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141화 (141/156)

141화.

로제 아티어스가 소멸한 지 사흘이 지났다.

오늘은 나와 알버트가 차원을 뛰어넘는 날, 즉 오늘 모두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날이라는 얘기였다.

물론 사람들에게 우리의 계획을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다.

알버트와 내가 세운 계획을 들으면 쓸데없는 것은 하지 말라며 말릴 이들이었으니까.

오로지 알버트의 안위만 위할 사람들. 나는 차례대로 리암, 슈버트, 그리고 메르시의 얼굴을 떠올렸다.

“…시작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서이나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지금 나는 서이나와 함께 있었다.

그녀에게 마법 쓰는 걸 보여주기로 약속했었던 만큼 나는 최선을 다해 마법을 선보였다.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마력은 나도 신기했다.

사기적일 수밖에 없는 힘에 죽음을 넘나드는 시련이 부과되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편으로는 공평하다 생각했다.

드래곤의 계약자도 시간의 흐름을 온전히 벗어날 수 없고, 여전히 인간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에 불과하니까.

내가 로제 아티어스의 소멸로 일어나는 나비효과를 늦출 수는 있어도 평생 막을 수는 없는 것처럼.

강력한 힘을 가져도 사람은 여전히 사람이다.

고된 시련과 과할 정도의 힘이 주어진다는 부담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사람이 아닌 존재가 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초월자였던 에밋이 인간적인 마음을 간직한 채 죽었고, 알렉산더가 우리를 위해 ‘그’ 선택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처럼.

생각에 잠긴 중에도 손은 마법진을 그렸다.

물이 허공에서 둥글게 휘었다. 서이나의 목소리가 환호성과 함께 울렸다.

“정말 대단하세요!”

마지막으로 보여준 건 원소 마법 중 물을 이용한 무지개였다.

분수대 못지않은 화려함으로 서이나의 감탄사를 끌어낸 나는 새삼스레 내 마법 실력에 감탄했다.

처음 알버트가 마법 쓰는 걸 보고 감탄만 했던 사람 어디 갔어. 이제 무슨 마법이든 쓸 수 있는 사람이 나야 나.

“내일 떠나신다는 게 사실인가요?”

서이나는 내 옆에 앉으며 아쉽다는 듯 물었다.

대외적으로 나는 알버트와 함께 휴가를 나간다고 되어 있었다.

“아쉽게도 그렇네요.”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서이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옆에 앉아 도시락처럼 보이는 작은 종이 상자를 내밀었다.

“오랜만에 소풍을 나온 마음으로 김밥을 싸봤어요.”

비록 이곳은 궁의 정원이지만요. 작게 소곤거린 서이나가 어서 열어보라는 듯 손짓했다.

“…….”

여주인공과 도시락을 먹게 될 줄은 또 몰랐는데. 나는 얼떨떨한 마음으로 뚜껑을 열었다.

“간단한 김밥부터 소고기, 돼지고기를 넣은 김밥까지 모두 준비했습니다.”

동글동글하게 예쁜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김밥은 먹음직스럽게 잘려 있었다. 꽁다리도 빠지지 않았다.

“제가 꽁다리를 좋아해서요. 재료도 듬뿍 들어 있고.”

“저도 좋아해요.”

“어머, 정인 님도…?”

뜻밖에 공통점을 찾은 우리는 사이좋게 꽁다리를 하나씩 입에 물었다.

입안에 터지는 육즙과 야채, 그리고 고슬고슬한 밥의 조합이 완벽했다.

김밥을 먹는데 고급 요리를 먹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또 처음이네.

그러고 보니 서이나에게 요리를 배우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비록 과거로 가게 되면서 모든 게 무산되었지만.

내가 실종되었을 때 원정을 다니느라 알버트도 궁을 자주 비웠을 텐데. 그동안 잘 지냈으려나.

서이나의 여태 생활은 어땠는지는 한 번도 물은 적이 없었어서 그런지 궁금해졌다.

나는 넌지시 운을 떼었다.

“황궁 요리사 일은 마음에 드세요?”

“아직도 저를 고용하고 싶으신 거예요?”

“아니, 그건 아니지만 궁금해서요.”

내 말에 너털웃음을 터트린 서이나는 생각에 잠겼다가 조곤조곤 말했다.

“정말 이렇게 좋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좋았어요. 하지만 떠나고 싶은 마음도 있네요.”

“좋은데 떠나고 싶다는 건….”

“황궁도 좋지만 제국이 건설된 만큼 여러 나라를 갈 수 있는 길도 넓어졌잖아요. 폐하께서 제 안전은 항상 보장해 주신다 하셨고.”

본래 왕이었던 알버트 곁에서 요리를 만드는 데 만족했었을 서이나에게도 새로운 꿈이 생겼다.

제국이 건설되고, 알버트가 완벽한 안전과 연봉을 보장했기 때문에.

마법사와 병사들을 붙여준 것도 그녀의 심신 안정에 도움이 된 듯했다.

“그리고 제게 있는 힘도 좀 더 연구해 보고 싶고요.”

또한 책의 내용을 벗어난 그녀에게는 새로운 능력이 생겼다. 내가 들어와 생긴 나비효과였다.

“돈이나 안전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보니 여유로워졌어요.”

“…….”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정인 님께도 감사를 드려야겠지요.”

곧이어 나온 말에는 놀랐다. 잘못 들은 것인가 싶었는데 날 보는 서이나의 시선이 너무 선명했다.

“제가 한 게 뭐 있다고요.”

“황제 폐하가 저를 황궁으로 데려와 주신 이유가 오로지 정인 님 때문이라는 것 잘 아는걸요. 처음부터 철통같이 보호해 주신 것도 그렇고.”

서이나가 내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오로지 요리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은 오랜만이었어요. 감사합니다.”

인사를 끝낸 서이나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입가에는 들꽃을 닮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만면에 핀 미소는 그녀가 얼마나 행복한지 보여주었다.

…그제야 좀 안심이 되었다.

내가 바꾼 원작 때문에 서이나가 불행해지는 것은 아닐까 걱정도 되었엇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새로운 이야기 속에서도 여전히 행복해 보였다.

…이번에 시간의 흐름이 바뀌게 되면 서이나는 과연 어떻게 될까.

그녀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을까? 아니면 나처럼 빙의하지 않은 채 본래의 삶을 살아갈까.

그녀가 좋은 사람임을 안다.

가능하다면 내가 돌아올 시간 속에서도 당신이 여전히 존재했으면 좋겠다.

“저야말로 맛있는 요리 대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때는 우리가 조금 더 오랜 시간을 두며 친구로 발전할 수 있기를.

그렇게 나는 서이나와 마지막 인사를 마쳤다.

[이제 끝난 거야?]

멀리서 나와 서이나의 모습을 살피던 하양이가 속삭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에서 폴리모프해 내려온 하양이는 서이나가 해준 김밥을 먹었다.

“맛있다.”

“나중에 나도 만들어줄게. 이번 일이 무사히 끝나고 다시 만나는 날에 원하는 거 모두.”

내 말에 하양이가 눈을 반짝였다.

“기대된다아….”

언제나 순수한 모습을 간직하면서 나를 위해주는 화이트 드래곤.

이곳에서 하양이를 만나게 된 건 내게 다시는 없을 행운이었다.

나를 위해 시련까지 이겨낸 하양이에게 잘해주기만 해도 모자란데 자꾸 여러 일을 겪게 하는 게 미안했다.

“바다 보러 가는 건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아. 미안해.”

나를 빤히 보던 하양이가 고개를 저었다.

“정인은 내게 미안해하지 마.”

그가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날 나를 탑에 들이고, 내 삶에 이유를 부여해 준 것만으로도 내게는 충분하니까.”

하양이의 목소리가 음률을 타고 기분 좋게 귓가를 간질였다. 마음속에 하양이의 기분과 감정이 느껴졌다.

나를 향한 원망이라고는 한 치도 없는 순수한 감정이었다.

다소 어두웠던 내 마음을 밝혀주는 빛과 같은 밝은 감정.

“그럼 이제 사람들 만나러 가자….”

하양이가 나를 이끌었다. 나는 눈앞의 미인을 물끄러미 보다 입을 열었다.

“하양아.”

“응?”

고개를 돌린 하양이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빛에 부서지듯 빛나는 은발 사이로 보이는 새하얀 얼굴이 마치 천사 같았다.

“이 세상에 태어나 나를 만나러 와줘서 고마워.”

누군가는 하양이를 위해 바친 삶이, 그리고 현재 느끼는 동질감이 말도 안 된다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삶이란 그런 거라 생각한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과 인연들로 가득 차 있는 것.

한 치 앞도 마주 볼 수 없는 것.

“그 말 정말 듣기 좋다.”

내 말에 함박웃음을 짓는 얼굴과 함께 지금 하양이가 느끼는 행복감이 내게 전달되었다.

물론 내 행복도 마찬가지였다.

***

알렉산더는 제 앞에 선 남자를 물끄러미 보았다.

이 세계에서 드래곤의 계약자를 제외하고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마법사.

혼자서 계속되는 수련과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드래곤에 필적하는 힘을 가진 자.

“…준비는 되었나?”

그리고 잠시 동안 자신의 계약자가 될 남자.

알렉산더의 물음에 알버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한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알렉산더가 계약을 이행하려던 찰나 알버트가 손을 들었다.

“계약하기 전에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뭐지?”

“계약자가 되면 내 머리 색도 바뀌는지 궁금해. 정인은 백발이 되었거든.”

으음, 본인의 기호라면 매우 고민될 수 있는 질문이군.

자칫 그냥 넘길 수 있는 질문이었지만 알렉산더는 진지했다. 뭐, 사람마다 중요한 건 다르니까.

“아마 안 바뀔 거야. 화이트의 계약자의 머리 색이 바뀐 이유는 그녀가 육신이 없는 상태에서 화이트의 힘을 받아 새로운 육체를 지니게 되었기 때문이거든.”

알렉산더의 설명을 듣던 알버트의 눈이 반짝였다.

“…그건 다행이군.”

난 정인이 사랑하는 지금 내 모습이 좋거든.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알렉산더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랑이란 대단하군.

“그럼 계약하지.”

사람으로 폴리모프해 알버트 앞에 온 알렉산더는 그의 손목을 살짝 쥐었다.

알버트는 자신보다 키가 작은 알렉산더를 보며 피식 웃었다. 알렉산더가 순간 발끈했다.

“성체로 돌아가서 계약할까?”

“아니, 나는 이 편이 더 좋아. 그리고… 블루 드래곤 당신에게는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어.”

알버트는 알렉산더를 향해 고개를 깊숙이 숙이고 무릎을 꿇었다.

순식간에 알렉산더가 알버트를 내려다보는 모양새가 되었다.

“쉽지 않은 선택임을 알기에 더.”

“…시간을 바꾸기 전까지만이니까 가능한 거야.”

“그조차도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는 건 나와 화이트, 그리고 정인 모두 알고 있지.”

알버트의 말을 가볍게 넘기려던 알렉산더는 결국 어깨를 으쓱였다.

“어쩔 수 없잖아. 사건의 내막을 모두 알게 되었는데 그냥 넘기는 건 드래곤으로서 할 짓이 아니라고.”

성체 드래곤이 된 이후 돌아온 기억, 그리고 하양이와 나눈 대화를 통해 알렉산더는 자신을 구하려 입을 열었던 정인이 얼마나 절체절명의 순간에 있었는지 깨달았다.

하양이와 정인의 목숨 모두가 날아갈 수 있었던 순간에서, 그녀는 알렉산더 자신을 구하길 택했다.

그 앞에서 입을 열고 감히 위험에 대해 말했다.

자신이 살지 않았어도, 그들의 삶은 굴러갔을 텐데도 불구하고 정인은 기꺼이 선의를 베풀었다.

자신이 먼저 시작했다지만, 빚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빚을 갚고 싶었다.

자신이 베풀 수 있는 것은 베풀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

이는 알렉산더가 성체 드래곤이 된다면 언제고 실천하고 싶었던 소망이자 긍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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