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140화 (140/156)

140화.

드래곤의 계약자가 아닌 이상 정확한 시간의 흐름을 모르더라도, 알버트도 이상한 점은 눈치챘을 것이다.

주위 사람들이 로제의 존재를 잊고 있을 테니까.

그녀의 존재가 소멸해 감에 따라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정인.”

마법진 시전을 마친 후, 나는 알버트와 마주쳤다. 심각해진 그의 얼굴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당신도 느꼈군요.”

“마법에 저항력이 약한 사람들부터 시작되었단다.”

알버트는 이미 리암과 레오나는 로제 아티어스를 잊었다고 덧붙였다. 그의 말에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나와 알버트, 주위 사람들에게 손을 댈 수 없는 걸 안 로제로서는 최선의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로제 아티어스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만날 수 있었던 방법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로제 덕분에 만난 인연이었기 때문에.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은 제가 시간의 흐름을 멈췄어요.”

“…언제까지 가능하지?”

“일주일 정도요.”

“대단하구나.”

내 마법을 칭찬하는 알버트를 보며 결국 나는 픽 웃었다.

당신한테 내 마법이 대단하다는 말을 듣게 되는 날이 올 줄 알았을까.

“자신의 존재 자체를 지워 버릴 줄은 몰랐어요.”

이런 것도 대비했어야 했나. 나는 고개를 떨구며 중얼거렸다. 복수를 한다고 해놓고, 이렇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네가 과거로 돌아가서 로제 아티어스의 소멸을 막는 건 불가능하겠지.”

“네, 그녀는 이미 소멸했으니까.”

나와 알버트, 하양이가 이야기를 나누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녀는 이 세상에서 제 존재를 지워가고 있었다.

우리가 아직까지 그녀를 기억하고 있는 건, 소멸 마법이 천천히 진행되기 때문이다.

마력이 약한 일반 사람들부터 서서히 모두를 잠식하는 것이다.

“…….”

어릴 적 불행한 로제 아티어스를 그냥 두었던 게 이렇게 부메랑으로 날아오는 건가.

알버트가 나를 잊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애초에 이곳에 들어온 적 없이, 사고로 죽을 테고.

우리는 서로를 기억하지도 못한 채,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정인.”

부드럽게 나를 부른 알버트는 나를 품 안에 집어넣었다.

훅 끼치는 향기가 나를 진정시켰다. 그제야 나는, 내가 울 뻔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 여기서 이대로 당해주면, 너무 허무하지 않나. 책 속에서 악당의 작전은 항상 실패하니까,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알버트는 나와 하양이를 소파에 앉혔다.

머리를 굴리기 위해서는 그만한 음식이 필요한 법. 알버트는 서이나를 시켜 아침을 내오게 했다.

내게 인사를 하러 왔던 서이나는 나와 알버트의 심각한 얼굴을 보고는 덩달아 심각한 얼굴이 되어 주방으로 돌아갔다.

“어떤 일이신지는 모르지만, 잘 해결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만들었어요.”

잠시 후 돌아온 서이나는 일이 해결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만든 음식을 건넸다.

머리를 굴리기 위한 탄수화물이 소파 앞 테이블에 그득 찼다. 과연 여주인공답게 아름다운 마음씨였다.

…하지만 나는 서이나가 여주인공이었던 때로 돌아가길 원하지 않는다.

이 소설을 보고 둘의 사랑을 응원하길 원하지도 않는다.

내게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이니까.

내가 알버트를 사랑하고, 알버트가 나를 사랑하는 현실이니까.

그녀가 가져온 하얀 쌀밥을 전투적으로 푼 나는 밥을 먹으며 생각에 잠겼다.

알버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모든 시간이 돌려지면, 너는 원래 살던 차원에서 로제의 몸에 빙의하기 전 순간으로 돌아가겠지.”

“네, 하지만 로제의 몸에 빙의하기 전 제 마지막 순간은 사고 전이에요.”

즉, 이대로 시간의 흐름을 따라간다면 나는 죽는다는 소리다.

로제의 몸에 빙의하기 전처럼 영혼이 주변을 떠돌아다닐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내 영혼과 같은 몸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니까.

“지금 유일무이한 드래곤의 계약자로 살아 있을 방법이 필요하다는 거구나.”

“된다면요.”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는 일이니 선택지는 열어두는 것이 좋다.

“정인이 살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옆에서 나와 알버트를 물끄러미 보던 하양이가 입을 열었다.

나는 고개를 단호히 저었다. 그 방법은 따르고 싶지 않았으니까.

“말하거라, 화이트.”

하지만 알버트는 내 반응을 보고 하양이를 재촉했다.

말하지 말라는 나와 말하라는 알버트 사이에 낀 하양이는 장렬히 고민하다 결국 답했다.

“정인이 이곳 시간의 흐름을 따르기 전에, 다른 곳으로 넘어가면 돼.”

“드래곤의 계약자기에 알고 있는 방법이겠군.”

“응.”

알버트의 말에 하양이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버트는 식사는 결국 입에도 대지 않은 채 턱을 괴었다.

“하지만 정인이 말하지 않았다는 것은….”

드래곤의 계약자는 시간과 차원을 넘나들 수 있지만, 이 흐름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과거를 바꾸면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게 되는 것도, 시간의 흐름에 예민해지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나는 로제의 소멸 이후에도 살아남을 방법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그 방법은 알버트에게 털어놓지 않을 생각이었다.

“살아남는 대신 뭔가 대가가 생기는 거겠지.”

알버트가 정확히 정곡을 찔렀다.

드래곤의 계약자로서 이곳 시간의 흐름을 따르지 않는 다른 세계에 가 내 목숨을 구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 방법을 택하면 이곳에서 살았던 내 기억이 사라지게 된다.

이곳 차원과 시간 속에서 생겨난 기억이기 때문이다.

“네, 전 당신을 잊어버리고 살게 될 거예요.”

“내가 찾으러 가면 되지 않느냐.”

알버트가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하다는 듯 말을 뱉었다.

“안 돼요.”

난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기 때문이다.

차원을 넘나드는 건 드래곤의 계약자로서도 꽤 많은 힘을 소요하는 마법이다.

더군다나 내가 아무것도 기억 못 하며 차원과 시간을 넘나든다면, 알버트와 평생 엇갈릴 수도 있다.

무수히 많은 차원과 시간을 넘나들면서.

무엇보다 알버트가 고통스러운 유년 시절을 다시 겪으면서 모든 것을 감내해야 한다는 게 싫었다.

게다가 한 가지 더 큰 문제가 있다.

알버트가 나를 만나러 오기 위해서는 드래곤과 계약을 해야 했다.

계약 과정도 고통스러울 테고, 그가 드래곤을 만날 수 있을지도 미지수라는 말이다.

예프넨 후작의 과거가 어떻게 바뀔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내 머리로 예상할 수 없는 변수가 너무 많았다.

“내가 넌 어떻게든 기억하마.”

알버트가 날 달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어떻게 될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안 돼요.”

내가 당신을 기억하지 못하는걸. 난 그를 절대로 잊고 싶지 않다.

그리고 난 그가 불행한 시간이 최대한 짧았으면 좋겠다. 그가 느낄 고통도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이가 고생하는 것을 보는 것은 언제나 고통스러우니까.

우리 셋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침묵이 계속되는 방 안은 고요했다.

그때, 침묵을 깨는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화이트야, 나 이제 그만 갈….”

방 안에 알렉산더가 들이닥친 것이다.

닫혀 있던 창문을 단숨에 열고 들어온 그는 무거운 공기에 당황하며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우울한 마음에 입꼬리가 축 처진 나와 알렉산더의 시선이 닿았다. 그가 입을 뻐끔거렸다.

“분위기 별로일 줄은 알았지만… 이건 거의 장례식장인데. 나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해.”

알렉산더가 몸을 부르르 떨며 작게 불평하더니 조용히 내 눈치를 살폈다.

다소 갑작스럽게 안녕을 고하는 알렉산더의 사정은 역시 로제 아티어스의 죽음 때문이겠지.

로제 아티어스가 죽고 내가 사라지게 됨에 따라 알렉산더의 미래도 변화하니까.

…그가 미안할 것은 없는데 왜 내 눈치를 살피는 건지 모르겠다.

“다른 차원에 가려는 거죠.”

“…응. 어떻게 성체 드래곤이 된 건데. 과거로 돌아가서 위험을 감수하기는 그러니까.”

“…….”

“그 고통을 다시 겪고 싶지도 않고.”

알렉산더의 마음도 이해는 갔다.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순간 번뜩 생각나는 게 있었다.

“성체 드래곤도 계약자를 가질 수 있나요?”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자주 있는 일은 아니란다. 애초에 성체 드래곤이 인간에게 마음 주는 일이 없기도 하고.”

입을 연 건 알렉산더가 아니라 알버트였다. 실낱같은 희망을 본 순간, 나는 설렜다.

알렉산더는 차원을 넘나들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

만일, 그가 알버트와 계약을 한다면?

그래서 알버트가 차원을 드나들 수 있는 존재가 된다면 알버트도 나와 함께 다른 차원에 갈 수 있다.

나중에 그의 힘을 이용해 사라질 내 기억을 되살리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나와 알버트가 헤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안 돼.”

하지만 알렉산더는 단호히 말했다. 평소 내게 다소 장난스럽게 굴던 모습과 전혀 다른 진지함이었다.

“드래곤과의 계약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마음이지. 하지만 난 애초에 인간과 계약을 할 마음이 없어.”

알렉산더는 미안하다는 듯 눈을 내리깔며 한숨을 내쉬었다.

“계약자가 되면 계약자와 묶이게 될 수밖에 없으니까. 난 누군가에게 얽매이는 삶은 살고 싶지 않아. 내 평생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과거가 바뀌지 않는 한, 드래곤과 인간의 계약은 영원하다.

알렉산더가 제일 두려워하는 건 이것이었다.

그걸 알기에 나는 힘없이 내뱉었다.

“…그래도.”

내 이기심인 것 안다.

알렉산더는 나와 하양이를 위해 생의 마지막 순간을 바쳤을 때 이미 내게 넘칠 만한 은혜를 베풀었다는 것도.

하지만, 그가 도와준다면 모든 게 순조로이 끝날 수 있지 않은가.

순탄한 결말을 위해서, 나는 다시 알렉산더의 도움을 바랄 수밖에 없다.

“…정인.”

고개를 떨군 알렉산더의 답을 간절히 기다리는데, 옆에서 하양이가 조용히 나를 불렀다.

내 곁으로 다가온 하양이는 입술을 지그시 다물며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알렉산더가 고개를 서서히 들었다.

그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는 순간에야, 내가 지금 그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

평생의 소원이 차원을 돌아다니던 것이었던 드래곤에게, 나는 지금 그의 생을 바쳐달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알버트를 위해서.

내가 예프넨 후작과 다를 것이 무언가.

아무리 알버트와 행복해지고 싶다 해도 이건 아니었다. 나는 입술을 짓씹다 결국 무릎을 꿇었다.

“…미안해요, 알렉산더. 지금 내가 정신이 나갔었나 봐요. 그냥 못 들은 걸로 해줘요.”

“됐어. 네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니까.”

여전히 일그러진 얼굴로 나를 보던 알렉산더는 애써 웃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하양이를 응시했다.

“…사는 이들은 누구나 저의 행복을 추구하게 되는 법이지. 그래서 뜻밖의 선의가 더 아름다운 것이고.”

눈을 내리깐 알렉산더가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그 말과 함께 알렉산더는 소파에 앉았다. 하양이가 우물쭈물하다 알렉산더 옆에 앉았다.

“뭐 해, 같이 생각해야지.”

알렉산더가 하양이의 어깨를 툭 쳤다. 방금 전까지의 일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내가 너그러운 마음으로 네 말실수는 다 용서해 줄게. 진짜 나를 협박한 것도 아니고, 아직 네게 갚아야 할 빚이 있으니까.”

내게 진지하게 이야기한 알렉산더가 알버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까 방법을 생각해 보자고, 황제 폐하.”

알버트가 나른히 웃었다.

“…방법을 찾는 건 어렵지 않지.”

그저 시간이 필요한 것일 뿐.

자리에 앉은 알버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우리는 찾아냈다.

우리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결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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