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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152화 (152/156)

외전 5화.

며칠 즐거운 야영 끝에 우리가 도착한 곳은 절벽 위에 자리한 고성이었다.

날씨도 우리를 도와주려는지 햇빛이 눈을 찌를 정도로 눈부셨다.

성에 들어선 우리는 각자의 방에 짐을 풀었다. 짐이래 봤자 가방 하나가 다였지만.

성을 관리하는 집사는 인자한 인상의 할아버지였다.

“방은 이쪽입니다….”

나와 알버트의 방은 성의 오른쪽 복도를 끼고 자리한 방으로 절벽 맨 끝과 맞닿는 곳이라 창문을 열면 바닷가가 한눈에 들어왔다.

나는 안에 들어서자마자 창문 밖을 내다보며 바다를 만끽했다.

잔잔한 파도가 이는 바다는 잘 닦인 유리처럼 안이 다 비쳐 보일 정도로 맑고 푸르렀다.

에메랄드빛의 색깔은 마치 보석을 자잘하게 부수어놓은 것처럼 반짝였다.

사람이나 마법의 힘으로 일궈낼 수 없는 자연의 경관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감탄사를 내뱉는 일뿐이었다.

“바다다….”

내게 다가온 알버트는 뒤에서 날 안으며 부드러이 중얼거렸다.

“여긴 미리 꾸며놓으려다 네가 원하는 대로 바꾸는 것이 더 좋겠다 싶어 그냥 두었단다.”

확실히 별장과 같은 곳이라 그런지 궁과 비교해 소박한 감이 있었다.

장식으로 쓴 보석도 드물었고 가구들도 만든 지 오래된 티가 났다.

인위적으로 향을 입히지 않은 듯, 상쾌한 나무 냄새가 드문드문 났다.

“저는 지금이 좋아요.”

나는 이 감성이 좋았다. 화려한 분위기는 따라갈 수 없는, 사람의 내면을 건드리는 느낌이 존재하는 방이.

궁도 이런 식이면 어떨까. 눈이 돌아갈 정도로 화려한 모습과 다른 매력이지 않을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모든 영주와 귀족들이 와서 머무르고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이자 이 제국의 중심부에 있는 황궁인데 그럴 수는 없겠구나.

“우리 여기 자주 와요.”

“네가 좋다면.”

알버트가 내 머리카락을 한쪽 귀 뒤로 넘기며 내 볼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슬쩍 내 앞으로 다가와서 이마, 코, 입술에까지 자잘한 입맞춤을 했다.

부드러운 봄바람 같은 입술은 설렘으로 내 마음을 간질거리게 했다.

그와 하는 입맞춤은 언제나 똑같이 떨렸다.

내 얼굴에 내려앉는 솜털 같은 입맞춤 끝에는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 깊은 키스가 이어졌다.

세상에 서로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서로를 갈구하고 나서야, 우리는 서로를 놓아줄 수 있었다.

알버트는 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넘겨주고서 눈꼬리를 접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예쁘구나.”

…우리가 하루를 보내고 나면, 혹은 키스를 끝내고 나면 알버트는 기다렸다는 듯 이렇게 나를 칭찬해 주었다.

“당신도 오늘도 잘생겼어요.”

그럼 나는 탑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말했던 것처럼 대답해 주곤 했다.

진심을 담은 칭찬이 얼마나 기분 좋은지, 나는 미처 몰랐던 것 같다.

그랬다면 그에게 더 많이 말해줬을 텐데. 사람의 말은 이토록 중요했다.

***

절벽과 가까운 숲에는 바다 쪽으로 내려갈 수 있는 오솔길이 따로 나 있었다.

그곳을 통해 내려가면 새하얀 모래가 가득한 백사장과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닷가를 낀 공간이 나왔다.

우리가 바다를 전세 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쏴아아, 소리와 함께 파도가 쳤다.

슈버트는 이미 물장난을 치기 시작했고 메르시는 슬금슬금 해변으로 다가가 발목을 물에 담갔다.

리암은 물을 보면 기겁하는 알렉산더와 함께 주변을 산책하기 시작했다.

레오나는 이곳에서도 내 호위를 맡아야 한다며 옷을 다 차려입고 꼿꼿한 자세를 지켰다.

사실 반응이 제일 궁금한 사람은 하양이였다. 항상 우스갯소리로 바다에 대해 이야기했고, 같이 오자고 말했던 만큼, 더.

나는 하양이를 잠자코 응시했다.

산들바람에 은색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하양이는 수평선 너머까지 이어진 물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더 예쁘네.”

작게 중얼거린 하양이는 고운 모래를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다 바닷가에 더 가까이 다가섰다.

그리고 물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맑은 물 안에 하양이의 손이 그대로 비쳤다.

“마음에 들어?”

나는 방금 주운 소라껍데기를 하양이의 손에 쥐여주며 물었다.

내가 준 소라껍데기를 손에 꼭 쥔 하양이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퍼졌다.

“응. 생각보다 더. 기다리길 잘했다….”

다시 500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리게 되며 하양이에게 바다에 가볼 시간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은 아닐 테다.

하지만 하양이는 나를 기다렸다.

“약속 지키길 잘했어….”

느리게 중얼거리며 청초하게 눈을 내리까는 얼굴에는 행복감이 깔려 있었다. 내가 만난 소중한 인연.

“나도 약속 지켜줘서 고마워.”

“그런데 이게 뭐야?”

“아, 이건 소라껍데기라는 건데… 안에서 파도 소리가 나. 한번 귀에 가까이 대봐.”

내 말을 이해할 수 없는지 하양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지만 내 말에 토를 달지는 않았다.

하양이는 항상 그랬다. 내가 말을 하면 그 말에 의문을 가지는 대신 잠자코 따라줬다. 나를 향한 무한한 신뢰는 언제나 고마웠다.

하양이가 제 긴 손가락을 움직여 소라껍데기를 귓가에 가져다 댔다.

처음엔 미간을 좁히며 집중한 듯 보이던 그는 이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기에 바다를 옮겨놓은 거야? 마법인가?”

“아니, 이건 자연의 산물.”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때로 자연은 더 마법 같은 일을 만들거든.”

내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하양이는 소라껍데기를 손에 꼭 쥐었다.

별거 아닌데도 좋아하는 모습에 절로 흐뭇해졌다. 나는 하양이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으며 물었다.

“마음에 들어?”

“응.”

“여기 주변에 많은데, 같이 주워볼까. 이곳을 기념할 수 있는 물건도 되고 좋겠다.”

“…주변에 많아?”

모래와 바다에만 정신을 빼앗겨 있었던 하양이가 솔깃한 듯 눈을 빛냈다.

나보다 최소 한 뼘은 더 큰 남자에게서 새끼 드래곤일 때의 모습이 덧그려졌다.

“좋아, 가자아….”

하양이는 신이 나서 움직이며 모래 속을 살폈다.

나와 하양이는 예쁜 조개껍데기와 소라껍데기를 찾아 한참을 돌아다녔다.

손에 가득 차고도 남는 조개껍데기와 소라껍데기를 찾고 나서야, 하양이는 만족하며 모래 위에 앉았다.

햇볕을 받아 따듯하게 달궈진 모래는 마치 뜨끈한 난로 같았다.

햇빛을 한 번 보았다 벌러덩 누운 하양이의 머리카락이 꽃처럼 예쁘게 흐트러졌다.

하양이가 날 올려다보며 해맑은 얼굴을 했다.

“알버트랑만 있어서 아쉬웠는데 이번 여행은 너무 좋다.”

…그 말에 아주 많이 찔렸다. 알버트와 함께 시간을 보내느라 하양이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이 별로 없었으니까.

그를 달래느라 하양이를 만나는 건 다소 뒷전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렇게 나랑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미안해졌다.

“내가 잘못했어. 하양이 너도 충분히 생각해 줬어야 하는데.”

“으응? 하지만 알버트는 정인의 반려잖아. 당연한 일이지….”

하나 우리 착한 하양이는 내 말에 외려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저었다. 내 사과를 이해할 수 없는 듯했다.

하양이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 자신이 열심히 주워 모은 조개껍데기 중, 제일 예쁜 분홍색 껍데기를 내 손 안에 쥐여주었다.

“그냥 내가 정인 곁에 있고, 정인의 편이라는 것만 기억해 주면 돼.”

원하는 것 하나 없는 듯 보이는 하양이가 내게 한 부탁은 그뿐이었다.

“또 같이 여행 가야지.”

“응, 정인의 시간이 되면.”

하양이는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하지만 전제가 붙었다.

내 시간이 될 때, 라는 말은 하양이가 앞으로 내가 얼마나 바빠질지 알고 있다는 말이다.

알버트가 내 곁에 항상 붙어 있을 거라는 것도.

하지만 넌? 나와 알버트를 위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 주는 동안 넌 무얼 하고 있을 건데.

그동안 알버트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며 뒤로 미뤄놓았던 질문이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울상을 지었던 모양이다.

“난 알버트도 좋아. 둘이서 잘 지내면 더 좋고. 그러니까 그렇게 슬픈 얼굴은 하지 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양이가 중얼거렸다.

“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하니까.”

“…….”

하양이에게 쉬이 다른 사람을 찾으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가 마음을 온전히 연 사람은 나와 알버트, 그리고 알렉산더밖에 없다는 것을 아니까.

“알렉산더도 혼자 잘 다니잖아. 나도 할 수 있어….”

“…계약자와 긴 시간은 떨어져 지낼 수 없잖아.”

“그 전에 돌아올게….”

계약자는 서로 많은 것을 공유하게 된다.

어찌 보면 서로의 목숨줄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아서, 서로 떨어지는 건 목숨을 위험하게 만들 수 있는 일이었다.

서로를 완전히 믿지 않으면 안 되는 관계. 그래서인지 역사 속에 나온 계약자는 드래곤과 서로 연인이었던 경우가 꽤 있었다.

“네가 반려를 찾아서 계약해야 했는데….”

“계약이 꼭 반려와 이루어져야 한다는 건 잘못된 생각이야….”

내 말에 하양이는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더니 고개를 저었다.

“서로를 충분히 아끼고 위한다면 언제나 가능한 거니까.”

그게 내 경우에는, 정인이었을 뿐이고.

날 보며 중얼거린 하양이의 눈이 바다와 비슷한 색채로 반짝였다.

“나는 지금 행복해.”

진심으로 가득 찬 어조에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내가 하양이의 행복을 재단할 수는 없으니까. 하양이가 행복하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하지만 한 가지 가정은 해두고 싶다.

아직 어린애처럼 감정에 무디고 세상에 대해 모르는 것이 더 많을 그에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온 마음을 다해 축하해 주고 싶기에.

나는 넌지시 말을 이었다.

“하양아, 만일 네 삶에도 반려가 나타난다면….”

“…….”

“그때는 꼭 나한테 제일 먼저 말해줘야 해?”

내 말에 하양이는 고개를 슬쩍 숙였다가 끄덕였다.

“그래.”

나타날지는 모르겠지만.

아리송한 얼굴이 하양이가 내뱉지 않은 뒷말을 대신했다.

나는 피식 웃었다. 인연은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찾아오는 법임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나와 알버트의 인연이 그러했던 것처럼.

하양이는 소라껍데기를 가져다 귓가에 가져다 대며 나를 향해 손짓했다.

“정인도 옆에 누워봐. 햇빛이 정말 따듯해.”

나는 하양이 옆에 누웠다. 하양이가 내 귓가에 소라껍데기를 대자 쏴아아 하며 잔잔한 파도 소리가 울렸다.

바로 옆에 파도가 치는 바다를 두고 소라껍데기를 대는 모습이 우스워 보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좋았다.

누워서 온몸에 햇빛을 받고 있으니 몸이 노곤해진다. 햇빛에 목욕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한껏 일광욕을 지키고 있던 나와 하양이 위에 그늘이 졌다.

“둘을 그대로 둘 수 있는 건 여기까지가 한계인 듯한데.”

“그럼 알버트는 우리 둘 사이에 누워….”

하양이는 흔쾌히 답을 내렸고 눈을 흘기던 알버트는 결국 우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누웠다.

이제 하양이한테 져줄 줄도 알고. 둘 사이가 이렇게 좋아질 줄 예상이나 했을까.

오늘도 어김없이 기분 좋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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