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 외전
외전 1화.
삐용삐용.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그 사이에 연기가 뿌옇게 흐르며 사고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요란히 알렸다.
가물가물한 정신 속에서 여자가 울며 중얼거렸다. 몸에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이는 그녀에게 전혀 중요치 않았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학원에 가 있을 자신의 딸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
언제나 자신에게는 어린애 같은 그 아이를 두고 이곳에서 죽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온몸이 벌벌 떨렸다.
“정인이, 어떻게 하… 라… 고.”
이는 옆에서 눈을 반쯤 감고 몽롱한 정신에 잠겨 있던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남자는 이를 악물며 몸을 일으키려다 실패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건지, 아까 전 부딪칠 때 뇌에 손상이 온 건지, 몸을 움직일 힘이 하나도 없었다.
죽는 것이 두렵다. 하지만 죽는 것보다 더 두려운 건, 하나뿐인 딸이 혼자 남는 일이었다.
사랑한다 매번 말해도 부족한 딸.
그 딸을 어떻게 이 험한 세상에 혼자 남겨둘 수 있겠는가.
그 해맑은 미소가 계속될 수 있도록 옆에서 봐주고 지켜주고 응원해 줘야 하는데.
둘이 동시에 가버린다면, 그걸 해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눈가에 맺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서로를 마주 본 부부는 흐느끼며 손을 뻗었다.
“여보, 우리 정인이를 위해 기도라도 해야….”
“당신들인가.”
그때 몽롱하던 정신이 맑아지며,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에 흐르던 피가 멎고, 저절로 고개가 들렸다.
목소리의 주인을 마주하게 된 부부는 얼떨떨한 기분에 눈을 깜빡였다.
사람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주위 소리가 멀어지고, 갑자기 다른 세계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몸의 고통도 아스라이 멀게 느껴졌다. 푹 자고 아침에 막 일어난 것처럼 온몸이 가뿐했다.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남자는 한국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붉은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이질적으로 느껴질 만도 한 눈은 황혼의 노을처럼 반짝여서,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나는 알버트 그레이라고 한다.”
남자는 자신을 가리키며 뜻밖의 자기소개를 했다.
요즘은 저승사자도 글로벌한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알버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들의 미래를 바꿀 수는 없어.”
단호한 답은 사실이었다.
알버트는 이들을 살리는 순간, 자신이 아는 정인이 사라지고 미래가 바뀔 것임을 알았다.
본래 죽어야 하는 사람들을 살리는 데는 그만한 의지와 희생이 필요한 거니까.
정인도 이를 알기 때문에, 과거를 돌아다닐 때 굳이 이 순간을 보려 들지는 않았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이 지금 죽는 사실 자체는 바꾸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인을 다시 기다리며, 사람들과 새로운 인연을 맺어가며 고민했다.
그는 자신과는 달리 행복해 보이던 정인의 가족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었다.
혼자 남겨진 정인도 힘들었겠지만, 그토록 사랑하던 딸을 혼자 보낸 부모도 마음이 편치는 않았겠지.
그러니까.
“하지만 정인은 행복할 거야.”
정인이 얼마나 행복해질지는 조금이나마 알려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들이 너무 걱정하고, 괴로워하다 죽지 않도록.
그녀를 낳고 키운 사람들이지 않나. 적어도 인사 한번은 하고 싶었다.
“그녀를 이 세상에 낳아줘서 고맙다.”
그렇게 귀하고 예쁘게 키워줘서 고맙다고. 그녀와 자신을 만나게 해줘서 감사하다고.
알버트는 주문을 걸었다. 정인과 그가 함께했던 시간들이 부부의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정인이 알버트를 만나 서로를 알아가던 시간들이 영화처럼 재생되었다.
부부에게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마법처럼 비현실적인 일이 계속 생기고 있는데, 이 모든 게 현실이라는 사실은 뼈저리게 느껴졌으니까.
지금보다 다소 나이를 먹은 정인의 얼굴을 보자, 부부의 눈에 다시 눈물이 흘렀다.
일련의 기억이 흘러갔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죽기 전에 환상이라도 보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딸은 행복했다.
다소 방황할지는 몰라도, 끝내 행복해질 것이었다.
그들의 앞에 나타난 남자와 함께.
“…잘 부탁드립니다.”
눈앞의 남자가 좋은 사람인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들의 딸의 이름을 입에 담는 순간 보이던 애정은 연기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알버트는 웃었다.
“나야말로.”
셋은 악수를 나누었다.
***
“빨리 응급실로 끌고 가!”
차 안에서 부부를 구출해 낸 사람들이 바삐 움직였다. 들것 위에 누운 부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들의 손이 툭, 땅을 향해 힘없이 떨어졌다.
예전보다는 행복한 마지막이었다.
알버트는 그들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바로 만나러 갈 줄 알았더니….”
옆에 선 하양이가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작게 투정했다.
“할 수 있는 건 하는 게 좋으니까.”
“알겠어어….”
하양이도 이곳에 온 이유는 이해하고 있는 바였기에 재빠르게 수긍했다.
하지만 500년을 기다린 만큼, 정인이 보고 싶은 건 사실이었다.
알버트는 그들의 마지막까지 예의를 지켜 인사한 후 눈을 치켜떴다.
“자, 그럼 이제 가볼까.”
알버트가 말하자 하양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좋아아!”
둘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다시 정인을 만나기 전의 일. 그녀는 모를 상견례였다.
***
“바다, 바다아….”
뜻 모를 음을 중얼거리던 하양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가지런히 빗었다.
시녀가 해줄 법한 일이었지만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사람들이 제 시중을 드는 게 익숙하지 않은 성체 드래곤이 혼자 알아서 하는 걸 선호했기 때문이다.
머리 빗기를 마친 하양이는 거울 속 자신을 들여다보며 옷을 갈아입었다.
정인은 여러 번 귀족이 입는 크라바트나 비싼 고급 재킷, 셔츠 같은 것을 선물해 줬지만 그는 셔츠와 헐렁한 바지가 제일 편했다.
“가서 갈아입을 옷도 챙겼고….”
직접 여행 가방을 챙긴 하양이는 한껏 뿌듯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정인과 알버트를 만나러 갈 시간이었다.
시계를 본 하양이는 멈칫했다. 아직 정인과 약속한 시간이 30분이나 남아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오늘 떠난다는 사실에 들떠 약속한 시간도 전에 찾아갈 뻔했다.
‘그럼 알버트가 싫어하는걸.’
매일 같이 있으면서도, 알버트는 정인을 괴롭히는 것을 좋아했다. 아침에도 마찬가지였다.
‘반려란 그런 거니까.’
알버트는 정인을 만난 순간, 그녀에게 드래곤의 계약자 자리를 넘겼다.
이미 한 번 하양이와 계약을 했던 정인은 자연스럽게 그 계약을 되돌려 받았다.
“네게서 가져오려던 계약을 이렇게 넘기게 되다니, 생이란 정말 알 수 없구나.”
계약을 넘기기 전, 알버트가 한 말이었다.
정인과 하양이는 다시 계약자가 되었다. 정인에게 차원을 넘나들 수 있는 힘이 생겼다.
드래곤의 계약자가 아니게 되었다 해서, 알버트의 현 위치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계약자가 된 이후에도 제 힘을 계속 끌어올렸고, 결국 드래곤의 힘 없이도 차원을 넘나들 수 있는 유일무이한 초월자가 되었다.
이는 에밋도 도달하지 못한 경지였다.
둘은 함께 차원을 넘어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왔고, 이곳에 다시 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그토록 가고 싶어 하던 여행을 갈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돌아오고 나서도 3달은 기다려야 했지만.
하양이는 정인을 침실로 데려가던 알버트의 모습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계약자 간의 감정과 생각이 서로 원할 때만 전해진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하양이는 습관적으로 다시 시계를 보았다. 시간이 아직 20분이 남았다.
짐을 다 챙기고 단장도 마치니 할 일이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잠이나 잘까.’
잠은 더 이상 그에게 생존 수단이 아니라 즐거움이었다. 폭신한 이불을 파고드는 감각은 언제나 좋으니까.
그때, 생각에 빠져 있는 하양이의 상념을 깨트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어!”
어느새 폴리모프를 마친 파란색 머리카락의 알렉산더가 베란다 쪽에서 손을 흔들었다.
“떠나는 거 아니었어…?”
“이미 방문하고 돌아온 거지. 너 혼자 가기 심심할까 봐 이 몸께서 와준 거다.”
“와아….”
어깨를 으쓱이는 알렉산더를 내려다보며 하양이가 감흥 없는 어조로 내뱉었다.
알렉산더가 목소리가 그게 뭐냐며 길길이 날뛰었다. 물론 하양이에게는 아무런 타격도 없었다.
“아니, 진짜 너 생각해서 온 거거든? 그렇잖아. 알버트나 정인 그 둘은 부부고. 이번에 따라간다는 슈버트나 메르시 사이의 기류도 심상치 않다고. 리암은 뭐 가서도 일만 할 거고.”
알렉산더도 알버트 주위 사람들에 대한 정보는 빠삭해진 상태였다.
정인의 차원에 가서 한국을 돌아다니며 온갖 먹방을 마친 알렉산더는 잔뜩 포동포동해진 볼살을 자랑하며 말했다.
하양이는 손가락을 슬쩍 들어 올려 알렉산더의 포동포동한 볼에 가져다 댔다.
볼 가운데를 쿡 찌른 하양이가 무심히 답했다.
“한 달 동안 양보했잖아…. 이제 나랑 좀 놀아주겠지….”
알버트가 못마땅해할 수는 있지만 정인은 언제나 자신과 한 약속을 잘 지켜줬으니까. 이번에도 그럴 걸 알았다.
“뭐, 그게 틀린 건 아니지만.”
알렉산더는 정인의 모습을 떠올리다 마지못해 답했다. 하지만 하양이가 여전히 눈에 밟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 화이트 드래곤은, 유난히 정인이라는 여자에게 맹목적이었으니까.
그녀의 곁을 지키고, 그녀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삶의 유일한 목적인 것처럼 행동했으니까.
물론 알버트처럼 이성으로서 사랑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알버트와 정인이 함께 있을 때에도 질투 한번 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하양이가 삶에 정말 온전히 들여놓은 사람은 정인이나 알버트, 그리고 자신밖에 없었다.
그들의 곁에서 항상 이렇게 기다리면서 상처받지는 않을는지. 500년 넘게 살아도 맹한 저놈을 보면 걱정이 태산이었다.
처음 봤을 때는 그냥 덜떨어진 드래곤일 뿐이었는데 어쩌다 부모의 심정으로 바라보게 된 건지 모르겠다.
하다못해 곁에 누구라도 있으면….
“넌 반려 만나고 싶은 생각은 없냐?”
하양이가 멈칫하다 심드렁히 말했다.
“뭐 만나면 만나는 거고… 아니면 정인하고 알버트 곁에 있으면 되지….”
태평하기 그지없는 모습을 보며, 알렉산더만 머리를 쥐어뜯을 뿐이었다.
“아, 시간 됐다.”
알렉산더를 멀뚱멀뚱 보던 하양이가 후다닥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