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세상의 일에 관여하지 않을 거라는 에밋의 뜻은 여전했다.
연인의 뜻이었다는 말에 알버트는 에밋을 이해했다.
알버트는 에밋이 자신을 떠난 것도 모두 연인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예전처럼 그가 원망스럽지 않았다.
그저, 에밋도 자신과 같은 사람임을 깨닫게 된 것뿐이다. 어린 자신이 알 수 없었던 진실이 이제는 오롯하게 보였다.
블래키도 더 이상 밉지 않았다. 드래곤이라는 개체의 존재를 그저 그 자체로 받아들이게 되었으니까.
알버트는 노력해 볼 작정이었다.
리암도, 슈버트도, 심지어 메르시도 그를 모시게 된 것은 후회하지 않는다 말했다.
하지만 그들의 눈 속에는 어릴 적 그들이 굴복해야 했던 순간의 치욕과 후회가 뿌리 깊게 박혀 있었다.
그들이 후회하지 않는다 했고, 알버트는 그것이 진심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자신 때문에 고생했고 다시 제 밑에서 고생할지 모르는 이들에게 베풀 수 있는 선의는 존재했다.
‘애초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들의 모든 트라우마가 섞여 있는 예프넨 후작의 연회.
그날의 끔찍한 사건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날 일이 있지 않고서도 그들이 자신의 곁에 남게 될지는 정확하지 않았지만, 이는 그가 주군으로서 베풀 수 있는 마지막 배려였다.
알버트는 어릴 적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마법을 쓰고 마력을 고갈시키며 총 마력량을 키우는 일을 반복했다.
예전에는 학대에 불과했던 행동이, 이제는 그리 괴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제 모든 행동은 정인을 다시 만나기 위한 걸음에 불과했으니까. 목표가 있는 삶이란, 꽤 살 만한 것이었다.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 있다는 건 부럽네요.”
알버트의 이야기를 들은 에밋은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도울 수 있는 부분은 돕기로 한 상태였다.
알버트가 말한 과거 자신의 행적은 그가 생각했던 것과 똑같았으니까.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 알버트와 서로 이렇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 정도일까.
“스승님께 부럽다는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는데요.”
자리를 털고 일어난 알버트가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에밋과 이야기를 나누는 건 생각보다 훨씬 쉬웠다.
예전의 자신이 에밋을 얼마나 어려워했는지 생각하면 더.
불행한 삶에 무엇이 바뀌든 그리 달라질 것은 없다 생각했는데, 정인의 생각이 맞았던 것 같다. 그는 속으로 인정했다.
‘애초에 그녀의 생각이 틀린 적이 있던가.’
더 이상 가족에게 상처받지 않고, 자신을 위해주던 이들을 위하고 있으니 같은 삶이라도 다르게 느껴졌다.
정인이 말한 두 번째 기회가 이런 것인가 싶었다.
자신의 삶을 다시 살면서 새롭게 개척해 나가는 건 생각보다 묘하고, 가슴 떨리는 일이었다.
***
그레텐은 해고했다. 그를 알아본 안목은 꽤 쓸 만했지만, 그녀는 허영심과 욕심이 너무 많았다.
나중에 정인을 방에서 쫓아낸 적도 있지 않던가.
처음 자신을 챙겨줬던 인물이라는 이유로 곁에 둔 것은 안일한 선택이었다.
폭언은 계속되었지만 알버트는 호수에 몸을 던지지 않았다.
이제 뮤트(mute) 마법을 이용해 잔소리 시간은 명상으로 넘겼다.
알버트의 마력은 시간이 갈수록 더 강해졌다.
다시 눈꽃 축제 때가 다가왔을 때, 알버트는 드디어 처음 탑에 들어갔을 때와 비슷한 급의 마법사로 성장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엄청난 마법 실력과 별개로 그의 평판은 땅에 떨어졌다.
왕자로 책봉되기 전까지, 물밑 작업만 해놓은 탓도 있었지만, 마력을 키우는 데 정신없어 로스투라투나 가족들을 거의 신경 쓰지 못한 이유가 컸다.
이 물밑 작업이란, 벨페트의 인신매매를 밝혀내고 그를 자리에서 내려오게 만드는 일이었다.
에밋에게서 얻어낸 정보로 자금을 마련하는 데 성공한 알버트는 현 마탑주의 자리에 어린 메르시를 앉혔다.
마력으로 모든 마법사를 협박해 이뤄낸 일이었다. 물론 메르시의 실력이 어릴 때부터 대단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벨페트를 죽이지는 않았다. 이번에도 그의 마지막은 메르시에게 맡기는 것이 마땅했으니까.
마탑주가 바뀌어도 나라는 여전히 썩어빠져 있었다.
이제 슬슬 왕이 될 때가 되었다.
초월자가 되기 위한 마력 수련을 잠시 뒤로한 알버트는 한자리에 모이는 예프넨 후작과 로스투라투를 동시에 쓸어버리기로 했다.
정인이 돌아왔을 때, 그는 똑같이 황제의 자리에서 기다릴 것이었으니까.
리암은 여전히 그를 찾아왔다. 메이슨 공작과 함께.
“오, 오랜만에 뵙습니다. 소백작님!”
상기된 얼굴의 리암을 바라보던 알버트는 먼저 손을 내밀었다.
“저도 오랜만입니다. 소공작님.”
알버트의 인사를 받은 리암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는 알버트의 손을 잡고 열심히 흔들었다.
“대련을 하고 싶어서 왔는데….”
“당연하지요.”
알버트는 흔쾌히 답하고서 진검을 들었다. 예전과 다른 선택이었다.
메이슨 공작은 참관을 하겠다 나섰고, 알버트는 승낙했다.
리암의 검과 알버트의 검이 맞닿았다.
한 합도 맞추지 못한 채, 리암의 검은 허공으로 날아갔다. 알버트가 진심을 다했기 때문에.
“…이게 대체.”
리암은 망연자실한 얼굴을 하고서 중얼거렸다.
알버트는 멍하니 있는 리암을 위해 손수 그의 진검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소공작님.”
“…예.”
“저와 함께하고 싶으십니까.”
알버트는 곧바로 물었다. 원래 이때 알버트는, 리암에게 의심을 품고 있었다.
정인을 제외한 누군가를 믿기에 그의 삶이 너무 황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경우가 달랐다.
그는 리암이 자신의 곁을 지키며 나아가는 모습을 몇 번이고 보았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았다.
메이슨 공작의 눈은 마법으로 가린 상태였기 때문에 두 사람의 대화를 방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무슨 뜻으로 말씀하시는 건가요?”
초롱초롱한 눈동자에 떨리는 목소리로, 리암이 되물었다. 진의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알버트는 그를 마주했다.
“저는 왕이 될 것입니다.”
리암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하지만 그는 알버트의 선언이 터무니없다는 말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리암의 본능은 언제나, 눈앞의 이 사람이 군주가 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은 그런 그를 동경하고, 옆에서 돕고 싶었기에.
하지만 방금 대련을 떠올린 리암은 순식간에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예.”
알버트는 단숨에 답했다.
“나중에는 저를 뛰어넘는 검사가 되실 테니까요.”
리암은 언제나 검을 사랑했다.
하지만 메이슨 공작은 리암이 검으로 유명세를 얻는 것을 원치 않았고, 그 때문에 리암은 독학으로 검을 배울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알버트와 합을 맞췄다.
어릴 적부터 제대로 배운다면, 알버트 자신을 뛰어넘을 가능성이 있다는 건 그 자신이 제일 잘 알았다.
리암이 입을 뻐끔거렸다. 너무 강요했나. 알버트는 인자한 미소로 입을 열었다.
“싫으시다면 거절하셔도 괜-”
“아니요! 소백작님과 꼭 함께하고 싶습니다.”
리암이 웃었다. 썩 괜찮은 만남은 알버트의 마음에도 들었다.
“소백작님, 따로 말씀을 나누어도 될는지요.”
물론 기분 좋은 일과 별개로 메이슨 공작은 그를 협박하려 들었다.
“아니요.”
물론 이번에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오늘 드린 선물은 확인해 보셨습니까?”
“아직 못 봤습니다. 그대로 가져가셔도 됩니다.”
“…….”
알버트는 메이슨 공작의 헛소리가 시작되기도 전에 차단했다. 그레텐도 없으니, 그의 행동을 비난할 사람은 없었다.
***
알버트는 그날 슈버트가 자리에 나타난 게 결코 우연이 아님을 알았다.
그날 예프넨 후작이 유독 커튼 뒤를 주시하던 것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곳에 로스투라투가 있었겠지.
오늘은 드디어 로스투라투와 예프넨 후작을 모두 쓸어버리는 날이었다.
혼자서.
알버트는 예프넨 후작의 저택에 먼저 숨어들었다.
감옥에 갇혀 고문당하기 직전인 슈버트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저택의 경비는 그에게 허술하기 그지없었으므로.
“누, 누구세요!”
슈버트가 알버트를 보고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자신만 보면 개처럼 꼬리 흔들기 바빠서 몰랐는데 생각보다 목청이 좋았다.
알버트는 그의 주위 사람들을 모두 잠들게 만드는 슬립 마법을 쓴 후 대꾸했다.
“알버트 그레이.”
“와아….”
슈버트는 알버트가 마법을 쓰는 모습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군.’
알버트는 리암을 떠올리게 하는 해맑은 얼굴을 보며 웃었다.
지금 그도 그저 아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잊은 지 오래였다.
“이 저택은 오늘 처참히 무너질 예정이다. 먼저 빠져나가거라.”
알버트의 경고에도 슈버트는 여전히 눈을 초롱초롱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하지만 절 구해주셨는데….”
“그저 네가 이 자리에 있었을 뿐이지.”
“옆에서 섬기게 해주시면 안 돼요? 어차피 갈 곳도 없는데.”
슈버트는 뿌리가 없었다. 그의 삶에 그를 위해준 사람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알버트 그레이가 그의 삶에 그토록 큰 존재가 된 것이다.
과거의 여러 부분을 바꿨지만 리암의 존재가 그러했듯, 바뀌지 않는 부분은 언제나 존재했다.
슈버트와의 만남도 똑같았다.
“…그래.”
“와아!”
슈버트는 뛸 듯이 기뻐했다. 방금 전까지 고문당할 위험에 있었다는 것은 까맣게 잊어버린 것처럼.
“앞으로 온 힘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방방 뛰던 슈버트는 돌연 진지하게 말했다. 그는 고개를 깊숙이 숙여 알버트에게 경의를 표했다.
잠시 후 고개를 올린 슈버트가 심각한 얼굴을 하다 물었다.
“알버트 그레이 님. 한 가지만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래.”
알버트의 선선한 답에 슈버트는 결연한 얼굴로 물었다.
“제가 이름이 없어서… 이름을 지어주시면 평생 간직하겠습니다.”
이름이 없었다고. 알버트는 처음 듣는 사실이었다. 리암이 이름을 지어줄 사람은 아니고….
‘자신이 직접 지은 이름이었단 말인가, 그러면.’
그와 너무 비슷한 이름이라 꽤 기억에 남았었는데, 이런 뒷이야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픽 웃은 알버트는 슈버트에게 손수건을 내밀며 말했다.
“슈버트.”
“…….”
“그것으로 하자꾸나.”
그렇게 알버트는 리암, 메르시, 그리고 슈버트 세 명 모두를 만났고, 그들을 신하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로스투라투와 예프넨 후작은 저택이 내려앉는 불의의 사고로 불운한 죽음을 맞이했다.
알버트 그레이를 후계자로 낙점한다는 말과 함께.
이를 수상히 여긴 귀족들 모두가 알버트 주변을 샅샅이 뒤졌지만 증거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알버트 그레이는 왕이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알버트 그레이의 스승이었던 에밋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알버트는 스승의 마지막 앞에서, 울지 않았다.
이번에는 에밋을 웃으며 보내줄 수 있었기 때문에.
***
알버트는 주위 나라를 차례차례 통일해 갔다.
예전처럼 빠르기만 한 통일은 아니었다. 각 나라의 시민들을 살피고 협상할 수 있는 부분은 해냈다.
그리하여 통일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완벽주의자적인 성격은 여전히 발휘되었다.
알버트는 같은 위치에 탑을 세웠다. 정인에게 말했던 대로였다.
탑의 문은 열려 있었다. 이곳에서 하양이와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했으므로.
그리고 하양이는 약속에 맞춰 그를 찾아왔다.
“알버트으으….”
똑같은 말투와 똑같은 모습. 그러나 모든 기억을 가진 채-
“나도 왔다, 왕!”
알렉산더와 함께.
서로를 기억했기 때문에, 알렉산더는 하양이를 찾아왔다.
하양이와 알버트는 계약을 했고, 알렉산더와 하양이는 안전히 500살의 생일을 맞이했다.
하양이를 다시 만나기까지 통일과 함께 수련을 거듭했던 알버트는 에밋과 견줄 만한 초월자가 되어 있었기에, 시련은 어렵지 않았다.
정신적인 시련이든, 육체적인 시련이든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알버트는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차원으로 날아갔다. 자신의 정인이 존재하는 세계에.
사고가 일어나기 전, 그는 정인을 치려는 버스를 멈추고 그녀를 마주 보았다.
***
내게는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었지만, 알버트에게는 긴 삶이었다는 것을 안다.
다시 마주한 그의 미모는 여전했지만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었다.
예전보다 그늘이 덜하고, 편안해 보였다. 그의 등 뒤에서 하양이와 알렉산더가 손을 흔들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
나는 알버트의 품에 꼭 안겼다. 그의 냄새가 코끝을 맴돌았다. 마음이 벅차올랐다.
“행복해지고 왔어요?”
알버트가 나지막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너를 위해 최선을 다했단다.”
이윽고 그가 내 양쪽 뺨을 잡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그 어떤 순간도, 지금에 비할 바는 못 되는구나.”
말을 마친 알버트가 입을 맞추었다. 몇 번이고 가볍게 내려앉는 입맞춤과 함께, 그가 내게 속삭였다.
항상 행복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란다. 네가 없어서 나는 슬펐단다. 절망했고, 우울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시간을 이겨낼 수 있었던 이유는, 이렇게 너를 다시 만나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어.
그리고 내 믿음은 현실이 되었구나.
네가 내 앞에 있으니.
그리고 우리는 계속 행복할 테니.
***
더 이상 고난도, 역경도 없었다.
처음 알버트에게 존재했던 굴곡은 평야가 되었다.
희로애락이 존재하던 삶은, 뭔가 일어났다 말하기도 뭐한 평범한 이야기가 되었다.
하지만 그게 우리의 해피엔딩이었다.
< 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 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