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화.
“이제 진짜, 더 이상은 안 돼요. 제발 그만 괴롭혀요….”
오늘도 나는 어김없이 알버트에게 그만을 외치며 초죽음이 된 채 침대에 늘어졌다.
오늘 새벽까지 혹사당한 몸 때문이었다. 정말 처음 한 달간은 차라리 옷을 안 입는 게 더 익숙할 정도였다.
나와 헤어진 시간 때문에 벼르고 있었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다시 만나게 된 감격스러운 마음도 잠시, 나는 몇 번이나 마음을 고쳐먹어야 했다.
알버트가 원하는 만큼 같이 있어 주겠다는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어…. 내가 할 수 있을 만큼만 하겠다고 말해야 했는데…. 내가 알버트의 체력을 너무 우습게 본 것이 아닌가 싶다.
하양이의 계약자로 돌아온 만큼 몸의 마력이나 체력은 늘어났지만, 알버트는 애초에 인간의 범위를 뛰어넘은 사람이었다.
“정말 씻겨주기만 할 거란다. 좀 있으면 화이트가 찾아올 것 아니냐.”
알버트가 축 늘어진 나를 부축해 욕실로 데려가 주며 말했다.
나는 의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알버트를 응시하다 결국 그에게 몸을 맡겼다.
하양이와의 약속을 어기게 놔둘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알버트와 나는 따듯한 물 안에 같이 들어왔다. 욕조는 우리 둘이 들어가고도 공간이 여유로울 만큼 널찍했다.
서로를 마주 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알버트는 짐짓 엄한 얼굴로 나를 보며 조곤조곤 말했다.
“가만히 있거라.”
알버트는 내 머리카락에 거품을 냈다. 머리에서부터 좋은 꽃향기가 흘렀다.
나는 어깨 주위로 흘러내리는 백색 머리카락을 보며 슬며시 웃었다.
하양이와 다시 만나 알버트로부터 드래곤의 계약을 넘겨받았을 때 내 머리카락 색은 바뀌지 않았다.
처음 계약할 때처럼 영혼만 있던 상태에서 계약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본래 내 머리 색인 흑발을 유지할 수는 있었지만….
“이제 머리 색이 달라….”
시무룩해하는 하양이의 소원도 들어줄 겸 머리카락을 백색으로 되돌리기로 한 것이다.
나와 하양이 둘 다 원했기에 가능한 변화였다.
머리를 감겨주며 두피를 조금씩 눌러주는 게 마사지 같아서 몸이 나른해졌다.
세심한 손길이 마치 5성급 호텔에 놀러 온 기분을 느끼게 했다.
“좋다….”
내가 없는 사이 이런 것까지 연습한 건지도 모르겠다.
“열심히 물어본 보람이 있구나.”
“물어봐요?”
알버트의 말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주위 시종들을 불러 물어보았지. 널 씻기는 데 사람을 쓸 수는 없는 노릇 아니니.”
“…아직 안심이 되지 않으세요?”
“안심과 별개로 너에 관련된 일 처리는 내가 직접 하는 것이 편하단다.”
으음, 이건 분리불안보다는 보통 사람의 생각은 이해하지 못하는 천재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고.
그게 일에서 벗어나 이제 나와 관련된 모든 일에 해당되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내 일 처리도 마찬가지 아니야? 나는 불안한 생각에 잠겼다.
알버트는 새로운 삶에서도 여전히 황제가 되었다.
황제가 된 이후, 누가 황후가 될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지만, 알버트는 자신의 압도적인 무력을 바탕으로 신하들의 의견을 깔끔히 묵살했다.
그리고 나를 데리고 온 것이다.
드래곤의 계약자라는 호칭은 여전히 모두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내가 황후 자리에 오르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혼식은 우리가 돌아온 순간 바로 이루어졌다. 그가 황제가 된 이후 가장 크게 열린 행사인 만큼, 규모는 엄청났다.
내 생애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을 받아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수가 너무 많아 마치 자잘한 점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게 연예인의 삶인가 싶었다.
결혼식이 끝난 이후, 바로 알버트가 머무는 궁에 들어간 나는 그동안 알버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들었다.
모두가 좀 더 행복해질 수 있었던 이야기를 비롯해 나를 만나기 전 부모님을 만난 것까지.
그에게 내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는 해줬지만, 정확한 날짜나 시간을 밝힌 적 없었기에 찾는 게 쉬운 여정은 아니었을 터다.
더군다나 나를 한시라도 빨리 만나고 싶어 했던 사람임을 알았기에 더.
나를 향한 그의 마음이 얼마나 진심인지 다시금 느끼며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그날도 잠을 자지 못했지.
상념에서 빠져나온 나는 다시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알버트에게 시달리느라 일을 제대로 한 적은 없었지만 앞으로는 정말 황후의 업무를 해나갈 것 아닌가.
그런데 내 일 처리가 알버트의 마음에 들 리가 없어 보였다.
물론 사람을 끼고 배울 테지만…! 그래도 알버트를 만족시키기란 힘든 일일 테니까.
…그러면 나한테 실망하는 거 아닐까?
“무슨 생각 하는지 알겠는데, 네게 실망할 일은 없을 거다.”
알버트가 수건으로 내 머리카락을 말려주며 피식 웃었다. 나는 흠칫했다.
“또 제 얼굴이 다 드러났나요?”
“그래.”
내가 포커페이스까지는 아니더라도, 남한테 내 감정이나 생각을 숨기는 데 어색한 편은 아닌데 알버트 앞에서는 항상 어린애가 되는 기분이다.
그 앞에서 부리게 되는 애교도 그렇고.
그가 그만큼 편해졌다는 거겠지.
“제가 정말 일을 못해도요?”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알버트가 능청스레 말했다. 그렇긴 하지만… 난 피식 웃다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한 후 그의 볼을 쿡 찔렀다.
“여기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유능한 사람.
“그렇게 봐준다니 고맙지만….”
수건을 내려놓은 알버트의 손이 내 아래턱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손길에는 조금 전과는 달리 음심이 그득 담겨 있었다.
“유혹하면 그냥 보낼 수가 없지 않니.”
“…유혹이 아니었는데. 그럼 앞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걸 자제할까요?”
“자제하면 내가 얼마나 애탈지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게냐.”
눈을 흘긴 알버트를 보며 어색히 웃는 것도 잠시, 목덜미에 뜨거운 입술이 닿았다 사라졌다.
그의 눈이 아직 타오르는 노을처럼 붉게 내려앉았다.
“아니요, 절대로.”
내가 알버트와 함께하며 깨달은 사실이 있다면, 대답은 제때 하는 것이 좋다는 거다.
이렇게 알버트의 미모에 홀려 쳐다보고 있다가는 그가 원하는 대로만 끌려가기 십상이었다.
이게 바로 경험에서 비롯된 생활의 지혜.
“…우선 가기는 해야겠지.”
못 미덥다는 듯 답한 알버트가 나를 욕조 안에서 제 품으로 끌어 올렸다.
아직 아쉬운 듯한 어조긴 했지만, 날 건드릴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이제 이렇게 날 안아서 옷을 입혀주러 가겠지.
이 생활을 두 달 반 정도 반복하다 보니, 알버트의 품이 걸어 다니는 것보다 익숙해졌다.
…어, 이거 또 심각한 주제인데.
좋지 않아. 좋지 않아. 나는 결연한 얼굴로 알버트에게 소곤거렸다.
“알버트, 이렇게 매번 다 해주면 나쁜 습관 들어요.”
“나쁜 습관이 무언데.”
“모든 걸 당신한테 의지하게 되는 거죠.”
“난 좋구나. 빨리 생겼으면 좋겠어, 그 습관.”
알버트는 환히 웃으며 답했다. 그게 진심이라는 걸 알아서 나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말싸움에 이기는 법이 없는데, 기분은 상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슴 뻐근한 행복이 넘쳐났다.
매 순간 사랑받는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당신이 나는 너무 좋다.
***
우리는 황궁 앞에 마련된 마차로 향했다.
나와 알버트의 마력을 생각하면 텔레포트로 이용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부러 마차를 타고 3박 4일 여행을 하자 제안했다.
마차를 타며 야영도 하고, 중간에 다른 나라에 머물기도 하는 것이 여행의 묘미 아니겠나.
텔레포트는 간단하지만 그만큼 생략되는 절차가 많다. 생략되는 것들 속에서 많은 추억도 생겨날 기회를 잃는 법이다.
“정인….”
마차 앞에는 준비를 마친 하양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하양이의 품에 꼭 안겼다. 내 주변으로 흐드러지는 은발이 마치 등나무꽃 같았다.
“오랜만이야.”
포옹도 잠시, 알버트의 따가운 눈빛에 나를 놓아준 하양이가 화사하게 웃었다.
이렇게 제대로 얼굴 보는 게 얼마 만인지 몰랐다. 오랜만에 봐도 특유의 나른한 분위기는 여전했다.
“나도 있긴 한데.”
하양이 뒤에서 알렉산더도 빼꼼 모습을 드러냈다.
키가 작아 제대로 보이지 않았었다. 본래 모습을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다.
이렇게 또 반가운 얼굴을 보게 되어 어찌나 다행인지.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기에 성체 드래곤이 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듣긴 했지만, 실제로 보니 감흥이 남달랐다.
로제 아티어스의 존재가 사라지면서 새로이 나타난 시련을 넘어갈 수 있게 도와준 드래곤이어서, 더.
나는 알렉산더에게 악수를 청하며 웃었다.
“다시 볼 줄 알고 있었어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훈훈한 분위기가 흐르는데, 뒤에서 자그마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린 나는 낯익은 얼굴들을 마주했다.
“아, 안녕하십니까. 정인 님. 저는 이번 여행에서 정인 님의 호위를 맡게 된 레오나입니다.”
여전히 올곧은 모습을 하고, 깍듯이 예의를 차리는 레오나.
“그리고 저는 폐하의 명을 받들어 함께 내려가게 된 메르시라고 합니다!”
옆에서 예전보다 한결 활기찬 얼굴로 윙크하고 있는 메르시.
“저도 마찬가지로 폐하의 영광스러운 명을 받들어 이번 여행을 함께하게 된 슈버트입니다.”
황후 앞이라서 그런지 한껏 예의를 차리고 있는 슈버트까지.
…이게 어찌 된 일이야? 하양이와 나, 그리고 그의 간단한 휴가일 것 같았는데 이번 여행의 스케일이 생각보다 커 보였다.
이런 일을 계획할 사람은 한 명뿐인데. 내가 알버트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가 살며시 웃으며 대꾸했다.
“리암은 나중에 합류할 거란다.”
“…….”
“황제의 권력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 아니냐. 한번 이용해 보았단다.”
아직 할 말을 잇지 못하는 내게 가까이 다가온 알버트가 속삭였다.
“모두 보고 싶었을 테니까.”
그는 언제나 내 속내를 금세 읽어낸다. 그게 어디든, 어느 순간이든.
지금도 마치 깜짝 선물을 받은 듯한 기분이었다.
내 귓가에 입술을 댄 알버트가 속살거렸다.
“넌 레오나와 메르시와 같은 마차 안에 탈 거다. 즐거운 시간 보내고….”
잠시 뜸을 들인 그가 내 볼에 살짝 입술을 맞췄다가 떨어졌다.
“이따 보자꾸나.”
나를 믿는 모습을 보니, 행복감이 차올랐다.
이런 게 행복이 아닌가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