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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143화 (143/156)

143화.

알버트는 그 뒤에도 몇 번이나 같은 질문을 했다.

변하지 않는 대답을 들으며 혼란스러워하던 그는 나에게 진짜 심정을 물어보라며 잠시 방을 비우기도 했다.

물론 리암과 메르시, 슈버트의 답은 절대로 바뀌지 않았다.

결국, 알버트는 조금 얼떨떨해 보이는 얼굴로 방을 나섰다.

우리는 본궁을 빠져나와 원래 머무르던 탑으로 향했다.

텔레포트를 해서 갈 수도 있었지만, 이곳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만큼, 주위를 더 구경하고 싶어 마차를 택했다.

나와 알버트가 한 마차, 그리고 알렉산더와 하양이가 다른 마차에 탔다.

내 앞에 앉아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긴 알버트의 입에서 힘없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웃던 알버트가 나를 보며 후 숨을 내쉬었다.

“내가 한 일을 알고도 아무런 후회가 없다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자들이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살짝 내리깐 눈은 겨울을 이겨낼 수 있게 해주는 벽난로의 불처럼 따스했다.

“당신이 그만큼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거잖아요.”

“…….”

“그리고 당신도 안도했다는 거 알아요.”

“안도는 무슨. 그저, 조금이라도 그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다행이라 여겼을 뿐이다.”

그가 눈을 흘겼다. 그 말이 내가 한 말과 다를 바가 무언가 싶었지만… 나는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알버트의 입가에 희미하게 맺힌 미소가 모든 걸 말해줬으니까.

“마지막으로 탑을 봐야죠.”

우리는 탑 안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잘 보존되어 있는 방은 내게 이제 고향과도 같았다.

내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곳이기에.

알렉산더는 처음 보는 곳이 신기한지 부엌에 들어서서 요리조리 요리 도구를 살폈다.

“이건… 내가 잠잤던 식탁이야.”

“오, 그러냐?”

하양이는 가이드가 된 것처럼 뽐내며 부엌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곳이 하양이에게 가장 익숙한 곳이기도 해서 그런 모양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하양이와 알렉산더의 모습은 사뭇 편해 보였다.

하양이에게 좋은 친구가 생긴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나는 둘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알버트와 위로 올라갔다.

방에 다다른 알버트는 그가 몇백 번은 드나들었을 탑 안을 집요히 살폈다.

시선이 얼마나 강렬한지, 범인을 잡는 형사라도 된 듯한 모습이었다.

잠시 추억을 회상하러 왔을 뿐인데, 왜 이렇게 진지하지?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알버트의 목소리가 울렸다.

“네가 돌아올 곳에 이것과 똑같은 탑을 만들어놓을 거란다.”

자신만만한 목소리였다. 그 말조차 알버트다웠다.

“절 감금하시려고요?”

장난스레 묻자 알버트가 애석하다는 얼굴을 했다. 잠시 후 눈을 내리깐 그가 턱을 괸 채 중얼거렸다.

“이런, 들켰구나.”

이, 뻔뻔하기 그지없는 왕자, 아니 황제…! 내가 입을 뻐끔거리고 있는데 알버트가 벽을 슬슬 만지며 심각하게 말했다.

“이왕 만들 거면 이것보다 더 좁게 만들어야겠다. 네가 내 시야에서 사라지는 걸 견딜 수가 없어서 말이지.”

“…원하는 대로 하세요.”

“침대 하나만 들여놔도 좋겠어.”

나는 알버트와 하루 종일 함께했던 일주일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야. 아니라고!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과 별개로 그때는 정말 힘들었다.

탑에 가고 싶지 않다. 하지만 도망간다 하면 알버트는 화가 날 테고…. 말하지 않아도 화가 날 테니 미리 경고하는 것이 좋겠군.

나는 괴도가 된 마음으로 그에게 예고장을 날렸다.

“그럼 궁의 제 방으로 피신 갈 거예요.”

굳이 탑에만 있을 필요는 없잖아?

내 말에 알버트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나도 따라가면 되지.”

…역시나 말싸움에서 알버트를 이기는 건 쉽지 않았다.

***

탑 구경을 마치고 나온 나와 알버트, 알렉산더와 하양이는 탑 앞의 공터에 섰다.

주변이 급속도로 발전된 것과 다르게 탑 주변은 휑한 편이었다.

알버트가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그 모습을 그대로 보존했기 때문이었다.

차원과 시간을 뛰어넘을 수 있는 건 오로지 드래곤의 계약자와 드래곤 자신뿐.

알버트가 이번 생에서 알렉산더와 계약해야 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나 혼자 계약해 차원을 뛰어넘는다 한들, 알버트가 같이 오지 못하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알버트는 잠자코 나를 응시했다.

나는 이미 시련을 겪으며 시간을 이동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는 경험자인 내게 시범을 바라는 듯했다.

내가 알버트보다 경험자인 일이 나타나다니. 세상 살고 볼 일이야.

나는 다소 우쭐한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우선 드래곤의 둥지로 갈까요.”

내 말에 알버트는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언제 가나 기다리고 있었단다.”

“…….”

지루하다는 듯한 말에 내 말문이 막혔다.

…맞다. 알렉산더와 계약했으니 머릿속에 차원이나 시간을 뛰어넘을 수 있는 마법진과 방법에 대한 기억이 생기지.

알렉산더와 계약을 한 후, 그는 성체 드래곤인 알렉산더의 힘과 능력을 공유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나처럼 마법에 대한 새로운 지식이 생겼을 터였다. 크흠, 잊고 있었다.

다소 부끄러워진 나는 얼른 눈을 감았다.

우리는 정신을 집중했고, 잠시 후 세이브 포인트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드래곤의 둥지에 다다랐다.

“…여기가 드래곤의 둥지라고.”

이곳에 처음 온 알버트는 잠시 정신을 빼앗긴 채 동굴을 가득 채운 벽화를 살폈다.

모든 벽화는 나름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글을 읽는 것처럼 가만히 벽화를 들여다보았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순간의 역사까지 잠들어 있는 곳이니 여러 시간과 차원의 연결 통로가 될 만도 하지.”

나와 하양이의 모습이 그려진 듯한 벽화까지 어루만진 알버트는 희미하게 웃었다.

알버트 가까이 다가선 나는, 나와 하양이 곁에 같이 그려져 있는 알버트와 알렉산더의 모습을 발견했다.

사이가 무척 좋아 보였다. 웃고 있는 알렉산더와 하양이의 드래곤 모습을 작게 보니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다.

“자, 그럼 마법진을 그려볼까.”

벽화에서 눈길을 뗀 알버트가 내게 제안했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내가 존재했던 차원으로 가게 해줄 마법진을.

보통 차원을 뛰어넘는 건 무작위로 이루어졌다. 드래곤의 계약자는 다른 차원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한 차원에서 평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원하는 차원으로 갈 수 있는 마법진은 그리지 못하는 것이다.

한 차원으로 특정되는 마법진을 그리기 위해서는 그곳에 갔다 온 기억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내게는 원래 차원에서 살다 온 기억이 있었다.

이 말인즉슨, 내가 본래 내가 있던 차원으로 갈 수 있는 특정한 마법진을 그릴 줄 안다는 말이었다.

알버트는 내가 존재하는 차원에 산 적이 없으므로 내가 살던 차원으로 갈 수 있는 마법진을 그릴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그리는 것을 따라 하는 것은 가능했다.

마법진은 안에 들어가는 모양과 기호에 따라 내용이 완전히 달라질 정도로 섬세한 작업을 요구했다.

모양이 조금이라도 틀리면 완전히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도 있었지만 알버트에게 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마치 내 마법진을 프린터에 복사하는 것처럼 빠르게 나를 따라 하던 알버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마법진도 존재했다니 놀랍구나.”

그의 뒤에 선 알렉산더가 헛기침을 하더니 마구 으스댔다.

“흐흠, 이게 모두 내 덕이지.”

마법진을 그리는 건 나였지만, 어쨌든 알렉산더와 계약하지 않았으면 애초에 차원 이동 마법진을 이해할 수 없었을 테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알버트는 자신 앞에서 어깨를 땅땅 치는 알렉산더를 보며 피식 웃더니 어린아이의 소원을 들어주듯 인자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

“알렉산더 멋있다! 최고다!”

덩달아 나는 알렉산더를 열심히 칭찬해 주었다. 내 말에 알렉산더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렇지? 내가 최고지?”

“당연하지.”

“멋져어….”

나와 하양이는 다시 한번 알렉산더를 칭찬했다.

알버트도 옆에서 작게 그도 대단하다 생각한다며 덧붙였다.

우리는 알렉산더의 기분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길 바랐다.

티 내지 않기 위해 애썼지만 그의 눈에 비치는 두려움, 후회와 같은 복합적인 감정은 숨길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알렉산더가 지금 알버트와 계약한 건 알버트의 차원 이동을 위해서였다.

알버트와의 계약은 일시적인 것이었다. 여전히 삶을 계약자와 함께하고 싶지 않다는 알렉산더의 결심은 확고했으니까.

본래 다른 차원에 계속 있으면서 이번 시간의 흐름을 피할 예정이었던 알렉산더는 우리를 위해 이 차원에 남기로 했다.

우리와 여행이 끝난 후 이 차원에 돌아올 알렉산더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과거의 새끼 드래곤으로 새 삶을 살게 될 거였다.

우리를 도와주면서도 계약자 없이 살고 싶다는 소망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물론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이 돌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알렉산더는 남은 힘을 모두 모아 자신의 기억을 보존하는 데 쓸 작정이었다.

물론 여전히 시련의 고통은 남아 있었다. 500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오랜 고민 끝에 알렉산더는 우리와 길을 함께하기로 작정했다.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텐데. 내가 그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것을 깨달은 알렉산더가 단호히 말했다.

“이제 출발할 시간이야.”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것처럼.

속뜻을 알아차린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안타깝다는 듯 다물었던 입술을 올리고 마법진 그리기를 끝냈다. 내 손짓을 재빠르게 따라온 알버트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알버트와 하양이는 마법진 안에 들어서며 새삼스럽다는 듯 소감을 이야기했다.

“네가 있던 차원을 구경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나도… 여기랑은 전혀 다르다니까 궁금하다아….”

“처음으로 가게 되는 차원 여행이네.”

알렉산더도 결국 한마디 덧붙였다.

“이곳과는 아주 다르고, 새로운 곳이니 모두 준비하시기 바라요.”

나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나야 책을 읽으며 이런 세계에 익숙해졌다지만 이들은 다르니까.

마법이 아닌 과학으로 굴러가는 세상. 마차 대신 자동차와 버스, 지하철과 비행기가 다니며 모든 곳에 인터넷이 존재하는….

이제 어쩐지 너무 먼 곳처럼 느껴지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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