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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145화 (145/156)

145화.

차원을 뛰어넘으면서 가지고 올 수 있는 건 없었기에 우리는 모두 빈털터리였다.

하지만 우리에게 뭐가 있는가. 바로 마법이 있다!

우리는 마법을 이용해 지하철 개찰구를 넘어 스리슬쩍 사람들 사이에 끼는 데 성공했다.

“코스프렌가 봐….”

“젊은 사람들이 벌써부터….”

“배우 얼굴인데….”

알버트가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옷으로 입고 오긴 했지만, 그의 외모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알버트뿐만이 아니었다. 긴 은발을 늘어뜨린 하양이와 파란 머리를 가진 알렉산더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보니 정말 아이돌 그룹 같기도 하고.

지하철에서 내린 우리는 스리슬쩍 버스를 타 내가 살던 아파트 앞에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곳을 보는 건 생각보다 더 기묘한 일이었다.

현재 재개발에 들어가 존재하지 않는 아파트라 더 그랬다.

“…이 차원 사람들은 되게 좁은 곳에 사네.”

문명의 이기에 신기해하던 알렉산더가 아파트를 보고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그의 눈에는 그래 보일 법도 했다.

“그래도 재미는 있어! 신기하고!”

내 아련한 얼굴을 본 알렉산더가 뒤늦게 제 말을 수습하려 애썼다.

“탑 같다아….”

하양이는 우리 집을 갇혀 있던 탑 같다고 평했다. 아파트 현관에 들어서던 나는 멈칫했다.

이렇게 엄마 아빠를 보게 될 줄은 몰랐어서 더 망설여졌다.

꿈에서 가끔이나마 모습을 드러내셨던 분들이다.

내가 잘 살고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것처럼 웃어주시던 모습이 생생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살았던 걸지도.

시간이 갈수록 추억으로만 남게 되는 기억이 안개처럼 뿌예져서, 점차 내가 이때 얼마나 행복했는지 까먹게 될 때가 있었다.

한때는 그리도 소중했던 기억이 마모되는 과정은 너무 평범했다.

그것이 못내 슬플 때가 있었다.

과거로 와서 그런가, 어쩐지 감정이 센치해지는 걸. 나는 눈을 꾹 감았다 뜨며 감정을 갈무리했다.

3층이었지. 호수를 확인하던 나는 302호의 창문이 열려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우리는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우리는 창문을 통해 스리슬쩍 방으로 들어갔다. 마법으로 몸을 작아지게 해 가능한 일이었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작아진 우리는 정말 요정 같았다.

방에 들어오고 나서야,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이렇게 몸을 작게 만들어 다닐 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럼 사람들하고 부딪히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 일 같은 건 안 해도 되었을 텐데.

“처음부터 이렇게 다닐 걸 그랬나….”

“하지만 난 그 네모난 박스 안에 타보고 싶었는걸.”

쓸 수 있는 마법이 너무 방대한 나머지, 정작 어떤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적절한 마법이 바로 생각나질 않았다.

내 말에 하양이가 옆에서 나를 변호했다.

알버트는 어색하게 웃는 날 보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얼 그리 걱정하느냐. 네가 무엇을 하든 이곳에 불평할 사람은 없는데.”

“감사합니다. 모두 저희 가족 집에 오신 것을 환….”

방을 소개하려던 나는 이곳이 내 방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초등학생용의 아기자기한 책상과 곳곳에 널브러져 있는 가방, 교과서 등이 어지러웠다.

앗, 이런 모습을 보여주려던 건 아니었는데. 나는 머쓱한 얼굴을 했다.

“네 방이구나.”

내 얼굴을 본 알버트는 이곳이 어떤 공간인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그리고 방을 열심히 구경하기 시작했다.

한쪽 벽을 채운 책장에는 책과 함께 가족사진이 액자에 담겨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여러 물품이 그에게 이질적이게 느껴질 텐데도 불구하고, 알버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나와 부모님이 함께 찍은 사진을 보는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거실 쪽에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나를 필두로 방을 나섰다.

방을 벗어나자마자 거실이 시야에 들어왔다. 속에서 뜨거운 감정이 울렁거렸다.

엄마 아빠의 얼굴은 내 기억을 가져다 놓은 것처럼 선명했다. 마치 그 시절로 되돌아간 것처럼.

“…….”

우리 가족은 티비를 보며 과일을 깎아 먹고 있었다.

티비에서는 이 당시 유행하던 예능 프로그램을 보여주고 있었고 아빠와 나는 그걸 보며 웃기 바빴다.

“하하!”

“아빠, 저거 너무 웃겨!”

“웃을 때 웃음소리 좀 어떻게 해봐요, 진짜. 정인아. 사과 먹어.”

엄마는 아빠를 타박하다 내 손에 사과를 찍은 포크를 쥐여주었다.

나는 아삭한 사과를 먹으며 해맑게 웃었다. 평범하지만 그리웠던 일상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엄마 아빠를 그렇게 보내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그 시간을 이겨내고 나서도, 가끔씩 떠올릴 정도로.

왜 나를 혼자 두고 가야 했냐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과거를 바꿀 수 없다는 것 안다.

엄마 아빠를 살리는 것이 이곳의 시간을 완전히 달라지게 만들고 내가 지금 만난 사람들 모두와 영영 못 만나게 될 거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시간을 바꾸는 데는 그만큼의 페널티가 따르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렇게 가족을 다시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게 얼마나 다행인가. 나는 눈에 엄마 아빠를 계속해서 담았다.

기억에서 마모될 수 없도록. 지금 이 순간 웃는 엄마 아빠의 얼굴을 평생 기억할 수 있도록.

내 옆에 선 알버트에게서는 말이 없었다. 나는 눈가에 고인 눈물을 슬쩍 닦아낸 후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의 시선은 가족과 행복하게 웃고 있는 내 모습에 꽂혀 있었다.

내가 엄마 아빠를 기억하기 위해 보았던 것처럼, 그는 지금 이 순간의 나를 계속해서 응시했다.

“가족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아.”

그에게 가족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알기에, 나는 쉽사리 입을 뗄 수 없었다. 그저, 그가 말하기를 기다릴 뿐.

이윽고 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맺혔다. 과거의 나를 보는 표정은 햇살처럼 따사롭고 온화했다.

“너는 행복했구나.”

고개를 돌린 그가 나를 보았다.

“이렇게 자라서, 내게 그런 사랑을 줄 수 있던 거겠지.”

말이 끝난 후 픽 웃은 알버트의 얼굴은 한결 차분해져 있었다.

“이렇게 자라 내게 와서 행복이란 걸 가르쳐 줄 수 있었던 거겠지.”

그가 나에 대해 알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묘했다.

언젠가 그와 결혼해서 함께 살면 그가 나라는 사람에 대해 더 이해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겪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게 더 좋은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장면의 모든 것을 그는 예민하게 읽어내니까.

“정인이 귀엽다아….”

옆에서 나를 뚫어져라 보던 하양이가 소곤거렸다.

알버트가 하양이를 보며 눈을 흘겼다. 하양이가 입을 흡 다물었다.

“알겠어, 그런 말은 안 하면 되잖아….”

“눈치가 점점 빨라져서 좋구나.”

하양이가 항의하자 알버트가 태연히 대꾸했다.

“이건 바보들의 싸움이야.”

뒤에서 알렉산더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나는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셋의 모습을 보다 웃음을 터트렸다.

엄마 아빠에게 내 웃음 소리가 조금은 들리길 바랐다.

딸이 이렇게 행복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러니 혼자 두고 가는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

정인 일행은 이후로 3일 동안, 과거의 정인을 찾아다녔다

알버트는 누구보다 의욕적으로 앞장섰다.

매 순간이 알버트에게는 소중했다. 1분 1초도 낭비할 수 없었다.

눈을 감았다 뜨는 순간까지 아쉬웠다. 그녀의 모든 것을 보고 싶다는 마음은 언제나 진심이었기 때문에.

알버트는 정인이 초등학교를 졸업하며 펑펑 우는 모습도 보았고, 친구들과 떡볶이를 먹으면서 마구 떠드는 모습도 보았다.

어릴 적 정인은 지금과 똑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저와 전혀 다른 유년 시절에 끌렸다.

그리고 다행이라 생각했다. 정인이 자신만큼 힘들지 않았어서.

물론 좋은 시간만 본 것은 아니었다. 알버트는 정인이 부모님을 잃고 방 안에 처박혀 시간을 보내는 것도 보았다.

정인은 이때 모습을 보이는 것을 껄끄러워했지만, 알버트는 양보할 수 없었다.

정인의 이런 모습까지 모두 보고 이해하고 사랑하고 싶었기 때문에.

정인은 그의 과거에 가서 그가 목숨을 끊으려 하던 순간도 보았고, 사람들의 발에 입을 맞추며 비굴하게 사는 모습까지도 모두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그런 그녀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싶은 건 당연한 마음이지 않은가.

그게 사랑인 것을.

방 안에 처박힌 정인의 모습은 딱 옛날의 그를 떠올리게 했다.

너에게도 이런 순간이 있었구나.

알버트는 항상 밝게만 보인다 해서 그늘이 없는 게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리고 정인이 대단하다 생각했다.

이렇게 힘든 시간을 넘어 똑같이 웃고, 사람을 사랑하며 자신을 감쌀 줄 아는 인격체로 성장했다는 사실에 더 깊이 사랑에 빠졌다.

과거에 손대고 싶은 순간을 그는 매번 참았다.

지금 정인을 위해서, 아무것도 손댈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충동은 매번 일었다.

드래곤의 계약자로서 이 상황을 바꿀 만한 힘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더 잘 알았기에.

‘나는 이토록 이기적인 인간이라서.’

속으로 자조했다.

그녀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 과거를 돌아보고 있는 것인데 과거를 보기만 할 뿐 손을 댈 수는 없었으니까.

정인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물어보기가 두려웠다.

그런 그를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정인은 먼저 다가와 등을 두드려 주었다.

“난 괜찮아요, 알버트. 저런 시간도 있었기에 지금 내가 된 거니까.”

비 온 뒤 땅이 굳는다는 말이 있는데 알아요? 정인은 그의 죄책감을 덜어주려는 것처럼 더 크게 물었다.

하양이와 알렉산더가 그게 무슨 엉뚱한 소리냐 물었다. 무거웠던 흐름이 순식간에 가벼워졌다. 그저 정인의 존재만으로.

힘들었던 시간이 지나가고 정인은 다시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리고 그들은 정인의 대학교 시절을 거쳐 첫 직장에 합격한 순간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주어진 시간이 한정적이었던 만큼, 정인의 과거를 볼 수 있는 건 조각조각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어떤 순간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항상 그 자리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으니까.

모든 과거를 보고 난 후, 알버트는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너를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닐까.’

아니, 그는 확신했다.

정인을 만나기 위해서.

그는 그러기 위해서 태어난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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