툭 건드리며 턱을 괴었다.

“그런데 이 게임 속 샤를로즈와 안면이 튼 사람들의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데.”

자신의 퇴장을 도와줄 사람들의 이름.

일단 남자 주인공들부터 적어 볼까.

샤를로즈는 어제 끝낸 게임 속 엔딩의 네 명의 남자 주인공들의 이름을 대충 휘갈겨 적었다.

「요한 티타어스

해리슨 리스 아이비크니

루야

주드엔 엘리어트」

어젯밤에 끝낸 게임이라 남자 주인공들의 이름을 얼추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 악역 샤를로즈의 오빠들의 이름을 적어 보았다.

「유진 레베크

제레미 레베크」

샤를로즈는 참담한 표정을 지으며 종이에 적힌 이름들을 허망하게 바라보다가 쭉, 세로로 찢어 버렸다.

‘샤를로즈를 싫어하는 것들이 내가 도망가는 걸 도와주겠어? 오히려 악한 심정으로 샤를로즈를 고문하거나 죽이겠지.’

샤를로즈는 두통이 아려와 미간이 좁혀졌다.

어쩜 좋을까, 마음속에는 내적 갈등이 오갔다.

그러던 중, 똑똑똑, 누군가 샤를로즈의 방문을 두드렸다.

“아, 아가씨.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들어와.”

샤를로즈는 하녀가 들어오기 전에 종이를 세로로 찢은 종이를 얼른 서랍에 숨기고 제 식사를 가져온 하녀를 방 안으로 들여보냈다.

얼굴에 옅은 주근깨가 인상적인 양 갈래로 딴 갈색 머리에 고동색 눈동자를 지닌 하녀였다. 하녀의 얼굴들은 처음 보는 것 같네. 게임 속에서는 주인공들의 일러만 나왔으니까.

갈색 쟁반 위에 묽은 죽 하나와 숟가락 하나가 보였다.

식사를 담당하는 하녀는 샤를로즈의 책상 위에 묽은 죽이 담긴 그릇을 올리더니 그 안에 숟가락을 넣어 주었다.

“아가씨께서 몸이 좋지 않다 들어 죽을 준비해 보았습니다…….”

샤를로즈가 풍기는 분위기가 무서운지 하녀는 당당하게 말을 하다가 말끝을 살짝 흐렸다. 고개 역시 숙여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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