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6화.
바닷가 여행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와 알버트에게 첫 아이가 찾아왔다.
배가 부르기 시작하는 15주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내 배가 점차 불러오기 시작했고, 주위 사람들은 안 그래도 극진히 모시고 있던 나를 거의 갓 태어난 아기처럼 대했다.
내가 강력한 마법사이자 드래곤의 계약자라는 사실은 모두 까맣게 잊어버린 듯했다.
그래도 적당한 운동이 필요하다는 황궁의 의사들 의견에 따라 산책은 가능했다. 다만 호위가 항상 뒤따랐다.
알버트가 그나마 나를 믿고 맡길 수 있는 호위는 주변 사람들뿐이었다.
하양이나 메르시, 리암, 혹은 레오나 정도였고, 덕분에 내 옆에는 항상 그들 중 한 명이 붙어 있었다.
알렉산더는 자주 궁을 비웠기에 보기 어려웠다.
대신, 올 때마다 아이 선물이라며 여러 차원에서 선물을 들고 오긴 했다.
가고일의 날개나, 엘프의 오르골처럼 내가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사실 누구와 견줄 바 못 하게 알버트가 가장 많은 시간을 나와 함께 보냈다.
나는 알버트의 손을 잡고서 황궁 정원을 거닐었다. 겨울이 찾아왔지만 이곳은 완연한 봄이었다.
아직 남아 있는 눈의 흔적 사이로 꽃은 찬란히 색을 뽐내며 피어났다.
장미부터 시작하여 안개꽃이나 수국, 이름 모를 들꽃까지 모두 모여 조화를 맞추었다.
나는 배를 쓰다듬으며 알버트를 흘끔 보았다.
알버트는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아름다우니까, 아이는 그를 닮았으면 좋겠다.
성별에 상관없이, 내가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닮은 아이라면 분명 사랑스럽겠지.
아니, 솔직히 누굴 닮았든 간에 상관없을 것 같다. 우리 사이에 태어나 준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나도 마찬가지란다.”
알버트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고.
“배를 쓰다듬고 나를 보았다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니 아이가 나를 닮았으면 좋겠다 생각했었고, 그 후에 눈을 굴리며 고개를 다시 끄덕이는 것을 보아서는 너를 닮아도 상관없다 생각한 것 같거든.”
…실로 셜록 홈즈에 가까운 추리력이다. 내 행동에서 추론해 내는 답변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아가, 네가 아빠만큼 대단한 눈치를 가진다면 세상 사는 것이 배는 쉬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엄마도 눈치가 빠르지만 아빠는 정상인의 범주를 뛰어넘거든. 그게 무엇이든 간에.
“나도 누구를 닮든 간에, 너와 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라면 상관없을 거라 생각해.”
알버트의 손이 내 배를 부드러이 만졌다. 아이의 심장박동이 그에게 전달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걱정도 되는구나. 내가 과연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지.”
“당연하죠.”
알버트가 쓸데없는 걱정을 할 때도 있군. 나는 바로 답하며 그의 걱정을 바로 일축했다.
그가 탑재한 눈치와 대단한 능력, 제 사람을 헌신적으로 돌볼 줄 아는 모습을 생각하면 나쁜 아빠가 되는 게 더 어려운 일이었다.
내 말에 눈을 휘둥그레 뜬 알버트가 작게 웃었다.
“네가 그렇게 말해주니 안심도 되고. 공부는 열심히 했다만… 실전은 다른 거니까.”
실제로 알버트는 요즘 남는 시간에 육아서란 육아서는 모조리 독파하고 있었다.
아이에게 최고의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한 노력이었다.
“넌 어릴 때 어떤 아이였니.”
“으음, 적당히 부모님 속 썩이고, 좋아하는 거 있으면 가지고 싶다고 떼쓰는 평범한… 철없는 아이였죠.”
엄마 아빠는 내게 아낌없는 사랑을 주며 때로는 친구, 때로는 선생님이 되어 주었다.
회초리는 들지 않으셨지만, 벌을 받은 적도 있었고 혼난 적도 꽤 있었다.
하지만 꾸중을 하시면서도 격려는 잊지 않으셨다. 다음에 잘하면 된다, 실수하면서 배우는 거다.
그런 말에 나는 의기소침해져 있다가도 금세 힘을 얻곤 했다.
“알버트는 완벽했던 것으로 알고요.”
내가 어릴 적 알버트를 떠올리며 말하자 그가 살풋 미소 지었다.
“빨리 철들어야 했거든.”
“…….”
알버트의 비상한 눈치는 그저 재능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가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익힌 생존 수단이었다.
“누굴 닮아도 괜찮지만, 그런 부분은 너를 닮았으면 좋겠어.”
그가 눈을 내리깔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나는 그의 손등 위에 내 손을 얹어 온기를 전하며 고개를 저었다.
“난 당신을 닮아도 좋을 것 같은데.”
“…….”
“그런 모습까지 모두 사랑스러울 테니까.”
아이답지 않은 모습이라 여길 수 있을지 몰라도, 그런 모습까지 모두 사랑스러울 테니까.
그리고 내 바람과 같은 아이가 찾아왔다.
***
본래 검은색인 내 머리카락과 이목구비, 그리고 알버트의 붉은 눈과 성격을 빼닮은 아이였다.
알버트는 아이를 꼭 껴안으며 벅찬 감동을 이겨내지 못하고 빨개진 눈시울을 보였다.
평소 표정 관리를 잘하는 그이기 때문에 더 기억에 남는 표정이었다.
알버트는 약간 메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와 나를 함께 닮았어….”
진통 시간은 길지 않았다. 우선 고통이 느껴지지 않도록 마법을 쓴 것은 물론, 아이가 우리를 고생시키기 싫은 것처럼 순식간에 나왔기 때문이다.
원래 삶에서라면 절대 상상할 수 없는 초고속 분만이었다.
아이는 그저 나를 닮은 순한 눈매를 접으며 방긋방긋 웃었다.
혹시나 해서 의사가 진단을 했지만, 아이에게 이상은 없었다. 활짝 웃는 미소는 아델라가 우리에게 건넨 인사였을 뿐이다.
알버트는 모든 일이 끝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방으로 빼꼼 들어온 하양이에게 아델라를 조심스레 넘겨주었다.
“화이트, 잠시만.”
“으응….”
하양이에게 아델라를 부탁한 알버트는 내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나를 꽉 껴안았다.
“수고했다.”
보이지 않는 얼굴이 왠지 울고 있을 것 같았다. 평소 제 감정을 잘 숨길 줄 아는 그라도, 이런 상황은 처음이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나는 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알버트의 품은 언제나 따듯하게 날 안정시켰다.
양수가 터졌을 때부터 시퍼렇게 질린 얼굴 하며, 평소 자기 힘들 때는 내색 한번 하지 않는 그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그가 나보다 훨씬 고생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난 정말 말짱했는데.
과잉 보호긴 해도, 모두 날 사랑하기에 나오는 행동임을 알기에 싫지는 않았다.
하양이가 우리 곁으로 조심조심 다가왔다.
“이름이 뭐야…?”
“아델라.”
존귀함, 혹은 우아함을 뜻하는 단어는 우리가 고심해 지은 이름이었다.
태어날 아이가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부를 작정으로 붙인 이름이었다.
“아델라….”
아델라의 이름을 부르며 아이를 내려다보는 하양이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피었다.
“아델라… 안녕… 나는 하양이야….”
아이를 조심스레 안으며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나를 흐뭇하게 했다.
아델라 쪽으로 고개를 숙인 하양이의 머리카락이 그녀의 입속으로 살짝 들어갔다.
하양이가 놀라는 것도 잠시, 아델라는 자신의 입속에 들어온 것을 우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금세 잠들었다.
“…이건 어떻게 하지.”
아델라가 문 머리카락 때문에 그쪽으로 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던 하양이가 심각히 물었다.
절대 아델라를 깨우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조심스레 빼면 될 것 같은데.”
내가 조언하자 하양이는 다른 손을 올려 아델라의 입속에서 제 머리카락을 빼내려다 멈추었다.
하양이가 미간을 좁히더니 우리에게 작게 소곤거렸다.
“안 돼….”
“하양아, 괜찮아.”
깰까 그러는가 싶어 진지하게 대답하자 하양이가 고개를 저었다.
“내 힘으로 풀어낼 수가 없어. 마력으로 붙잡고 있는 것 같아.”
“…응?”
하양이의 힘으로는 풀 수 없다니.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하양이가 장난치는가 싶었는데 목소리가 너무 진지했다.
“내 마력으로 풀 수가 없어… 아무래도 대단한 마력을 가진 아이인 것 같은데….”
“…내가 한번 보마.”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알버트가 아델라 가까이 다가섰다.
어느새 새근새근 잠든 아델라를 보며 알버트가 헛웃음을 지었다. 하양이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지금 태어났는데?
갓 태어난 아델라의 마력이 드래곤인 하양이를 뛰어넘는 게 가능하다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아닌가. 나는 믿을 수 없어 입을 쩍 벌렸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처음 태어났을 때부터 거의 울지 않으며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아델라는 비범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기록을 봐도 몇 안 되는 드래곤의 계약자인 나와 역사 속에서 찾을 수도 없는 초월자 알버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였으니까.
그리고 훗날 아델라는 알버트의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오름과 동시에 대마법사로 업적을 쌓으며 알버트를 뛰어넘는 먼치킨이 되었다.
***
아직 오동통한 볼이 예쁜 아델라는 알버트와 나, 그리고 하양이를 볼 때마다 맑게 웃었다.
아이의 마력은 쑥쑥 자랐고, 결국 어릴 때부터 초월자의 힘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아직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아델라의 마력은 알버트가 각별히 살폈다. 어떤 사고가 일어날지 몰랐으니까.
그렇다고 아델라가 사고뭉치라는 소리는 아니었다.
아델라는 알버트를 닮아 철두철미한 완벽주의자였다.
어린애가 의젓해 보이겠다고 애쓰는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 몰랐다.
하지만 아이 같은 때가 없는 건 아니었다.
아델라는 나와 알버트의 감정 변화에 유독 예민했다.
특히 나에 관해서는 ‘엄마가 슬프면 뭐든 해줄 수 있어.’ 같은 태도로 일관하며 주위의 우려를 외면하곤 했다.
그게 어떤 경우든 간에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나는 아델라 앞에선 더 표정 관리에 힘썼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매번 숨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나 매시간을 함께하는 어린 딸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그리고 아델라가 다섯 살 되던 해, 일이 터졌다.
아니, 일이 아니라 선물이라 해야 맞을지 모르는 아델라의 마법이 나와 알버트를 찾아왔다.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 아델라의 생일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