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7화.
알버트의 통치 아래 제국은 태평성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아델라가 다섯 살이 되는 동안, 정인과 알버트 주위 사람들에게도 많은 일이 일어났다.
메르시는 슈버트에게 자신의 마음을 은근하게 드러내며 슈버트의 마음을 돌리는 데 드디어 성공했다-5년간의 노력에 정인은 진심으로 눈물을 흘려주었다-.
리암은 서이나와 꽤 친한 친구가 되었다.
둘 사이에는 이성적인 기류 대신 맛집을 토론하는 대화가 오고 갔고, 리암은 한식에 누구보다 진심인 사람이 되었다.
그는 공작으로서의 임무를 다하는 한편, 시간 날 때마다 제국 전부를 돌아다니며 요리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서이나를 찾아 식도락 여행을 떠나곤 했다.
놀랍게도 둘의 음식 취향은 꽤 비슷했다.
모두 예전보다 밝은 모습이었기에, 정인은 그들의 기억이 사라진 게 전혀 아쉽지 않았다.
그늘 없는 얼굴을 볼 때마다 오히려 그때 자신과 알버트가 올바른 선택을 했다 생각하곤 했다.
비록 과거는 달라졌을지 몰라도, 모두 그녀가 기억하는 성정 그대로였으니까.
다만 다소 쓸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자신 앞에서 매번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메르시와 반말 한번 쓰지 않고 예의를 차리는 슈버트, 그리고 거의 마주칠 일도 없는 리암을 생각하면, 모두가 마음을 열었던 순간이 그리워졌으니까.
그게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순간들이라 해도, 그녀의 기억에는 영원했기 때문에.
겨울의 초입을 맞이하는 늦가을, 정인은 아델라와 하양이와 함께하는 티파티에 메르시를 초대했다.
모두 나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메르시도 한결 풀어진 듯 보였다. 정인은 눈을 반짝였다.
‘기회는 지금이다.’
메르시와 금방 예전 같은 관계를 만들 수 있을 거란 호언장담과 달리, 둘은 여전히 거리를 유지 중이었다.
메르시의 호칭은 여전히 ‘황후 전하’였고 자신의 이야기도 잘 하지 않았다.
가끔 슈버트와의 관계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것 빼고는.
조만간 슈버트와 만나 첫 데이트를 할 거라며 뛸 듯이 기뻐하는 메르시는 누가 봐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정인은 넌지시 운을 떼었다.
“메르시, 이제 슬슬 언니라고 불러주는 것은 어때요?”
그리고 정인이 호시탐탐 노리던 언니 호칭은 그대로 무산되었다.
“앗, 제가 어찌 그럴 수 있겠어요, 황후 전하.”
정인은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 딱 맞단 말이야.’
달라진 시간 속에 메르시의 성격이 달라졌다는 것을 너무 간과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정인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메르시는 정인의 눈치를 살살 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 때문에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았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그럼 물러가 보겠습니다!”
활기찬 목소리와 함께 메르시가 정인을 향해 고개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
이윽고 아델라에게 고개를 돌린 메르시는 헤실헤실 웃으며 아델라에게 손을 흔들었다.
알버트와 버금가는 마력을 가진 대마법사라 해도 귀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오늘처럼 검은색 머리카락을 양쪽으로 묶었을 때는 더!
“아델라도 안뇽.”
“메르시도.”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대답한 아델라가 메르시에게 손을 흔들었다.
잠시 후 아델라는 자신의 빈 그릇을 보며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다 옆에 앉아 있던 하양이를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나 쿠키 더 먹고 싶어.”
“…네 마력으로 가져오면 되지 않을까?”
아델라의 실력을 알고 있는 하양이가 조심스레 제안했다.
그 말에 아델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하양이에게 배신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몸을 파들파들 떨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어….”
하양이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지금 이렇게 나오면 자신의 말을 들어주기 전까지는 계속 화나 있겠다는 소리다.
아델라는 유독 그를 부려먹는 것을 좋아했다. 자신의 곁에 하양이가 있는 걸 숨 쉬는 것처럼 당연히 여겼다.
하양이가 처음 아델라의 이름을 불러줬을 때부터 시작된 일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하양이 본인도 이 어린아이에게는 유독 약해지곤 했으니까.
“아델라, 하양이한테 그러면 안 돼. 그리고 궁 안에서는 화이트라 부르기로 했잖아.”
“엄마도 하양이라고 부르잖아요…. 그리고 나도 하양이가 더 좋은데….”
타이르는 목소리에 아델라가 작게 대꾸했다.
하지만 정인의 말을 따르지 않는 게 걸리는지 정인의 눈치를 보았다. 정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둘을 번갈아 보던 하양이는 속으로 알버트를 불렀다.
‘보고 싶어어….’
알버트는 일주일 뒤 찾아오는 아델라의 생일 선물을 직접 마련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하양이는 설마 자신이 알버트를 그리워하게 될 줄은 몰랐다.
결국 하양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맛으로 가져와 줄까….”
“하양아, 괜찮아. 앉아.”
“아니야, 난 괜찮아….”
정인의 말에 하양이는 고개를 저었다. 옆에서 아델라가 손을 올리며 크고 단호히 중얼거렸다.
“초코.”
아델라의 취향은 확고했다. 하양이는 터덜터덜 걸어갔다.
정인은 하양이와 아델라의 말을 들으며 살풋 웃었다. 저렇게 매번 져줘서야.
자신이나 알버트보다 아델라에게 무른 게 하양이였다.
한편, 아델라는 엄마와 단둘이 남았을 때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을 드디어 던졌다.
“엄마, 아까 왜 슬펐어요?”
“…슬퍼 보였어?”
“네.”
정인이 놀란 듯 묻는 말에 아델라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인 정인의 감정을 누구보다 잘 읽는다 자부하는 아이다웠다.
정인은 고민했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잠시 후, 그녀는 솔직히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메르시가 엄마를 아직 어려워하는 것 같아서.”
“그게 당연한 거 아니에요?”
“…항상 그런 건 아니었거든.”
“메르시가 변한 거예요?”
정인의 대답마다 아델라는 계속 질문을 던졌다.
아이는 궁금한 것이 많았다. 알버트를 닮아 어른스러운 모습도 보였지만 왜, 라는 질문을 자주 던졌다.
그저 궁금해서가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세상을 가지게 될 것을 잘 알았기에, 모든 것을 포용할 줄 아는 멋진 군주가 되고 싶었다.
아델라는 언젠가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어릴 때부터 그 책임과 무게를 이해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런 어른스러운 다짐도, 정인의 슬픈 표정 앞에서는 모두 무산되었다.
정인이 말없이 웃었다.
아까 전 언니라 부르라던 엄마의 말을 거부하고 가던 메르시의 모습을 떠올린 아델라가 눈을 부릅떴다.
“메르시가 잘못한 거네요!”
“아니야. 그저… 세상이 변한 것뿐이란다. 메르시는 잘못이 없어.”
메르시는 잘못이 없는데, 세상이 변했다니. 알쏭달쏭한 말에 아델라의 궁금증은 더 크게 부풀었다.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면, 잠을 자지 못할 것 같았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말 그대로란다.”
정인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아꼈다.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아 말해줬지만 더 이상 설명해 주는 건 위험했다.
메르시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 그저 가끔 이렇게 자신이 추억을 곱씹게 될 뿐이었다.
정인의 말에 아델라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냐, 엄마를 슬프게 했으면 메르시가 잘못한 거야.”
우리 엄마가 잘못했을 리 없으니까! 신뢰 가득한 아델라의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정인의 마음 깊숙한 곳까지 행복감이 차올랐다.
기억을 되살릴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유일무이한 초월자가 되어 사람과 세계의 법칙을 뛰어넘은 알버트는 기억을 살려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지금의 그들이 더 행복해 보인다 느꼈으니까.
메르시도, 슈버트도, 리암도 힘든 삶을 살아왔다.
그들의 마음 한편은 항상 트라우마에 잡아먹혀 있었고, 과거가 달라지지 않는 이상 그들은 항상 같은 자리에 서 있었을 것이다.
너무 선한 이들이어서, 끝내 죄책감을 떨쳐내지 못했을 테니까.
아끼는 이들과의 관계를 처음부터 시작하게 되더라도 그들이 예전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그게 알버트가 제 사람들을 아끼는 방식이었다. 정인도 알버트와 비슷한 의견이었다.
‘그래서 괜찮은데.’
아델라가 이렇게까지 화내줄 줄은 몰랐다.
“아델라가 이렇게 말해주니 이미 다 이겨낸 것 같은데?”
“하지만 엄마 눈은 슬퍼 보이는데.”
“그럴 리가.”
누구 딸 아니랄까 봐, 눈치가 정말 빨랐다. 정인은 아델라의 따가운 눈총을 받다 결국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쿠키를 한 아름 든 하양이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어, 저기 네가 좋아하는 쿠키 오고 있는데?”
자신에게 제대로 상황을 설명해 주지 않는 정인 때문에 토라져 있던 아델라가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화난 것과 별개로 쿠키는 먹고 싶었다.
하양이가 가져온 쿠키를 손에 쥔 아델라는 다시 옆에 앉은 하양이를 보며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하양이는 엄마 아빠랑 안 지 오래됐잖아.’
게다가 드래곤으로서 엄마랑 계약도 했다!
그리고 하양이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처음엔 안 된다 말하면서도 다 들어주곤 했으니까.
엄마가 말하지 않는다면, 혹 하양이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빠는 엄마가 원하지 않는 일은 하지 않으니 승산이 없었다. 아델라의 머리가 핑핑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머릿속엔 하양이가 그녀보다 훨씬 큰 성인이고 드래곤이며, 훨씬 오랜 시간을 살아온 인외의 존재라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자신의 옆에 붙는 쫄따구(?) 같은 존재일 뿐!
‘…우선 먹고 생각할 거야.’
아델라는 전투적으로 쿠키를 집어 먹기 시작했다.
하양이에게서 모든 것을 털어놓게 하려면 그만한 준비가 필요한 법이었다.
괜스레 느껴지는 한기에 하양이는 잠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와 눈을 마주친 아델라가 눈을 번뜩인 것 같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