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8화.
자신의 생일날, 새벽부터 일어난 아델라는 하양이를 불렀다.
마력을 이용한 부름에 하양이는 뭔가 중요한 용건이 있을 거라 직감했다.
아델라가 자신을 은밀하게 부를 때는 항상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방에 들어선 하양이는 은발을 뒤로 쓸어 넘기며 해사하게 웃었다.
“아델라, 무슨 일이야…?”
“세상이 변한 적 있어?”
드래곤과 계약자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는 아델라도 책으로 읽어 알고 있었다.
시간과 차원을 넘나들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
그들로 인해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도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엄마는 제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아델라는 정인이 제게 준 정보를 토대로 사실을 유추해 내기 위해 애썼다.
다섯 살. 한창 생각이 깊어질 나이였다.
엄마가 세상이 변했다면 변한 거다. 자신이 그 의미를 알아듣지 못했을 뿐. 그럼 하양이한테 던져 본다!
하지만 아델라의 호기로운 질문은 하양이에게 아무런 타격도 입히지 못했다.
“세상이 변한다고…? 그리고 이건 왜 묻는 건데….”
아델라와 정인의 대화를 듣지 못한 하양이는 이 대화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인상을 찌푸리는 하양이 앞에 딱 팔짱을 낀 채 앉은 아델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엄마가 슬퍼했다고. 이런 것도 모르면서 네가 엄마의 계약자라 할 수 있어?”
“…내가 잘못했어.”
아델라가 이럴 때는 무조건 잘못했다 하는 게 맞았다. 그냥 떼를 쓰는 것 같아 보여도 아델라가 이럴 때는 이유가 있으니까.
무엇보다….
‘귀여워서 어쩔 수가 없잖아.’
항상 다 큰 성인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다 보니 아델라가 더 사랑스러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알렉산더도 매번 차원 여행에서 돌아올 때마다 아델라를 위한 선물을 사 들고 오지 않나.
그리고 매번 져주는 것 같아 보여도 하양이는 나름의 선을 지키는 중이었다. 적어도 자신은 그렇게 믿었다.
“엄마랑 세상을 바꾼 적 있어?”
아델라의 붉은 눈동자가 하양이를 똑바로 마주했다. 알버트와 비슷한 듯 다른 색의 눈동자가 고왔다.
찰나의 순간, 하양이가 멈칫했다. 그리고 아델라는 그걸 귀신같이 포착했다.
“있구나.”
“아니, 없는데에….”
“하양이는 거짓말 못하잖아.”
“아니야….”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하양이 앞에 선 아델라는 마법을 써 공중에 휙 날아올랐다.
하양이와 시선을 맞춘 아델라가 뚫어져라 하양이를 응시했다. 맞잖아, 맞잖아!
하양이는 거짓말을 한 적 없는 저 자신을 원망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단 말이다. 한숨을 내쉰 하양이는 두 손을 들었다.
“난 말 못 해줘.”
“말해줘.”
아델라가 살짝 내려가 하양이의 손을 꼬옥 잡았다.
고사리처럼 작은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하양이가 움찔했다. 하지만 차마 아델라의 손에서 제 손을 빼내지는 못했다.
이 대단한 차기 황제는 드래곤의 마음을 어떻게 녹이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것도 유전인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아델라라도 말해줄 수 없었다.
“정인도 말 안 해줬을 거잖아. 그럼 내가 말할 수 없어.”
“다 알려달라는 게 아니야. 그냥 엄마가 왜 슬픈지만 정확히 알고 싶어.”
“…….”
아델라도 아델라 나름대로 상황이 곤란했다.
이 정도 되면 보통 하양이가 제게 굽히고 들어오는데 이번에는 그러질 않으니 초조했다.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 상황을 겪은 적이 드물었기에 오기도 생겼다.
“알려줘.”
아델라의 손이 움직였다. 어렸지만, 그녀는 자신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았다.
드래곤을 이길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한번 해볼 수는 있었다.
아델라의 손에서 마력이 피어오르는 것을 눈치챈 하양이가 미소를 지우고 물었다.
“내게 마법을 쓰려고?”
“…….”
웃음기가 모두 걷힌 무감각한 얼굴을 마주하고 나서야, 아델라는 지금 제가 하양이에게 무엇을 하려 했는지 깨달았다.
하양이에게 감히 그의 뜻과 반대되는 일을 시키려 했다. 그것도 강제로.
‘…내가 잘못했어.’
아델라는 순식간에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하양이가 아무리 편해도 그렇지, 의지를 거스르게 하는 마법은 함부로 쓰는 게 아니라 배웠는데!
‘하양이가 그동안 나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하양이가 나를 미워하게 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순식간에 머릿속 가득 찼다. 아델라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미안해. 잘못했어, 하양아. 나 진짜 그러려던 거 아니었어.”
“우, 울지 말고….”
하양이는 마찬가지로 당황했다.
평소 사람들이 우는 것은, 심지어 그 아델라가 우는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갈 곳을 잃은 채 방황하던 하양이의 손은 결국 아델라를 제 품에 꼭 안아 올렸다.
“잘못했어어…. 난 그냥 엄마가 슬퍼하니까…. 그런데 나는 슬프지 않게 할 힘이 있으니까 그렇게 해주고 싶었어….”
히끅히끅 소리를 내면서도 아델라는 자신의 상황을 충실히 설명했다.
하양이는 아델라의 등을 토닥이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랬어? 그랬구나… 같은 반응을 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델라의 반응이 이해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도 정인이나 알버트가 가끔, 세상이 바뀌기 전을 그리워하던 것을 보았으니까.
모든 게 평화로워지면서, 알버트와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는 오히려 예전보다 멀어졌다.
그들을 한데로 묶은 ‘그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기에.
“요, 용서해 주는 거야?”
울음을 그친 아델라가 새빨개진 코끝을 쓱쓱 문지르며 물었다. 하양이는 그녀를 보며 픽 웃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고….”
“응.”
“정인은 자신의 추억을 함께 곱씹을 사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서 슬픈 거야.”
“…왜?”
“네가 들은 대로 세상이 바뀌었으니까.”
아델라는 아직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추억을 왜 굳이 함께 곱씹어야 하는 걸까. 혼자만 가진 추억도 추억인데.
엄마 아빠와 함께 소풍을 간 기억도 추억이고, 하양이와 함께 즐겼던 티파티도 추억인데.
엄마 혼자만 기억하는 추억이라도 있는 걸까? 그럼 좀 슬플 것 같긴 했다.
메르시와 엄마만의 추억이 있는데, 엄마만 기억하는 건 불공평하니까.
그럼 이에 맞는 아주 좋은 방법이 있지 않은가.
“그럼 기억나게 해주면 되잖아.”
“…알버트나 정인이나 그건 원하지 않거든.”
“왜?”
하양이는 아델라가 이 답을 듣지 않으면 집요히 물어올 것을 알았다.
그가 아니라면 정인이나 알버트에게 쫄래쫄래 가서 몇 번이고 묻겠지.
아델라도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대주면 될 듯했다.
“바뀐 세상에서, 그들이 더 행복하니까.”
하양이의 말에 아델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 후, 아델라가 질문을 다시 던졌다.
“그걸 엄마 아빠가 어떻게 알아?”
뜻밖의 의문이었다. 아델라는 정인과 알버트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나라면 엄마 아빠와의 추억을 기억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
…그렇네. 하양이는 속으로 아델라에게 동의해 버리고 말았다.
시간을 되돌아오며 알버트는 그들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순탄하게 바꾸었다.
하지만 그 덕에, 알버트와 정인이 리암, 슈버트, 메르시와 함께했던 시간들은 모조리 사라졌다.
그들이 그걸 원했을까?
모두의 비참했던 과거를 아는 알버트와 정인으로서는 거절할 수 없는 유혹이었을 것이다.
돌아간 시간 속에서 모든 비극을 반복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 모든 시간과 비극이 모여, 그때의 리암, 메르시, 슈버트를 이루어낸 것이 아닌가.
‘…이러다 설득당하겠는데.’
고개를 저은 하양이가 다시 말했다.
“말을 잘못했다…. 추억이 아니라… 비극이었거든. 좋은 시간보다 나쁜 기억이 많은.”
“그래도 나는 잊고 싶지 않을 것 같아.”
아델라가 단호히 말했다.
“엄마 아빠를 만나서, 알게 되고 서로 함께 이겨낸 시간들을.”
“…….”
“그 모든 순간이 모여 나를 만드는 거니까. 비극도 희극도 소중해.”
“…….”
인생의 비극이라고는 원하는 쿠키가 없거나 싫어하는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 정도가 전부였던 아델라지만, 그녀는 모든 말이 진심이었다.
엄마 아빠는 그녀가 아는 사람들 중 가장 완벽하게 멋진 사람이다.
그러니 엄마 아빠를 잊는 걸 좋아할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빠까지 연결되어 있던 거였어?’
일이 생각보다 커졌다. 하지만 물러설 마음은 전혀 없었다.
‘아빠는 항상 내 힘을 옳은 곳에 잘 써야 한다 그랬지.’
아델라의 작은 심장이 열정으로 불탔다.
엄마 아빠와 함께했던 시간을 모두 잊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기억을 되살려 주고 싶어졌다.
“…아델라, 너 설마.”
아델라의 손에 다시 마력이 차는 것을 본 하양이가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을 막으려는 하양이에게 아델라가 황급히 말했다.
“억지로 하려는 거 아니야.
사실 알버트와 정인을 위해 일단 저지르고 보려던 건 맞았다.
하지만 하양이에게 이렇게 저지당할 수는 없었다. 아델라는 정인에게 물려받은 순발력을 발휘했다.
“그 사람들한테 기회를 주려는 거야. 기억할지 말지 고를 기회.”
“…….”
“기억하고 싶을지도 모르잖아.”
아델라가 호소하듯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모든 순간이 소중할지도 모르잖아.”
하양이는 못내 아델라의 말에 수긍해 버리고 말았다.
어쩌면 이가 아델라의 이기적인 선택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내게도 잘못이 있지.’
하양이는 이미 설득당한 자신을 깨닫고 푸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인간 세상에 꽤 오래 있었는데….
왜 항상 자신의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물러지는지 모르겠다.
하양이는 아델라를 막지 않았다.
아델라의 손에서 빛이 떠올랐다.
“엄마 아빠도 내 선물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아델라가 웃었다.
그녀의 손이 반짝였다.
“리멤버(Remember).”
어릴 때부터 알버트와 견줄 만한 힘을 가진 초월자로 태어난 아델라는, 정인과 알버트 주위 사람들의 기억이 돌아오는 마법을 걸었다.
다만 알버트와 정인만을 위한 주문은 아니었다.
그녀가 건 기억 마법은 대상이 정말로 기억하길 원할 시에만, 영구적으로 기억을 되찾아주는 마법이었다.
기억을 되찾을 이들을 위한 아델라의 마음까지 함께 담은 것이다.
복잡하기 그지없는 마법이었지만, 아델라 앞에 불가능이란 없었다.
이윽고 아델라의 소망이, 이미 달라진 세상의 법칙을 뛰어넘어 리암, 메르시, 슈버트의 기억을 되살려냈다.
자신의 생일날, 저를 세상에 태어나게 해준 정인과 알버트에게 아델라가 바치는 오직 하나뿐인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