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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142화 (142/156)

142화.

방 안에 들어서자 소파에 늘어져 있는 메르시와 꼿꼿이 서 있는 리암, 그리고 주변을 부산스레 돌아다니는 슈버트가 보였다.

한쪽에서 책을 들여다보는 메르시는 한껏 집중하고 있어서, 내가 온 줄도 모르는 듯 보였다.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왜 일은 끝나지 않는 거지….”

하양이처럼 말을 늘이는 메르시의 얼굴은 우울했다.

하긴, 로제 아티어스가 사라지기 직전까지도 그녀는 일에 계속 시달리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지금도 마찬가지로 그녀의 소멸을 되돌릴 방법은 없는지 계속 찾아보는 중이었다. 알버트가 그럴 필요 없다는데도 계속.

메르시는 알버트 다음으로 강한 인물이었으므로 로제 아티어스를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이도 얼마 가지 않을 테지만.

나는 메르시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다독였다.

“메르시.”

“왔어요, 언니? 저 진짜 바쁜데 먼저 가보면 안 될까요. 조금만 더 찾으면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예전에 눈치채지 못했던 것들이 보였다. 강하고 카리스마 넘친다 생각했던 얼굴에는 아직 젖살이 붙어 있었다.

메르시가 항상 일을 제대로 해내는 모습만 보여줘서 그런지, 나는 때때로 그녀가 아직 얼마나 어린 나이인지 잊게 되곤 했다.

메르시의 과거도 지금 그녀의 모습을 만드는 데 크게 일조했을 터였다.

“안타깝지만 오늘은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할 거라서요.”

내 말에 메르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버트가 아직 오지 않아서 그런지 책을 펼치려던 메르시는 문득 생각난 듯 나를 응시했다.

“언니, 드레스 다 되었으니까 가지러 가야 돼요. 언제쯤 돌아오세요? 같이 가지러 가야죠.”

나와 알버트는 대외적으로 소멸을 막을 방법을 찾기 위해 드래곤의 둥지에 다녀온다고 되어 있었다.

그녀에게 정확한 시간을 말해주기는 애매했기에 나는 슬쩍 말꼬리를 흐렸다.

“…아마 이번 주 전에는 돌아오지 않을까요? 잘 모르겠어요.”

“일정이 정해지면 전보 같은 것을 이용해서라도 알려줘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기다린다는 말이 마음에 박혔다.

메르시는 나와 함께할 미래가 올 것이라 믿고 있으니까. 거짓말을 하기 싫었던 나는 웃는 얼굴로 대신 답했다.

그래, 그녀가 나를 기억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다시 만날 기회가 올 수 있으니까.

“항상 챙겨줘서 고마워요.”

메르시가 갑작스러운 내 인사에 놀란 듯한 얼굴을 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저야말로 저랑 같이 놀아줘서 고마운데요, 뭐. 그동안 주위 사람들 쳐내고 탑의 마법사들을 솎아내느라 사람 만나기도 힘들었었는데….”

결국 책을 덮은 메르시는 나를 보며 웃었다.

“언니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생겨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걱정하지 마요, 언니. 제가 방법을 꼭 찾아낼 테니까.”

훈훈한 분위기에 감동하기도 잠시, 슈버트가 나와 메르시의 대화에 재빠르게 끼어들었다.

“그래서 폐하가 우리에게 말씀하실 게 뭐야?”

슈버트의 반짝이는 눈을 보며 메르시가 신음했다.

진짜 저 새x는 분위기란 걸 몰라요…. 내게만 들리게 작게 중얼거린 메르시는 눈을 흘겼다.

그 모습이 메르시를 드물게 그 나이대 소녀로 보이게 만들었다.

“진짜 폐하밖에 모르는 바보라니까. 언니한테 할 말은 없어?”

메르시의 말에 움찔하던 슈버트는 나를 빤히 보다 시선을 돌려 헛기침을 했다.

내 눈을 피하는 모습이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엣헴, 소리를 내며 한참이나 말을 돌리던 슈버트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내게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미행한 건 죄송합니다.”

맨 처음 나를 만났을 때와 같은 엄숙한 목소리와, 그에 어울리는 예의 바른 태도였다.

“됐어요, 슈버트도 명을 따른 거고.”

“그래도 명을 받기 전에 나도 생각을 했어야 했어. 그냥 폐하 명이라면 뭐든 좋아서 어쩔 수가 없다니까….”

내 말에 슈버트는 머쓱한 듯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뭐, 이것도 변명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그렇게 들리지는 않았는데.”

내 말에 잠시 입을 다물던 슈버트가 작게 말했다.

“그럼 고맙고.”

어린 시절 슈버트를 구해주고, 우상이 된 알버트를 위한 일인데 나를 감시하는 게 대수였을까.

이제 감시가 끝나기도 했으니 너그러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내일 바로 출발하는 건가.”

옆에서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리암이 입을 열었다.

“오늘 자정에 바로요.”

로제 아티어스의 소멸로 바뀌는 시간을 멈출 수 있는 건 일주일.

그 시간이 다시 돌아가면서 우리가 시간의 흐름에 영향을 받을 수 있도록 돌아와야 하니 남은 시간은 3일 정도다.

“나도 메르시를 도와 방법을 찾아보고 있다. 너무 걱정하지 말도록.”

그가 나를 안심시키듯 말하는 것이 신기했다. 정말 리암에게 인정받은 느낌이라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리암의 시선이 예전보다 훨씬 따스했다. 북부보다는 봄과 어울리는 분위기였다.

이런 사람들이 알버트의 곁에 있어서, 그는 어려운 시간을 이겨낼 수 있었던 거겠지.

“감사합니다, 공작님.”

“그런 말을 듣기에는 내가 잘못한 것이 꽤 있어서. 이번 일을 무사히 해결하면 서로 빚은 없는 것으로 하지.”

“제게 잘못한 게 뭐 있으시다고요.”

“…처음 선입견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니까.”

어리둥절해 되묻자 리암이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 대답했다. 역시 자신의 사람에게는 따듯한 북부 공작다웠다.

나는 거의 까먹은 첫 만남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었던 것을 보면, 기억력도 비상했다.

리암과 대화를 끝냈을 때, 때마침 내 어깨에 온기가 느껴졌다.

내 어깨를 감싼 알버트는 자신의 앞에 선 세 사람을 물끄러미 보았다.

“모두 왔구나.”

그들 앞에 선 알버트가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섰다.

“오늘 너희를 이곳에 부른 건 물을 것이 있어서란다.”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리암의 말에 알버트가 느릿하게 경고했다.

“솔직하게 답해다오. 로제의 소멸과도 관련 있는 일이니까.”

“뭔가 찾아내신 거예요?”

메르시의 희망 어린 말에 알버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직 말해줄 수는 없지만….”

알버트가 쓰게 웃으며 말꼬리를 흐렸다.

“알겠습니다. 무엇이든 답하겠습니다!”

슈버트가 결연한 얼굴로 우렁차게 소리쳤다. 리암도 신중히 고개를 끄덕였고 메르시도 긴장한 얼굴로 알버트를 마주했다.

알버트는 자신을 모시는 이들의 진심을 듣길 원했다.

그 때문에 굳이 로제의 소멸이라는, 현 상황에서 가장 심각한 주제까지 들먹이며 그들을 소집한 것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알버트가 입을 열었다.

“나를 섬기기로 한 것을 후회한 적 있느냐.”

해사하게 웃는 알버트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

삶에 두 번째 기회가 생기는 경우가 몇 번이나 있을까.

정인과 알버트는 긴 대화 끝에 로제 아티어스의 죽음으로 시작될 삶을 그들에게 주어진 두 번째 기회라 생각하기 이르렀다.

불행했던 삶을 바꾸고 정인을 만나러 갈 수 있는 기회.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알버트는 자신을 진심으로 섬겼던 이들을 위한 기회를 선사하기로 했다.

예프넨 후작의 연회 이후로 자신을 맹목적으로 섬기기 시작한 슈버트.

아직도 그날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알버트가 완전무결한 왕이 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바쳐 돕던 리암과, 제 아버지를 막지 못했었다 자책하는 메르시까지.

그날 이후로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세 사람 중 그 누구도 그 연회를 잊은 적은 없었다. 그건 알버트도 마찬가지였다.

알버트는 그들을 위해 완벽한 주군이 되겠다 생각했다.

하나 정인이 나타나는 순간, 그의 인생은 통째로 뒤바뀌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자신의 최선을 다하겠다 생각했다.

어리석었다. 그조차도 지키지 못할 약속이었으니까.

알버트는 정인의 영혼을 찾기 위해 자신이 정신 나간 듯 행동했던 때를 기억했다.

자신의 주위 사람들을 혹사하고, 저 자신을 죽음의 벼랑 끝까지 내몰며 그녀를 찾던 때.

모두 그가 살기 위해서, 계속 숨 쉬기 위해서 한 행동이었지만, 한편으로 신하들에게 얼마나 무정하고 잔인했던 일인지 자각하고 있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행동이었다.

같은 일이 다시 벌어진다 해도, 그는 같은 일을 반복할 것이다. 자신의 숨 쉬는 이유를 찾기 위해서.

그러니 이들에게도 두 번째 기회는 주어져야 마땅하지 않은가.

만일 이들이 자신을 섬기는 것을 후회한 순간이 단 한 순간이라도 있다 말해주면, 과거가 변할 때 자신을 섬기지 않아도 되도록 만들어줄 작정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제일 먼저 물은 사람은 리암이었다. 그는 알버트가 던진 질문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이유까지 모두 말해줄 수는 없지만, 필요한 것이다. 해서 나는 진심으로 묻고 있는 거란다. 너희가 나를 섬기며 후회한 순간이 있는지.”

다른 사람이 이야기하면 터무니없게 들릴 이야기도, 알버트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에는 설득력이 생겼다.

그의 목소리, 어조, 말투. 모든 것이 이야기가 거짓이라고 믿을 수 없게 만들었다.

“내가 그리 좋은 주군은 아니지 않았느냐. 온 나라를 쑥대밭으로 뒤집어놓기도 햇고, 이성을 잃기도 했고.”

“…….”

“너희들이 생각한 이상적인 주군과는 거리가 멀었으니 묻는 것이다. 내 말에 솔직히 불평한다 해도 할 말은 없단다.”

앞에서 대놓고 말하는 것이 힘들 수 있다는 것 안다.

알버트는 그래서 되려 가벼운 분위기를 조성하려 애썼다.

“메르시, 네가 제일 먼저 말하는 게 좋겠구나. 내가 제일 혹사하기도 했고. 후회할 만도 하지.”

알버트는 먼저 메르시를 호명하며 넌지시 이야기의 화두를 열었다. 하지만 메르시는 묵묵부답이었다.

“확실히 그럴 만도 하지. 내 잘못도 있지 않느냐.”

“폐하, 제가 먼저 이야기하겠습니다. 저는-”

옆에서 이야기를 듣다 못한 슈버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슈버트는 말을 마저 잇지 못했다.

알버트 앞으로 성큼 다가선 메르시가 단호히 입을 열었기 때문에.

“후회하지 않습니다.”

방금 전까지 계속되는 일에 축적된 피로와 불만은 깨끗이 사라지고, 주군을 향한 진심만이 남아 있었다.

“결정적으로 폐하의 선택이 틀린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제 몸이 힘들지라도 이 생각은 한 번도 변한 적 없어요.”

굳은 눈빛은 오로지 진심만을 말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빠르고 감동적인 답변이었다. 이는 생각지 못했던 듯 알버트도 할 말을 잃고 서 있었다.

옆에서 슈버트가 동지를 만난 듯한 얼굴을 하며 입을 열었다.

“…메르시, 네가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할 줄은-”

“시끄러워. 폐하는, 지금 폐하의 자리가 가장 어울리시는 분입니다. 저는 그 자리에 가장 어울리는 분을 모시는 것에 만족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폐하.”

옆에서 리암이 덧붙였다.

“…너의 죄책감은.”

알버트의 말에 리암은 고개를 저었다.

“죄책감이 아니었더라도, 그날 연회가 없었더라도 저는 폐하를 섬겼을 겁니다.”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는 감히 반박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슈버트도 옆에서 거들었다.

“마찬가지입니다.”

잠시 뜸을 들인 슈버트가 씩 웃었다.

“폐하는 제 주군이시니까.”

슈버트의 말에 리암과 메르시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이 무엇이었든, 알버트가 그들의 주군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법칙이었다.

후회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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