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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146화 (146/156)

146화.

3일의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우리는 내가 빙의하기 바로 전, 버스를 타는 모습까지 본 후 동굴로 돌아왔다.

마지막 순간을 굳이 본 이유는 알버트가 딱 그때 나를 만나러 와야 하기 때문이었다.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간다면 나는 죽기 바로 직전으로 돌아갈 테니까.

나는 알버트와 경우가 다르다. 내 시간은 로제 아티어스의 존재가 완전히 소멸된다고 크게 뒤틀리지 않는다.

그저 내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서 빙의하지 못하게 될 뿐이다.

다른 차원에서, 내가 죽기 바로 직전의 시간으로 찾아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 안다.

내게는 찰나지만, 목숨을 건 시간.

오로지 하양이와 알버트를 믿기 때문에 가능한 도박이었다.

나는 알버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회색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붉은 눈동자가 저녁이 찾아오기 전 타오르는 노을처럼 예뻤다.

그를 향해 뛰는 내 마음의 색처럼 아름다웠다.

나는 그의 품에 꼭 안겼다. 이제는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하게 느껴지는 온기였다.

포근한 품과 떨어져야 한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견딜 수 있었다.

그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나는 그의 품 안에서 고개를 올려보았다.

“바꿀 수 있는 미래라면, 제일 행복해지고 오는 거예요.”

“…….”

“나는 당신의 삶이 언제나 행복하기를 바라니까.”

이제 불행한 순간은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니까.

나는 그에게 속삭였다.

“내가 당신을 만나러 갔으니, 이번에는 당신이 나를 찾으러 와요.”

내 말에 알버트는 피식 웃었다.

“바로 찾으러 가마.”

짤막하게 내뱉은 그는 내게 입을 맞추었다.

하양이와 알렉산더를 의식한 듯, 길지 않은 입맞춤이었지만 내 모든 것을 앗아가기엔 충분했다.

아니, 이는 틀린 말일지도 모른다. 그는 이미 내 모든 것을 가졌으니까.

생각지 않았던 입맞춤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와 함께했던 무수한 시간이 생각나며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손끝이 저절로 오므라들었다.

알버트가 나를 물끄러미 보다 귓가에 속삭였다.

“다시 만나면 적어도 한 달 정도는 탑에 머물러야 할 거야.”

…탑에 머무르는 것이 그저 함께 생활하는 것이 아님은 내가 제일 잘 알았다.

때에 맞지 않게 등에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나는 그의 어깨를 툭 밀었다.

“진짜….”

다들 보고 있잖아!

알렉산더의 따가운 눈총에도 그는 전혀 개의치 않은 얼굴이었다.

오히려 하양이와 알렉산더를 향해 고개를 돌려 말했다.

“부러운 모양이구나.”

딱 말투가 너희들 부러우면 똑같이 해, 같았다. 속뜻을 알아차린 알렉산더가 길길이 날뛰었다.

“저, 저 은혜도 모르는 황제…!”

“이제 나는 놀랍지 않아….”

그리고 옆에 현자가 된 듯한 얼굴의 하양이가 차분히 중얼거렸다.

나는 목덜미를 잡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이들의 말싸움은 치열하구나. 긴장감이 없어 오히려 좋은 걸지도.

알렉산더와 하양이도 내 과거에서 다른 차원을 겪고 경험했다.

알렉산더는 인터넷을 써보거나 핸드폰을 보며 다른 차원에 와보길 잘했다 말했다.

그의 결정에 후회는 없을 것이라고. 처음부터 여행을 하고 싶어 했던 알렉산더다운 말이었다.

하양이는 알버트와 비슷한 입장이었다.

어린 나를 보며 즐거워하고, 때때로 귀엽다는 말을 덧붙이다 입을 다물며 시무룩해지곤 했다.

하지만 이 시간이 진심으로 소중하다고 말해줬다.

우리는 서로에게 마법을 걸었다. 서로를 계속해서 기억하게 만들어줄 기억의 마법을.

“리멤버(Remember).”

서로의 존재가 뇌리에 선명히 박혀 들기 시작했다. 사실 그리 다른 것을 느끼지는 못했다.

우리에게 서로의 존재는 처음부터 계속 선명했으므로.

째깍. 머릿속의 시계가 울렸다.

내가 멈춰두었던 시간이 다시 흘러가기 시작했다.

내 몸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 차원에서 내 존재가 지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만나는 것으로 하자.”

알렉산더가 제일 먼저 손을 흔들었다.

그가 지금 한 결정을 후회한다 해도 할 말이 없었을 터인데, 알렉산더의 힘찬 기운은 여전했다. 그의 눈에 후회는 비치지 않았다.

“솔직히 좀 고통스럽기는 하겠지만….”

손을 내린 알렉산더가 씨익 웃었다.

“너희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괜찮으니까.”

언제나 사람을 의심하며 조심스레 살아야 했을 그에게 우리는 처음으로 이어진 인연이었는지도 모른다.

“정인아아….”

내 가까이 다가온 하양이는 알버트의 눈치를 살짝 보다 나를 꼭 안았다.

나와 마주하고 있던 알버트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지만 우리를 떼어놓지는 않았다.

나를 안은 하양이의 품에서는 좋은 향기가 났다. 청초한 하양이를 닮은 꽃 냄새가.

“우리 다시 만나면, 그때는 진짜 바다 가는 거야.”

이윽고 나를 품에서 놓아준 하양이가 다짐하듯 말했다.

평소의 나른한 말투가 아니라 확고한 의지가 담긴 어조였다. 나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은 지켜야지.”

“당연하지.”

하양이가 해맑게 웃었다.

마지막으로 알버트가 내게 다가왔을 때 내 몸은 절반 정도 사라져 있었다.

마음의 준비는 끝났지만, 실시간으로 사라지는 몸을 보면서 두려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눈치 빠른 내 왕자님은 이를 알아차리고 내 볼을 쓰다듬었다.

유리 세공품을 만지는 것처럼 섬세한 손길로 나와 그가 아직 이 자리에 있고, 그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려주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떼었다.

“같은 시간에 존재하지 않는 게 무슨 상관일까.”

그의 음성은 마치 겨울의 마지막을 알리는 새싹처럼 아름다웠다.

“나는 다시 널 기억하고 사랑할 텐데.”

그 목소리는 내 모든 불안을 깨끗이 씻어내렸다.

봄비처럼.

나는 그것이면 충분했다.

***

알버트 그레이는 과거로 회귀했다. 기억의 마법은 온전한 효력을 갖추었다.

로제 아티어스의 존재로 달라진 삶의 수레바퀴가 새롭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달라진 시간 속에서 과거로 돌아간 그는 정인과 함께한 삶, 그녀의 과거를 보았던 모든 순간을 기억했다.

이는 즉, 그가 초월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드래곤의 계약을 무사히 마쳐야 했고, 다시 드래곤의 계약자가 되어 자신의 옆에 설 정인에게 걸맞은 힘을 지녀야 했으니까.

하양이의 삶은 최대한 똑같이 흘러가야 했다.

밖에 나와서 행동하기엔 도사린 위협이 너무 많았다.

그리하여 하양이는 탑 앞에서 알버트를 만나기 전까지 제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똑같이 반복하기로 계획했다.

이는즉슨, 계속 잠을 자는 것을 의미했다.

알버트는 태어나 몸을 움직일 수 있던 순간부터 은밀히 마법을 쓰기 시작했다.

정인의 과거에서 보았던 화목한 가족과 다르게 자신의 가족은 여전히 쓰레기였고 자신의 삶을 시궁창에 박아두려 들었지만, 알버트에게 그리 큰 타격은 없었다.

복수 같은 건 생각지도 않았다.

애초에 자신에게 무의미한 인간들이었으므로 그들에게 쏟는 시간이 아까웠다.

하지만 정인은 그가 행복한 순간이 더 많아지길 바랐다.

그렇기에 알버트는 제게 가족은 아니더라도, 가족과 비슷한 역할을 해준 이들과의 만남을 앞당기고, 로스투라투를 이전보다 더 빨리 끌어내리기로 했다.

알버트는 일의 완벽성을 추구했다. 마법을 혼자 연마하는 데는 무리가 있었고, 세력을 키우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해서 그는 이 일을 함께 도모하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을 만나기를 기다렸다.

바로 자신의 스승 에밋을.

***

에밋을 만났던 날은 어머니의 폭언을 견디다 못해 저택에서 뛰쳐나와 골목길에서 주저앉았던 날이었다.

이번에도 어머니의 폭언은 똑같았지만 알버트는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았다.

저렇게밖에 할 수 없는 이들이 애잔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는 골목길에 들어서서 바닥에 앉았다. 그리고 자신의 스승이 오길 기다렸다.

어릴 적 전대 마탑주에게서 돈을 얻어냈던 건, 에밋이 힘을 썼다는 것이다.

에밋은 현자로서 모든 것을 뒤집어엎을 만한 정보와 힘이 있었다. 더 이상 세상의 일에 관여하지 않으려 애썼을 뿐.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잠시 후 그에게 다가온 에밋이 물었다.

알버트는 오래전 제 기억 속에서 희미해졌던 스승의 얼굴을 관찰했다.

눈빛은 생각보다 어두웠고, 얼굴은 생각보다 젊었다.

오랜 시간을 살아도 언제나 소년 같았던 남자. 그가 평생 이해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남자.

이번에는 당신과 좀 더 후회 없는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알버트는 빙그레 웃었다.

“잘 오셨습니다.”

알버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에밋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제 스승이 되어주십시오.”

“…예?”

자신이 하려던 제안을 알버트가 먼저 말하자, 에밋은 당황했다.

자신이 누군지 알고? 어리벙벙한 에밋을 똑바로 마주한 알버트는 단호히 말했다.

“그리고 저를 도와주십시오.”

붉은 눈동자는 불꽃처럼 활활 타오른다.

그는 전의 삶처럼 길을 잃은 채 방황하던 어린 소년이 아니었다. 삶의 의미를 아는 온전한 인격체였다.

에밋은 알버트 앞에 쭈그려 앉으며 물었다.

“왜 제가 스승이 되길 바랍니까.”

“저는 스승님처럼 초월자가 되어야 하거든요.”

“그게 무슨….”

에밋은 알버트가 넘겨짚은 것이라 여기며 화제를 슬쩍 돌리려 했다.

하지만 알버트가 말을 잇는 속도가 더 빨랐다.

“마지막 가시는 길에 이번에도 울지 않을 겁니다. 대신 이제 숨기지 마시고, 왜 그렇게 가셔야 했는지 제대로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에밋은 금세 상황을 읽었다.

“…내가 아는 소백작님이 아니군요.”

에밋이 그렇게 확신한 것은 미래를 보고 온 것처럼 당당하게 확언하는 알버트의 기세 덕분이었다.

…그의 연인도 곧잘 저렇게 말하곤 했으니까.

“어째서 초월자가 되어야 하는 겁니까?”

메리를 떠올린 에밋은 알버트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초월자가 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지금 알버트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선택을 내렸는지는 몰라도, 그가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나오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었다.

“제 삶의 구원자를 만나러 가야 하니까요.”

“구원자?”

“정인 말입니다.”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는 순간, 알버트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알버트는 웃음기 남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겸사겸사 제 과거도 바꿔볼 예정이고요.”

후회 따위는 존재하지 않도록.

작게 덧붙인 말은 오롯한 진심이었다.

모두 한 사람으로 인해 일어난 변화.

그리하여 알버트의 삶은 예전과 전혀 다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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