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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139화 (139/156)

139화.

알버트가 자리에서 일어난 건 정인이 완전히 잠든 후였다.

‘드디어 모든 일이 끝나는군.’

자리에서 일어난 알버트는 하양이에게 정인을 부탁한 후, 로제 아티어스가 갇혀 있는 감옥으로 향했다.

내딛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밤새도록 정인과 나눈 이야기 덕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나는 아직 너를 온전히 모르는지도.’

이야기를 나눌수록, 그녀가 얼마나 사려 깊은 사람인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그런 이를 곁에 두게 된 자신은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정인이 두려워할 모습은 여전히 숨길 테지만… 가끔은.

가끔은 그런 욕망을 내보여도 괜찮지 않을까. 정인은 자신이 어떤 모습을 보이든 사랑해 줄 테니까.

그가 정인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상하군.”

감옥에 다다른 알버트는 쇠창살 너머의 방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문은 잠겨 있었고 자물쇠를 건드린 흔적도 보이지 않는데, 로제 아티어스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애초에 마법사들이 힘을 쓸 수 없게 설계된 곳이었으니 나갈 수 없었을 텐데…?

어제 마력의 구속을 잠시 풀어준 건 다른 이를 해하려는 로제 아티어스의 모든 마법이 통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한 거였다.

무엇보다 문은 오로지 메르시와 자신만 열고 닫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로제 아티어스가 아무리 안간힘을 써보았자 가능하지 않았을 텐데.

알버트는 미간을 좁히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내 마력에 문제가 생긴 건가.’

혹시나 하는 생각에 꽉 쥔 손 사이로 마력을 흘려보았지만, 느껴지는 마력은 그대로였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벌써부터 불안해할 필요는 없었다.

숨을 내쉰 알버트는 자신이 그려낸 마법진을 떠올렸다.

로제 아티어스는 정인에게 해를 가하지 못한다. 바로 어제도 마법을 쓰려다 실패하지 않았나.

로제 아티어스를 대상으로 그려진 마법진은 그녀에게 평생 적용될 것이었다.

무엇보다 정인의 힘도 만만치 않았다. 드래곤의 계약자를 함부로 해하는 건 쉽지 않다.

그녀의 힘은 그라도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지금은 그보다 강하기도 했고.

그걸 잘 알고 있고, 어제 정인과 대화한 이후로 진정했다 생각했는데, 심기가 어지럽다. 마음속에 고요한 폭풍이 분다.

‘내 마음대로 흘러가는 시간이 없군.’

정인과 함께하면 언제나 제 생각을 벗어나는 감정과 일이 많아졌다.

하지만 새로운 상황에서도, 그는 언제나 사건을 해결할 방법을 찾을 자신을 믿었다.

어떤 순간에도 노력 속에서 최고의 결과를 도출해 내는 게 그의 삶이었으니까.

우선 상황을 알아보는 것이 먼저다.

메르시는 어제저녁부터 눈물겨운 휴가를 보내기 위해 마탑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지금은 못 잔 잠을 자기 바빠 아직 탑에 있을 것이다. 생각보다 잠이 많은 편이니까.

‘탑에 가는 것이 좋겠군.’

텔레포트 대신 걸어서 성을 나가길 택한 건, 혹 주변 사람들이 본 것이 있나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본궁 밖으로 나온 알버트는 기사단장 레오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리암과 마주쳤다.

“폐하.”

리암은 그를 보자마자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이미 떠난 줄 알았는데.”

“가기 전 기사단장에게 제가 없는 동안 잘 부탁한다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일을 원칙대로 처리하는 리암답게 휴가가 결정되었다 해도 바로 떠나지는 못한 모양이다.

공작이라는 지위만 아니었어도 이미 기사단장에 오르고도 남았을 실력이긴 했다.

정인이 돌아오며 전쟁은 끝났지만 너무 순식간에 통일해 버린 덕에 아직 대륙의 정세는 불안정한 곳이 많았다.

지금은 알버트의 압도적인 힘으로 틀어막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알버트 한 사람에게만 의지할 수는 없는 일이다.

레오나와 리암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알버트가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언제부터 하고 있었지?”

“새벽녘부터였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만일 로제 아티어스가 자력으로 감옥의 문을 열었다면-애초에 불가능한 전제이기는 했지만- 쓸 수 있는 마력은 모조리 다 끌어 썼다는 거다.

감옥에서 나와서는 걸어야 했을 거다.

그렇다면 감옥에서 가까운 연무장에 있던 리암이나 레오나가 뭔가 봤을 수도 있었다.

아주 실낱같은 단서라도 쉬이 지나칠 수 없었기에, 알버트는 넌지시 운을 던졌다.

“로제 아티어스가 사라졌다. 혹 짚이는 바가 있느냐.”

알버트의 말에 리암이 눈을 깜빡였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한숨을 내쉰 알버트는 고개를 내저었다.

‘봤다면 사건이 일어났겠지.’

리암 성격에 로제 아티어스를 봤다면 잡고도 남았을 거다.

로제의 얼굴을 알고 있는 레오나도 마찬가지였을 테고. 쓸데없는 질문이었다.

아직 아리송한 듯 눈을 깜빡이는 리암을 보며 알버트는 고개를 저었다.

“되었다, 내가 알아보마.”

알버트는 리암과 레오나에게서 몸을 돌렸다. 하지만 리암의 목소리는 그를 붙잡았다.

“아니, 그 전에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폐하.”

“…뭐지?”

“로제 아티어스가 누굽니까?”

리암이 이런 곳에서 장난을 칠 리는 없다. 알버트는 고개를 서서히 들었다.

리암의 눈동자가 숲처럼 깊은 색을 띠고 그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물었다.

“로제 아티어스를 모르겠다고.”

“예, 전혀.”

순수한 진심이 담긴 대답이다.

리암 메이슨은 로제 아티어스를 기억하지 못한다.

…불안한 예감이 든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 같은 느낌이.

이를 아득 깨문 알버트는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레오나를 불렀다.

“예, 폐하.”

레오나가 황급히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버트의 눈이 사납게 번뜩였다.

“로제 아티어스를 마지막을 본 게 언제지?”

레오나는 바로 어제저녁까지만 해도 정인의 호위로 로제 아티어스를 보았다.

로제 아티어스가 도망치는 것을 보지 못했다면,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때라도 기억해야 했다.

“송구하지만 폐하, 누굴 이야기하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레오나는 리암과 다름없는 이야기를 했다.

“…….”

그들의 눈에 거짓은 없다. 로제 아티어스가 도망가면서 이들의 기억을 지우기라도 했단 말인가?

알버트는 그들의 몸을 살폈다. 생채기 하나 없는 몸은 멀쩡했다.

로제 아티어스가 아무리 대단한 흑마법사라도 이 둘을 아무런 반항 없이 제 마음대로 휘두르는 건 불가능했다.

“슈버트.”

“예.”

어제 정인의 말 이후로 그녀를 지키는 대신 알버트를 따르고 있던 슈버트가 잽싸게 튀어나왔다.

그는 인상을 마구 찌푸리고 있었다. 잠시 말을 고르던 슈버트가 중얼거렸다.

“왜….”

“넌 기억하고 있구나.”

슈버트의 짧은 말 속에서도 알버트는 금세 요점을 짚어냈다.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폐하를 그렇게 괴롭힌 인물을 제가 어떻게 잊어버리….”

리암 앞이라는 것을 깨달은 슈버트의 목소리는 격분했다 점차 조용하게 가라앉았다.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던 리암이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알버트에게 그의 의문을 풀어줄 여유는 없었다. 그의 머리가 맹렬하게 돌아갔다.

리암과 레오나가 가지고 있지 못하지만, 슈버트는 가지고 있는 것.

슈버트는 마법이 잘 걸리지 않는 체질이다. 로제 아티어스가 마지막 순간에 ‘마법’을 이용한 무언가를 한 거라면?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지기 시작한 거라면.”

불현듯,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선명했다.

모든 게 확실해졌다.

알버트는 그제야 사건의 진상을 깨달았다.

로제 아티어스는 도망친 게 아니다. 누군가를 해하려 든 것도 아니다.

본래 정인의 영혼을 소멸시키려던 마법.

차원에서 그 존재를 완전히 지워 버리는 마법을, 로제 아티어스는 자기 자신에게 쓴 것이다.

자신이 사라진 이후의 세상이 변화하도록.

로제 아티어스가 애초에 ‘없었던’ 세상이 된다면, 정인과 만날 수 있었던 계기부터가 사라지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까지 그냥 가지 않아.”

알버트는 헛웃음을 지었다. 끝까지 정인과 자신을 갈라놓으려는 노력이 가상했다.

‘…빨리 소멸해 보았자 몇 시간 전이었겠지.’

존재 자체를 소멸시키는 마법은 아무리 대단한 흑마법이라도 꽤 느리게 진행된다.

그렇다면, 그 안에 정인과 자신이 떨어지지 않을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내가 어떻게 모든 것을 기억해 냈는데.’

다시 기억을 잃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제 과거가 바뀌는 한이 있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알버트는 몸을 돌려 정인에게로 향했다.

한시가 급했다.

***

꿈에서 나는 하양이와 알버트와 함께 여행을 갔다. 우리는 바닷가에서 물장구를 쳤다.

눈을 찌르는 햇살은 불쾌하지 않을 만큼 따스했고, 햇빛이 반사되는 바다는 무지개처럼 예쁘게 반짝였다.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던 행복 속에서 나는 몸을 흔드는 손길에 잠에서 깼다.

“뭐예요….”

알버트가 이렇게 깨운 적이 있던가. 부스스 눈을 뜨는데 하양이가 다급한 얼굴을 하고 내 몸을 흔들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조급한 표정을 보았을 때는 로제가 내 영혼을 소멸시키려 했을 때인데….

그 생각을 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슨 일이야.”

내 말이 미간을 좁히던 하양이가 물었다.

“…정인, 느껴지지 않아?”

평소의 나긋한 목소리와 달랐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이야기를 쉬이 할 아이가 아닌데.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해 봐.”

하양이의 말에 나는 바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현재 시간의 흐름이 이상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드래곤의 계약자는 시간과 차원을 넘나들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로, 시간의 흐름에 예민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드래곤의 계약자는 과거를 움직여 미래를 바꿀 수 있으니까. 과거의 흐름이 미래에 어떻게 연결되는지도 알 수 있었다.

평소에 항상 그런 것은 아니고, 정신을 집중하며 마력을 써야 했다.

“…….”

이 세계에서 로제 아티어스의 존재가 사라지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 ‘차원’에서.

본래 알버트 정도는 아니더라도 대마법사의 재능을 지녔던 로제 아티어스가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부어, 목숨까지 바쳐가며 만든 소멸 마법이다.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목숨까지 내걸 줄은 몰랐는데.

“우선은 응급조치를 취해야겠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하양이와 함께 마법진을 그렸다.

로제 아티어스의 존재가 사라지며 변화하려는 시간을 잠시나마 붙잡아둘 마법진이었다.

변해가는 시간의 흐름을 평생 붙잡고 있는 건 불가능하지만, 이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시간이다.

그리고 내게는 다른 이들에게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유일무이한 힘이 있다.

마법진이 반짝이기 시작한다. 나는 눈을 감고 주문을 외웠다.

“홀드(Hold).”

오로지 드래곤의 계약자만 외울 수 있는 시간 관련 주문은, 시간을 현재 상태로 멈춰주었다.

이제 알버트와 현 상황에 대해 이야기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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