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방으로 들어온 알버트의 몸에서는 좋은 냄새가 났다. 나를 만나기 전에 씻은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옷도 갈아입은 듯, 처음 보는 옷을 입고 있었다.
내게 뭔가를 숨기고 있는 거다.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나를 마주한다. 알버트가 제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아직 살아는 있단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는데 알버트가 나지막이 말했다. 역시나, 로제를 고문하고 돌아온 것이다.
놀랍지는 않았다. 먼저 로제와 이야기를 끝내고 감옥을 나올 때부터 예상했었다.
그동안 알버트가 로제를 그냥 두었던 건 오로지 나 때문이다.
살날이 겨우 하루 남짓 남은 그녀를 편히 내버려 두는 건 너무 불공평하지 않나.
그녀 때문에 고생하고 고통받은 기억이 아직 생생한데.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사실 이 같은 이유가 없었더라도 나는 알버트를 이해했을 테다.
그의 행동에 온갖 이유를 가져다 붙이며 정당화했겠지.
그게 사랑이니까.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을 이해하려 애쓰게 되는 것.
처음에는 알버트의 여러 행동이 무섭게도 느껴졌던 것 같은데, 이제는 그조차도 까마득하게 먼 옛날로 느껴졌다.
침대맡에 기대어 앉아 있는 내 곁으로 다가온 알버트가 내 앞에 풀썩 앉았다.
숨을 고른 그는 내 손등 위에 제 손을 얹었다. 물기가 막 마른 손은 따듯했다.
그가 붓으로 그린 듯한 미소를 지었다.
“두려워할 것 없단다. 네게 보여주는 모습이 아니지 않니.”
하지만 몸을 깨끗이 하고 왔다 해서 가라앉은 눈동자까지 숨길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
그리고 이번에는 그가 틀렸다.
“눈은 아직도 흉흉한데….”
나는 그의 눈가를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알버트가 해사하게 웃으며 눈꼬리를 접었다.
“네가 두려워하기에 배려하는 것이지.”
나도 안다. 그가 나를 배려하기 때문에 말을 아끼는 것을. 하지만 이렇게 부딪쳐야 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그냥 넘어간다면, 오해만 쌓일 뿐이니까.
“하지만 내가 그 모습도 이해하고 싶다면요.”
내 말에 입술을 다문 알버트의 눈이 흠칫했다.
“…두려워할 거잖니. 나는 알아.”
“그걸 뛰어넘는 게 사랑이잖아요. 그러니까….”
나는 당신이 모든 것을 이야기해 주길 원한다. 그의 손을 살며시 잡은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슈버트는 그만 붙여두셔도 돼요.”
내 말에 나지막이 숨을 내쉰 그가 입술을 짓눌렀다.
불안한 듯한 얼굴은 내게 사실을 숨기고 싶어 했다는 걸 보여주었다.
“당신이 원하는 만큼 곁에 있을 테니까.”
그의 불안을 해소하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내 답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 말에도 불구하고 알버트는 한참 말을 골랐다.
“실망했느냐.”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그에게 가장 신경 쓰이는 건 사실을 알게 된 내 마음이다. 나는 단숨에 고개를 저었다.
“실망했을 리가 있나요. 그저….”
그가 제일 듣고 싶어 할 말이 무얼까 생각했다.
말만으로 불안을 잠식시키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은 알지만, 이건 내가 그를 위하는 방법이기도 하며-
“내가 당신에게 그 정도의 믿음을 주지 못하는 게 미안했어요.”
알버트에게 말하고 싶은 내 진심이기 때문에.
솔직한 대화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준다.
“정말 당신을 떠나려 한 적은 없는데, 항상 상황이 그렇게 된 게 내 탓 같기도 하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은 하지도 말거라.”
알버트는 내 말을 단호히 끊었다. 그가 말을 끊어줄 건 알고 있었다. 나는 바로 말을 이었다.
“이게 당신이 몰랐던 진짜 제 심정이에요.”
그리고 알버트의 어깨에 이마를 콩 대면서 속삭였다.
“그러니 당신이 숨기는 것 없이 다 알려줘요.”
잠시 후 고개를 든 나는 알버트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 뒤통수를 가볍게 감싸 쥔 알버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널 평생 가둬두고 나만 보고 싶다고 해도?”
이 정도쯤이야, 예상했던 바였다. 탑 안에서 들은 것도 있었고.
나는 신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해 볼게요. 당신을 사랑하니까.”
“네게 말 거는 모든 사람을 떼어놓고 싶다 해도.”
…으음, 이것도 1년이나 못 봐 생긴 분리불안증이라고 치면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시간을 충분히 들여 치료는 해야겠지만.
“질투할 수 있죠. 그것도 괜찮아요.”
알버트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마주한 얼굴의 눈은 동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마치 미지의 심연을 보는 것처럼 몸에 소름이 서서히 돋았다. 알버트가 나를 보며 짤막한 숨을 내뱉는다.
“…….”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얼굴은 이미, 내가 겁을 먹었다는 걸 알고 있다.
“지금 반응은 생리적 현상이고요. 알아두셔야 해요. 당신이 나를 생각보다 모른다는 걸.”
그러니까 서로에 대해 알아가야 하는 거다. 나는 그의 손을 꼭 잡으며 눈을 부릅떴다.
계속 무서워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내 행동을 물끄러미 보던 알버트가 피식 웃었다.
“봐요. 이렇게 진심을 말해주면 나도 다 받아줄 거였는데. 괜히 고민했죠?”
“…그래, 쓸데없는 고민이었구나.”
내 말에 나지막이 말을 뱉은 알버트가 자신의 이마를 내 이마와 맞대며 중얼거렸다.
“내가 널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마를 뗀 그는 나를 품에 꽉 안았다. 따스한 품은 청량한 바다 같기도 했고 깊은 숲속처럼 아늑한 느낌도 났다.
나는 그의 등에 손을 올려 가만히 토닥이다 입을 열었다.
“우리 같이 여행 가요.”
“여행?”
“네, 하양이하고 셋이서 바닷가에 가는 거예요.”
하양이의 이름이 나오자 알버트가 잠잠해졌다. 나는 손가락을 올려 그의 등을 살짝 누른 후 눈을 흘겼다.
“이제 하양이 인정하시는 거 알아요. 화이트라고 불러주기까지 하셨으면서.”
알버트가 후 숨을 내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널 살린 이인 걸 어쩌겠니.”
내게 눈을 흘기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화난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쩌면 이번 여행이 그와 하양이의 사이를 더 좋게 만들어줄 기회가 되지 않을까?
예감이 좋았다.
“그러니까요. 하양이도 지금 데려오는 것은 어떨까요? 셋이서 이야기 나눈 지도 오래됐는데.”
알버트의 시선이 맞닿는 순간, 나는 배시시 웃었다. 그는 나를 부드러이 응시했다.
“그리 원한다면 부르거라.”
알버트는 침대 속으로 들어와 내 옆에 앉으며 대꾸했다. 알버트가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는 모습이 익숙해졌다.
같은 공간에서, 이 남자와 함께 생활하는 것이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옆에 앉은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댄 나는 머릿속 텔레파시로 하양이를 불렀다.
[하양아, 알버트하고 같이 휴가 계획을 세워볼까 하는데.]
[진짜?]
호들갑을 떨며 답한 하양이는 금세 창문을 넘어 들어왔다. 하양이가 나와 알버트에게 손을 흔들었다.
“알버트!”
“…그래.”
성의 없는 대꾸였지만 예전보다 훨씬 나아졌다. 예전의 대답이 겨울바람이었다면 지금은 봄바람에 가까운 답이었다.
“우리 여행 계획을 세우려고.”
“진짜? 너무너무 좋다.”
하양이가 해맑은 얼굴을 하며 웃었다.
“나는 바다에 가서 몸을 담가보고 싶어.”
“꼭 그게 아니라도 해변에서 햇볕을 쬐는 것만으로도 좋지.”
자신이 하고 싶은 걸 늘어놓는 모습에 생기가 돌았다.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하면 새삼스러웠다.
우리 셋은 대화 속에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바닷가에 가서 하고 싶은 일을 비롯해서 먹고 싶은 음식까지, 이야기는 쉴새 없이 이어졌다.
“정인이 해줬던 음식도 다시 먹고 싶어. 그게 제일 맛있어.”
“진짜? 최고의 칭찬인걸.”
서이나도 있는 판에 아직까지 하양이의 입맛이 내게 길들여져 있다는 것이 머쓱하면서도 기분 좋았다.
그만큼 나를 아끼고 위해주는 것이 보이니까.
옆에서 나와 하양이의 대화를 듣던 알버트가 덧붙였다.
“바닷가에 가는 김에 네 영지에도 며칠 머물면 좋겠구나. 이미 명의는 네 앞으로 넘겨두었거든.”
“진짜 빠르다….”
본래 로제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던 영지는 어느새 유정인이라는 이름 밑에 있었다.
이럴 때도 알버트의 일 처리는 대단했다. 나랑 있는 시간을 생각하면 정사를 돌보지 않는 폭군이라 해도 무방한데….
이 정도는 되어야 남주인공이 될 수 있는 건가.
이래서 나는 소시민인지도 몰라.
신분도 생겼다. 애초에 드래곤의 계약자를 환영하지 않는 곳을 찾는 게 더 어려울 테지만.
건물주… 아니, 영주의 꿈을 드디어 현실화시키는구나.
현대에서는 월세에 벌벌 떨었을지 몰라도 여기서는 다르다고!
내려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들떴다.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알버트는 문득 생각난 듯 나지막이 말했다.
“슈버트. 이만 돌아가거라.”
나는 알버트의 손을 꼭 잡았다.
“아주 옳은 선택이었어요.”
알버트가 픽 웃었다.
“네가 내 옆에 적어도 일 년은 붙어 있어야 할 텐데.”
“그거야 저한테도 좋은 일인데. 사랑하는 사람 곁에 있는 게 싫을 리가 있나요.”
“능청은. 그러니 오랜만에 듣고 싶은 말이 생각나는구나.”
알버트가 눈을 흘기다 중얼거렸다. 뭘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그를 따라 입꼬리를 올렸다.
“왕자님, 오늘도 어김없이 잘생기셨네요.”
내가 말을 뱉자 하양이도 눈을 굴리며 눈치를 살피다 따라 했다.
“알버트, 잘생겼어.”
“네가 따라 할 필요는 없었는데.”
“…듣는 게 기분 좋아 보이길래. 역시 이런 건 반려 한정이구나.”
“눈치가 있군.”
“칭찬 고마워.”
하양이가 빙긋 웃었다.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너무 좋다.
“그럼 휴가 이야기를 더 해볼까요?”
“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알버트가 말을 이으며 나를 부드럽게 껴안았다.
그의 손을 잡은 나는 밤새도록 우리의 미래를 떠들었다. 그
리고 아침이 다 되어서야 겨우 잠에 들었다. 알버트와 하양이는 그때까지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소파에 앉은 하양이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알버트의 얼굴은 편해 보였다. 하양이도 마찬가지였다.
셋이서 편안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순간이 좋다.
가슴 뻐근히 차드는 감정이, 내가 살아 있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귓가에 노랫소리처럼 울리는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목소리. 적당히 시원한 바람과 푹신한 침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건, 지금을 위해서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