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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137화 (137/156)

137화.

사람들의 발에 입을 맞추는 알버트를 본 날, 로제 아티어스는 사랑에 빠졌다.

예프넨 후작의 잔혹성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 그 앞에서 고개를 더 깊게 숙이며 복종하기 바빴다.

저 자신이 혐오스러워도 어쩔 수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알버트 그레이는 달랐다.

자신과 다름없이 인간성이 짓밟히던 순간에도 그 남자는 고고했다.

그의 모든 행동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저 잘생긴 사람이어서가 아니었다. 그의 행동이, 태도가 그를 더 빛나게 했다.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왕자님 같았다.

‘저런 사람이 날 사랑해 줬으면 좋겠어.’

그녀는 길거리에 버려졌던 동화 속 사랑 이야기를 생각했다.

저렇게 아름다운 왕자가 평민 소녀를 사랑하여 챙겨주고 함께 살며 행복해지는 이야기였다.

로제 아티어스는 행복해지고 싶었다.

예프넨 후작의 연회에서 삶에 새로운 이정표가 생긴 사람은 슈버트와 리암, 메르시뿐만이 아니었다.

그날은 로제 아티어스의 인생에도 큰 전환점이 되었다.

알버트 그레이를 향한 지독한 짝사랑이 시작된 날이었으니까.

사랑을 깨닫게 되었다고 해서 로제의 인생이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날 이후 알버트 그레이는 만날 수 없었으니까.

예프넨 후작의 학대 아래 있는 그녀가 가까워지기에 알버트는 너무 먼 사람이었다.

로제는 흑마법을 배웠다. 그녀의 스승은 거의 죽을 때가 된 30대 남자였다.

흑마법을 쓰면서 줄어든 수명 때문에 죽을 날이 오늘내일하는 초라한 흑마법사는 돈 때문에 예프넨 후작의 명을 따라주고 있었다.

어쨌든 그는 자신이 거의 사라진 흑마법사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로제에게 흑마법을 가르치며 흑마법이 얼마나 숭고하고 대단한 것인지에 대해 세뇌하듯 말했다.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마법이라니 멋지잖아?”

매번 로제에게 흑마법을 가르치며 그는 그렇게 말했다.

로제는 흑마법을 배웠다. 로제는 생각보다 재능이 있었다.

예프넨 후작이 조달하는 돈으로 그녀의 스승은 사치를 즐겼다. 로제는 묵묵히 공부했다.

맞지 않기 위해서.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다 보면 이곳을 나갈 수 있는 힘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있었다.

‘그러면 다시 왕자님을 만날 거야.’

그녀의 삶의 유일한 이유. 로제 아티어스의 삶에 알버트 그레이는 고통스러운 일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힘이었다.

딱 한 번, 스승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예프넨 후작에게는 감히 하지 못할 질문이었다.

스승에게도 털어놓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 주위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스승밖에 없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스승님, 제가 원하는 사람이 저를 사랑하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모르겠는데. 그리고 네가 사랑이라니 웃기지도 않는군. 이렇게 보잘것없는 어린애를 누가 사랑해?”

자신의 진지한 고민을 스승은 깔깔 웃으며 받아넘겼다.

그저 장난으로 치부하는 거였지만 부정당한 진심 때문에 마음에 상처가 났다.

정신적인 고통은 육체적인 것과 다르게 힘들었다. 그날 밤 로제는 밤새도록 울었다.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스승은 자신을 사랑하지도 아끼지도 않았다.

그리고 로제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로제는 자신이 예프넨 후작의 마력을 위해 산 채로 제물로 바쳐질 것을 깨달았다.

로제는 도망쳤다. 예프넨 후작의 눈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을과 마을을 전전하며 지냈다.

예프넨 후작의 망을 벗어나 다른 나라에 가는 게 좋을까 생각도 했지만 로제는 알버트를 떨쳐내지 못했다.

첫사랑이 안겨준 기억의 희열은 너무 강렬했다.

알버트가 왕자로 책봉되었다는 말이 퍼졌을 때, 로제는 결국 하녀가 되어 궁으로 들어갔다.

예프넨 후작과 마주칠 수 있다는 위험이 있었지만, 알버트를 다시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멀리서 보기만 해도 좋을 줄만 알았다. 하지만 멀리서 알버트를 보는 일이 늘어날수록 욕심은 커졌다.

흑마법은 여전히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로제는 로스투라투가 알버트를 못마땅히 여기는 것을 알았다. 이대로 가면 알버트의 자리가 위험하다는 것도.

…그러면 나랑 같이 있으면 되지 않을까?

선량한 왕자님은 힘이 없지만, 자신에게는 흑마법이 있다.

다른 귀족들이 있는 곳은 위험하다. 아직 자신의 왕자님을 못마땅히 여기는 이들도 많았다.

…왕자님 곁에 더 가까이 있고 싶어.

왕자님도 나를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

나도 사랑받고 싶어.

…물론 알버트를 안전하게 만드는 방법 중에는 그를 왕 자리에 더 빠르게 올리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로제는 불안했다. 지금도 알버트 그레이의 곁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가 왕이 되면 그녀에게서 더 멀어질 것이다.

그리고 헤어졌던 옛날처럼, 영영 볼 수 없게 되겠지.

‘그건 싫어.’

로제는 알버트가 자신을 사랑해 주길 원했다.

결국 그녀는 흑마법을 이용해 로스투라투의 정신을 조작했고, 알버트와 탑에 갇히는 데 성공했다.

같은 공간에서 매일매일을 같이 보내면, 분명 알버트도 자신을 사랑해 줄 것이라 믿었다.

사랑은 그런 것이지 않은가.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 건 함께 있으면 가능하겠지. 하지만 알버트는 자신 같은 하녀는 거들떠도 보지 않을 테니 계기가 필요했다.

계약서와 지팡이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사랑에 무지했기에, 열심히 고민한 결과였다.

어릴 적 계속된 학대와 제대로 된 인간관계조차 맺지 못했던 로제의 사고는 이미 비뚤어져 있었다.

그녀에게 남은 건 어릴 적 보았던 동화의 파편이 전부였다.

왕자와 여주인공은 모든 역경을 딛고 사랑하게 된다.

로제는 자신이 역경을 딛고 일어선 것처럼 알버트도 힘든 시간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은 알버트를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둘은 더 좋은 짝이었다. 옛날에 봤던 동화와 같은 해피엔딩이 될 테니까.

“…라고 믿었지.”

텅 빈 감옥 안에 혼자 남은 로제가 허탈하게 천장을 보았다. 방금 전까지 고문에 시달린 몸에는 감각이 없었다.

그녀의 몸 곳곳에 피가 넘쳐 흘렀다. 정인이 돌아간 이후 알버트가 해놓은 짓이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몇 번 기절하고 다시 일어나길 반복했다. 자신을 보는 눈은 차가웠다.

그녀는 알버트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어릴 적 보았던 고고한 모습은 그대로였지만 한 가지가 달랐다.

“버러지 같은 것이.”

자신을 보는 알버트 그레이의 눈빛에는 증오가 섞여 있었다.

스승과 마찬가지로 알버트 그레이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

“하하….”

언젠가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제 자신이 어리석었다.

제 삶에도 구원자가 있을 거라고 믿었던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어리석은 짓이었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조차 특혜라는 것을 그 여자는 알고 있을까. 아니, 모를 거다.

사랑받은 티가 딱 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 여자가 사라지면 알버트를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알버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존재는 자신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모든 것이 어그러졌다.

알버트 그레이는 행복할 것이다.

자신이 없는 삶 속에서 계속.

마지막으로 붙들고 있던 희망마저 사라졌다. 아무도 그녀를 사랑해 주지 않는다.

‘나는 평생 보잘것없는 쓰레기 로제 아티어스겠지.’

애초에 자신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애초에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고통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는데.

저에게 부질없던 희망을 붙잡고 살지 않아도 되었는데.

모든 건 로제 아티어스가 살아서, 이 세상에 존재해서 벌어진 일이다.

엉금엉금 기어 벽에 몸을 기댄 로제는 손가락을 덜덜 떨며 움직였다.

지쳤다.

사는 것이.

그저 존재하는 것이.

“…….”

입술을 꾹 깨문 로제 아티어스는 제 남은 수명을 끌어모은 최후의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여자는 분명, 자신의 존재가 둘을 이어주었다고 말했다.

그 말이 맞다. 애초에 자신이 탑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알버트와 그 여자가 만날 일도 없었을 테니까.

동화에 항상 해피엔딩만 있는 것은 아니지. 배드 엔딩도 있어야 하는 법이다.

로제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

남은 생을 모조리 바친 마법진은 정인을 소멸시키기 위해 그렸던 것보다 훨씬 강력했다.

마법사를 위한 감옥 속에서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그녀의 손이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로제 아티어스의 존재를 사라지게 만들 최후의 소멸 마법진을.

‘당신들이 정말로 사랑한다면, 내 존재 없이도 만날 수 있겠지.’

그 정도면,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

아스라이 웃는 모습은 여전히 서글펐다.

마법진이 완성되었다.

로제 아티어스의 존재가 세상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

나는 후련한 마음으로 방에 돌아갔다. 로제에게 하고 싶은 말도 다 했고 그녀가 절망에 빠져 우는 모습도 보았다.

내가 할 수 있는 복수는 끝났다. 나머지는 알버트의 영역이었다.

나를 고통받게 한 로제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 좋기만 할 줄 알았는데, 마음 한구석이 다소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내 삶에 구원자는 없었으니까.”

로제의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알버트의 삶의 구원자였고, 알버트는 내 삶의 구원자였다.

나는 하양이가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하양이는 나를 구했다.

어릴 적 알버트를 구했으면서, 로제를 건드리지 않은 게 마음에 걸리는 건…

모든 사람이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던 내가 외면한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그 하녀가 뭐라 했어…?”

내 옆에 앉아 있던 하양이가 걱정스레 물었다.

어제 샀던 슈트가 마음에 드는지 아직까지 입고 있었는데 그게 하양이와 기가 막히게 어울렸다.

“아니, 그럴 리가. 나한테 손끝 하나 댈 수 없는 사람인데.”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양이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문제 있으면 말해줘….”

이제 하양이가 날 챙길 줄도 안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하는 모습은 얼마나 믿음직한지! 동네 사람들, 우리 하양이가 이렇게 컸어요!

“그래서 우리 여행은 언제 가? 나 바다 보고 싶은데….”

하양이가 눈을 반짝였다.

“그러게. 다음 주에 다녀올까?”

“응, 알버트도 데리고 가. 안 데리고 가면 슬퍼해.”

하양이가 먼저 알버트를 언급하다니.

“이제 우리 이름도 부르는 사이야.”

기분 좋게 말하는 하양이는 잔뜩 신이 나 있었다.

“그래, 그러자.”

저 멀리 알버트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가 나를 보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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