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136화 (136/156)

136화.

로제 아티어스를 만나러 가게 된 날 아침, 준비를 마친 나는 나를 만나러 온 레오나와 인사를 나눴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리 생각해 주니 고마워요.”

내가 없는 사이, 레오나는 임시 기사단장에서 실질적인 업무를 도맡아 하는 진정한 기사단장이 되었다.

로스투라투의 휘하 아래 있었고 반란 중에 죽었던 이글 기사단장의 뒤를 이어 들어간 자리를 훌륭히 소화해 낸 것이다.

“그럼 가자꾸나.”

준비를 다 마친 알버트도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그의 손을 맞잡자 레오나는 우리 뒤에 서며 적당한 거리를 두었다.

이윽고 감옥에 도착한 나는 어제 산 보석을 쫙 두른 메르시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로제 아티어스를 발견했다.

창살이 나 있는 감옥 옆으로는 문이 있었다.

“내가 허하는 선은 여기까지란다.”

알버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쇠창살 앞에 섰다. 로제 옆에 턱을 괸채 서 있던 메르시가 손을 흔들었다.

“언니, 왔어요?”

어제 죽어가던 모습은 더 이상 없었다. 쇼핑이 정말 그녀의 활력소였던 모양이다.

이렇게라도 기운 차렸으니 다행이다.

겉으로 보기에 로제의 몸에서 망가진 곳은 없어 보였다. 내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똑같았다.

어깨를 약간 넘는 맑은 갈색 머리카락에 연갈색 눈동자.

비록 눈에 초점은 없었지만, 평온한 모습에서는 내가 보았던 로제의 어릴 적 모습도 좀 겹쳐 보였다.

놀랐다. 내게 더 이상 필요 없는 육체가 되었다는 말을 들은 후에 고문을 했을 법도 한데, 너무 멀쩡해 보여서.

“네가 볼 때 시각적으로 고통받을 이유는 없지 않느냐. 넌 피를 싫어하니까.”

용케 내 의문을 알아챈 알버트가 대답했다.

하긴, 피칠갑을 한 로제와 이야기를 하는 건 힘들었을 것 같았다.

“그럼 제가 미리 이야기한 요리를 먹이는 것으로 할까요.”

메르시는 시종에게서 내가 서이나에게 부탁한 수프를 전달 받았다.

죽과 같은 음식은 정신이 없는 로제에게도 먹이기 수월한 것이었다.

나와 로제가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할 기회를 마련해 주는 것이기도 했고.

환상을 보는 로제의 정신은 다른 곳에 가 있었지만 몸은 입속으로 들어오는 수프를 꿀꺽 삼켰다.

덕분에 먹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수프 먹이는 일을 마친 메르시는 숨을 내쉰 후 그녀에게 중얼거렸다.

“아티어스, 환상에서 깨어날 시간이야.”

메르시의 손가락이 서로 맞닿으며 딱 소리를 내는 순간, 초점이 없던 로제의 눈이 생기를 되찾았다.

로제 아티어스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주위를 살폈다.

머지않아 그녀는 이곳이 감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웃었다.

“하하… 아직도 못 찾았지?”

그녀의 눈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알버트였다.

옆에 서 있는 나를 순간 바라보기는 했지만 금세 내게서 신경을 껐다.

그녀의 세상에 존재하는 건 알버트뿐인 것이다.

그녀는 내 영혼을 보지 못하니,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기 때문에.

사람을 죽이려 해놓고 어떻게 저렇게 웃을 수 있나. 나는 주먹을 꽉 쥐고 웃었다.

“못 찾기는, 바로 앞에 있는데도 못 알아보는 멍청이가 여기 있는데.”

“…뭐?”

내 신랄한 말투에 로제가 드디어 나를 응시했다. 나는 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반말로 대꾸했다.

“로제 아티어스, 당신이 죽이려 했던 영혼이 나야.”

“…거짓말하지 마. 나는 분명 마법진을 그렸고 흑마법진은 꼭 원하는 바를 이뤄.”

“당신 마법은 실패했어.”

“…흑마법이 실패했다고?”

로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쇠창살을 잡은 그녀는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관찰했다.

한때 내가 빙의했던 몸이 이렇게까지 추락한 모습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나는 속으로 숨을 내쉬며 마음을 정돈했다.

“거짓말하지 마. 다른 사람 데려와서 현실을 꾸미는 건 쉬운 일이지. 왕자님이 드디어 현실을 부정하기 시작하신-”

여전히 환상에 갇혀 있는 듯한 호칭이 거슬렸던 나는 로제의 말을 끊었다.

“당신이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거겠지. 나를 죽이려 들었으니까.”

나는 손을 들어 문양이 새겨진 손등을 보였다.

나와 하양이의 계약이 담긴 문양은 영혼으로 연결된 것으로 나, 유정인에게만 존재하는 것이다.

즉 로제는 이걸 보고 내가 나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소리였다.

방금 전까지 알버트를 보며 웃던 얼굴에 미소가 서서히 걷히고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본래 이럴 때는 살살 속을 긁는 게 최고인 법이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생각에 잠긴 척을 했다.

“어쩌면 로제 당신에게는 고마워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당신 덕분에 알버트를 만나고, 살릴 수 있었으니까.”

“…무슨 소리야?”

“당신의 저주가 나와 알버트를 이어주었다는 소리야.”

그녀는 나를 싫어한다. 알버트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로제는 자신이 사랑받을 수 없다면, 알버트가 불행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알버트의 불행을 원하며 행했던 일들이 오히려 그를 행복으로 이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당신이 알버트를 행복하게 만들어줬다는 말이기도 하고.”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당연하겠지.

“그리고 그는 앞으로도 계속 행복할 거야.”

입술을 짓씹는 얼굴에 절망이 어렸다.

맨 처음 나를 제 몸에서 밀어내고 환희에 찬 미소를 짓던 모습과 전혀 상반되는 얼굴이었다.

“아냐, 마법진을 다시 그리면….”

내게서 등을 돌린 로제는 재빨리 구석으로 달아났다. 그리고 손톱 끝으로 제 살을 찌르며 피를 내려 애썼다.

메르시와 알버트는 담담한 얼굴로 로제의 발악을 바라볼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원한다면 칼을 주지.”

메르시의 말에 오히려 내가 놀랐다.

그녀의 충동적인 행동인가 싶었는데, 옆에 알버트의 모습을 보니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수순인 듯 보였다.

로제의 행동을 예측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으니까.

“주거라.”

알버트의 말에 로제에게 칼이 건네졌다.

끝이 다소 뭉툭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피 정도는 낼 수 있는 것이었다.

로제는 이 상황이 이상하다 느끼지도 못하는 모양이다.

내가 한 말에 이미 혼이 나간 지 오래였다. 그녀는 재빠르게 손가락을 찔러 피를 냈다.

그리고 정신없이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팔짱을 낀 알버트는 그 모습을 보며 낮게 뇌까렸다.

“희망을 준 만큼, 더 발악해 보란 말이다.”

마법진이 그려졌다. 하지만 마법은 발동되지 않았다.

“…이게 무슨.”

메르시가 횡설수설하기 시작한 로제를 보며 피식 웃었다.

“여기 있는 누구에게도 네 마법은 통하지 않아. 폐하 주위에 있는 자라면 그 누구라도.”

이곳이 그저 마법사를 위한 감옥이어서가 아니었다.

알버트는 로제가 자신의 남은 목숨을 다해서라도 나나 그, 혹은 우리 주위 사람들을 저주할까 걱정했다.

그리하여 그는 그가 가진 모든 힘을 쏟아부은 궁극의 마법진을 완성했다.

성체 드래곤 계약자에 맞먹을 힘과 비상한 두뇌는 흑마법을 상쇄할 만한 방어 마법진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 마법진이 단시간에 만들어졌던 것은 아니다.

알버트는 강력한 마법사였음에도 불구하고 로제의 흑마법에 허무하게 당해야 했던 옛날의 기억을 한 번도 잊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상황을 대비해 그는 흑마법을 파훼할 수 있는 마법진을 만들기 위해 애썼고, 결국 성공한 것이다.

타고난 마력과 마법진을 만드는 것은 서로 다른 영역이다. 알버트에게는 이조차도 상관이 없었다.

드래곤의 계약자가 아닌 순수한 인간의 힘이 이렇게 대단할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마법진 창조는 나도 아직 발을 담그지 못한 영역이기 때문에.

모든 마법진을 이해하고 쓸 줄 알게 된 것과 전혀 새로운 마법진을 창조해 내는 것은 다르니까.

물론 이는 현재 로제의 흑마법에 준하는 것으로, 미래는 어찌 될지 모르는 만큼 그녀의 죽음은 여전히 피할 수 없는 선택지였다.

자신이 쓸 수 있는 유일한 패까지 사라진 로제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 앞으로 다가섰다.

“너무 다가가시면 위험합니다.”

옆에 있던 레오나가 나를 적당히 저지했다. 나는 빨개진 얼굴의 로제를 응시했다.

내가 그녀의 몸에 있을 때도 운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로제의 행동은 절대로 정당화되지 않는다.

그녀의 행동에 피해 본 사람으로서 더더욱. 나를 죽이려 했던 사람이다.

동정에 가까운 감정이 드는 것은 그저 그녀가 나와 내 주위 사람들에게 아무런 해도 가하지 못한 ‘현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로제의 어린 시절을 보았다.

그녀의 유년 시절이 예프넨 후작에게서 시작되었다는 것도 안다.

“로제, 난 당신이 불쌍해.”

멍하니 초점을 잃은 로제의 눈동자가 깜빡였다.

“당신은 알버트를 사랑하는 게 아니니까.”

“내 감정을 무시하는 거야? 당신이 뭘 안다고.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자신의 감정이 부정당하는 순간, 로제는 다시 불타올랐다.

그녀는 내가 하는 말에 쉽게 열 받고 화를 냈다. 마치 감정을 제대로 조절할 줄 모르는 아이처럼.

저주도 마찬가지였다. 나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모습에도 불구하고 로제의 정신연령은 어린애에 견줄 정도로 어렸다.

“사랑한다면서, 왜 알버트를 파괴하려 들었지?”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로제의 삶은 분명 불우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항상 그런 선택지만 있었던 것을 아닐 터였다.

궁에서 하녀로 일하고 있었다면, 그때도 기회가 있었고 내가 그녀의 몸에 빙의했을 때도 새로운 삶을 살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로제는 매번 자신의 앞에 주어진 기회를 버리고 무시했다.

“어리석은 짓이었어.”

서이나가 준 음식이 효과가 정말 있다면, 로제는 지금 질문에 진심으로 답할 것이다.

내 말에 자조적으로 웃은 로제가 중얼거렸다.

“…내가 아는 건 그런 방법밖에 없었으니까.”

이야기를 하는 여자의 눈은 지독히 지쳐 있었다.

“내 삶에 구원자는 없었으니까.”

짓씹듯 중얼거리는 목소리에는 울음이 섞여 있었다.

“내가 이상한 거 안다고 뭐가 달라져? 내가 새사람이 된다고 해서 뭐가 달라져.”

“…….”

“나는 여전히 추악한 흑마법사인데.”

삶의 마지막을 앞에 둔 로제는 제 몸 깊숙이 숨겨두었던 진심을 토해냈다.

“나도 그냥 행복해지고 싶었어.”

로제가 온몸을 들썩이며 무너졌다.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