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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144화 (144/156)

144화.

인터넷, 핸드폰과 같은 문명의 이기에 의존하던 시간이 이제 낯설기만 했다.

“정인.”

“네.”

문득 알버트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미간을 좁힌 그가 보였다.

“내가 네 약속을 지키는 이상, 너도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것 잊지 말거라.”

머리카락을 한차례 쓸어 넘기며 내게 언질하는 모습도 영화의 스틸 컷 같은 모습이어서 눈을 쉽사리 뗄 수 없었다.

그의 속눈썹이 나비처럼 팔랑였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는 언제나 아름다웠다.

…이 타이밍에 약속을 지켜야 한다 언질 주다니.

아무래도 내가 그에게 모든 과거를 보여주는 것이 부끄럽다 말한 게 마음에 걸린 모양이다.

“알버트야말로, 가만히 보기만 해야 해요.”

이곳 시간에도 손을 대면 모든 게 너무 골치 아파지니까. 내 말에 알버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정신을 집중하며 눈을 감았다.

***

빛나는 마법진 안으로 빨려 들어간 우리는 순식간에 차원을 통과해 내 세계에 도착했다.

처음 시간을 뛰어넘었을 때처럼, 우리는 이동한 차원의 하늘에 있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은 파랬다.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것처럼.

하늘이라 비행기와 마주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럴 위험은 없어 보였다.

마법을 써 모습을 가리는 것으로 위험 요소를 차단한 우리는 지상으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알버트의 회색 머리카락이 흐트러지고 하양이의 은발이 허공에 흩날렸다.

알렉산더의 파란 머리카락이 하늘에 어우러졌다. 이들과 지금 이곳에 있는 게 현실감이 없었다.

“아직까지는 그리 다른 것이 없는 것 같은데.”

알버트가 중얼거리는 순간, 빌딩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온갖 소음이 내 귓가를 때렸다.

직각의 빌딩 숲 사이로 자동차가 바삐 움직였다.

기차와 전철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앞으로 나아가고, 사람들의 말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다소 무미건조하고 수수하면서, 화려하기 그지없는 도시가 시야에 가득 찼다.

입을 벌리다 만 알버트는 비행기를 처음 본 소년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양이와 알렉산더도 마찬가지였다.

“와….”

“이게 뭐야, 진짜?”

경악에 가까운 목소리에, 내가 사는 세계에 대한 뿌듯함이 퐁퐁 솟아올랐다.

그래, 중세와 근대가 적당히 섞여 있는 세계와 현대는 결부터 다른 법이다.

나는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있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해요.”

어서 와, 현대는 처음이지?

주변을 설명해 주려면 한참 걸리겠는데. 우선 같이 걷는 게 좋을까.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는데 알버트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래서 지금의 너는 어디 있느냐.”

놀란 것도 잠시일 뿐, 알버트의 얼굴은 어느새 평소의 무덤덤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하양이와 알렉산더는 아직도 정신이 없는 걸 보니. 알버트의 적응력이 비정상적으로 빠른 모양이었다.

아쉽다. 아까 같은 얼굴을 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은데. 찍어둘 걸 그랬나. 현대로 돌아와서 그런지 카메라가 그리워졌다.

“이 세계가 신기하지 않으세요?”

“신기하지 않은 것은 아니란다. 확실히 다르기도 하고. 하지만….”

가까이 다가온 알버트는 낙하하느라 아무렇게나 뻗친 내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귀 뒤로 넘겨주며 속삭였다.

“내게 너보다 중요한 것은 없어.”

설탕보다 달콤한 말이 귓가에 달라붙었다. 온몸이 흐물흐물해질 것 같은 기분 좋은 말이었다.

나는 그의 손에 슬그머니 깍지를 꼈다. 내가 먼저 손을 잡았는데 옭아매는 알버트의 손길이 더 적극적이었다.

손에 온기가 그득 느껴졌다. 알버트와 이 세계에 같이 있다는 게 그제야 좀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아직 주변을 열렬한 눈길로 살피는 알렉산더와 하양이를 힐끔 본 후 도로를 가리켰다.

“우선 도로로 갈까요.”

알렉산더에게 이 차원에서의 삶을 좀 알려줘도 괜찮겠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

지금 내가 알렉산더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모조리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무엇보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서울 한복판이다.

지금 내가 가족과 살고 있을 전셋집에 가려면 시간은 좀 걸릴 테니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도 괜찮을 터였다.

이 모든 과정이, 이 차원을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될 듯도 했고.

나는 우리가 여기 오기로 하기 전의 일을 떠올렸다.

***

로제 아티어스가 사라진 지금,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모두 함께 고민에 빠진 날.

우리는 로제 아티어스에 의해 새로 변형될 세계에 순응해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로 결정했다.

내가 새로운 관점으로 현 상황을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건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일지도 몰라요.”

로제는 그녀가 사라져서 알버트와 내가 만날 수 없게 된 것이 우리에게 선사할 수 있는 최고의 벌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알버트가 시간을 되돌아갈 수 있다는 건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진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두번째 기회.’를 듣는 순간 나는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현재 알버트가 처한 상황을 회귀물에 대입해 보았다.

불행한 삶을 살았던 주인공들이 과거로 돌아가 모든 것을 바꿔 나가는 이야기는 매번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

시련 속에서 어린 알버트에게 좋은 기억을 심어주려 애썼지만 내가 그의 모든 삶을 바꿀 수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고통받았고, 예프넨 후작의 연회에 끌려가야 했으며, 끝내 에밋과 다소 어색한 사이로 헤어져야 했다.

사람의 유년 시절은 사람의 성격이 형성되는 데 큰 영향을 준다.

나는 그의 어린 시절이, 지금 나에게 유난히 집착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라 생각했다.

그의 삶에 빛이라고는 나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 사실이 싫은 것은 아니다. 내가 누군가의 삶의 전부가 될 수 있다는 건 생각보다 놀랍고 대단한 일이니까.

하지만 나는 알버트가 매순간 불안에 빠져 지내길 원하지는 않는다.

나와 함께 있으며 그의 성정이 치료될 수도 있지만, 그건 가능성일 뿐 확실한 게 아니니까.

그가 모든 기억을 가지고 갈 수만 있다면, 알버트의 생은 아주 다르게 변화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겪게 될 과거는 알버트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회였다.

만일 나와 함께한 시간의 기억을 가지고 갈 수 있다면 그의 삶에 트라우마가 되었던 순간들을 치료하고 더 행복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었다.

에밋을 만난 후에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더 깊은 대화를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어릴 적 나와 만난 이후로 에밋과 이야기를 나누긴 했지만, 아직도 에밋과 어색한 사이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에밋의 마지막까지 보고, 그가 초월자라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을 지금에는 그와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터였다.

기억을 가진 알버트는 순식간에 자신의 능력을 개화시켜 대단한 마법사가 될 것이다.

자신을 이용하는 가족들 사이에 끼어 살며 생겼던 트라우마도 날려 버릴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예프넨 후작의 연회에서 더 이상 핍박받지 않아도 되었다.

남주인공이기 때문에 불행해야 했던, 모든 순간의 고난이 더 이상 그를 괴롭히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알버트가 모든 것을 기억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생각조차 하지 못할 일이었고.

하지만 알버트가 누구냐. 이 세계의 최강 먼치킨 남주인공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에 버금가는 마력을 지닌 드래곤의 계약자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이 바뀌기 전의 기억을 보존하는 마법을 걸 수는 있다.

우리가 완전히 떨어져 다른 차원과 시간 속에 살아가게 되더라도 서로와 함께했던 시간을 기억할 수 있는 마법.

우리의 남은 모든 힘을 끌어모아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줄 리멤버(Remember)의 마법을 쓸 수 있는 것이다.

알버트에게 그 기억은 새로운 삶을 살고 나를 찾으러 올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이고,

하양이에게는 알버트를 기다리며 500년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버팀목이 될 것이며,

알렉산더에게는 예프넨 후작의 마수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 기회를 주고,

내게 알버트를 기억하고 기다릴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다.

답은 정해졌다.

알버트는 회귀한 후 행복한 삶을 살며 하양이를 찾을 것이다.

하양이와 시련을 겪은 후-알버트는 이때 시련이 하양이에게 전혀 고통스럽지 않을 것임을 명확히 했다.

그때까지 엄청 힘을 키울 모양이었다- 성체 드래곤이 된 하양이와 알버트는 나를 만나러 올 작정이었다.

딱 버스 사고가 나기 직전으로 돌아갔을 나를.

이 계획에 알렉산더가 필요했던 이유는 알버트에게 내가 살던 차원을 기억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알렉산더와 계약하지 않는 이상, 그는 차원을 넘나들 수 없다.

그리고 드래곤의 계약자는 자신이 모르는 차원으로는 이동할 수 없으니, 알버트가 내가 있는 곳으로 오기 위해선 알렉산더와 계약해 이곳을 기억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알렉산더도 자신의 이득을 챙기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를 통해 다른 차원에 함께 가 그곳을 조금이나마 배우고, 나중에 성체 드래곤이 되면 손쉽게 드나들 수 있는 차원 하나는 기억할 수 있게 되는 거니까.

하지만 알렉산더가 우리를 위해 큰 결정을 한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알버트는 이 계획을 무척 꺼려 했다. 애초에 왜 그 모든 시간을 반복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과거의 일로 상처받았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그를 순순히 굴복시키게 만든 방법은 하나였다.

“네 어린 시절을 보고 싶단다.”

차원과 시간을 드나들 수 있는 드래곤의 계약자임을 이용해 남은 3일 동안, 알버트는 이 세계에서 내가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 알고 싶어 했다.

그저 차원을 넘어가기 전이 아니라, 가족들과 함께했던 유년 시절부터 내가 방황했던 시기까지 모두.

“너만 내 과거에 드나든 건 좀 불공평하지 않느냐.”

비록 어릴 적 나를 도와주지는 못하더라도, 내 모든 것을 알고 싶다 했다.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전부.

로제의 몸에 있었었기에 나는 내 가족이나 내 삶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생각보다 드문 편이었고, 알버트는 그게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나는 그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데, 그는 아니니까.

결국 나는 알버트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 내가 가족과 함께 살던 초등학생일 때의 시간대로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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