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135화 (135/156)

135화.

나는 오랜만에 크로엘을 마주했다. 물론 크로엘의 입장에서는 나를 처음 보는 거였지만.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정인 님.”

하지만 그녀의 인사는 처음과 다를 바가 없었다. 적당히 예의를 차리며 짓는 자신만만한 미소와 태도가.

다르지 않은 모습이 나는 마음에 들었다.

위풍당당한 키와 독특한 감각으로 차려입은 옷이 잘 어울리는 크로엘을 보니 이곳에 처음 왔을 때가 생각났다.

“드래곤의 계약자를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녀의 첫말이 나를 실제로 지칭하는 말인 것도 좋다.

황제의 연인이 아닌, 나 정인이 인정받을 수 있는 위치가 된 것이 새삼스레 느껴지니까.

“원하시는 드레스를 몰라서 이곳에서 제공할 수 있는 원단과 드레스 디자인은 전부 준비해 두었습니다.”

스케일도 여전하다.

“그럼 안내하겠습니다.”

크로엘이 나를 보며 진하게 웃었다.

낯선 이에게 보내기에는 꽤 진한 호감인 듯한데, 왜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방 안에 들어선 나는 뜻밖의 손님을 맞이했다.

“…오랜만입니다.”

경어를 쓰고 나를 맞이하는 사람은, 전보다 몸이 좋아진 것 같은 레오나였다.

그녀의 근육을 적당히 부각하는 슈트를 입고 있는 모습은 직접 조각한 듯 아름다웠다.

생각지도 못한 손님에 기뻤다. 하지만 나를 아는 듯한 레오나의 말에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로제 아티어스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나? 지금 레오나의 말은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알버트나 다른 인물들이 이 비밀을 쉬이 털어놓을 사람도 아니고.

메르시를 향해 해명을 바라듯 고개를 드니 메르시가 답했다.

“언니가 원래 로제의 몸에 있었다는 것을 아는 유일한 인물이에요.”

“…어째서요?”

“우선 레오나의 인사부터 받아주는 게 어때요? 안 그러면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을 텐데.”

나는 그제야 레오나가 인사하며 숙인 고개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음, 저도 오랜만이에요.”

고개를 든 그녀와 내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올곧고 맑은 눈동자였다.

옆에서 메르시의 목소리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로제 아티어스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을 수상히 생각했던 유일한 인물이어서 어쩔 수 없었어요. 자기 목숨을 바쳐서라도 파고들 기세였던지라.”

로제를 감옥에 가둔 후, 알버트는 그녀에 대한 소문과 이야기를 조금씩 지워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로제의 존재를 사람들에게서 없애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러면서 슈버트에게 로제 아티어스가 흑마법사였다는 증거는 착실히 찾도록 했다. 이조차도 큰 소득은 없었지만.

“제가 옳지 않다 생각하면 따르지 않는지라. 언니는 언제나 제 똥고집이 강하다 말하곤 했습니다.”

레오나가 놀라 눈을 깜빡이는 나를 보며 변명했다. 그녀의 성격이 내게까지 전해져 오는 듯했다.

“그래서 내가 레오나를 포섭하려 한 거라니까. 오랜만이네요, 이글 기사단장.”

“예프넨 남작.”

“슈버트라 부르라니까.”

이야기에 끼어든 슈버트가 레오나와 인사를 나눈 후 투덜거렸다.

메르시는 두 사람을 보며 피식 웃다 말을 이었다.

“레오나가 골칫거리였어요. 본래 언니의 영혼을 찾으면 로제 아티어스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잔인하게 죽이고….”

내가 영혼에서 사람의 모습을 되찾지 못했다면 일어났을 일.

알버트가 이를 어떻게 대비했는지 듣는 건 처음이었다.

“남은 육체에 바로 언니의 영혼을 불어넣어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게 해줄 거였거든요.”

사람들 앞에서 공개 처형을 하는 것은 그저 로제를 향한 복수심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다.

로제가 죽는 모습을 직접 본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녀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나타나더라도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저 비슷하게 생긴 인물이구나, 느낄 뿐. 알버트는 이 허점을 노렸던 거다.

원래 비천했던 로제 아티어스의 태생을 아는 사람들이나, 갑자기 나타나 영지를 받은 일반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사람들은 그녀가 사라지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로제 아티어스의 인간관계가 협소해서 가능했던 일이라 볼 수도 있었다.

그런데 레오나가 들고 일어선 것이다.

그녀는 갑자기 지워지는 로제 아티어스의 흔적을 수상히 여기고 자꾸 캐려 들었다.

몇 번 슈버트가 암살자로서 얼굴을 가린 채 찾아가 협박도 해봤고 메르시도 막으려 들었지만 그녀는 굴하지 않았다.

나는 이게 좀 신기했다. 나와 레오나는 만난 지 몇 번 되지도 않던 사이였기 때문에.

“레오나는 왜 그렇게 로제 아티어스에 대해 궁금해했던 건가요?”

존경받을 만한 기사단장. 나는 그녀를 우러러보며 물었다.

레오나는 내 부담스러울 만큼 반짝이는 눈빛에 머리 뒤쪽을 긁적거리더니 헛기침을 하며 대꾸했다.

“드래곤 계약자님께 칭찬받을 만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럴 리가요.”

내가 단호히 부정하자 피식 웃은 레오나가 말을 이었다.

“아직 잘 모른다고, 그냥 보낼 수는 없었습니다. 나를 인정해 준 사람이기도 했으니 도와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요.”

“인정이라면….”

“감옥에서 빠져나오면서 한 대화 말입니다.”

레오나라는 사람 자체가 정말 멋있어서 한 말이 기억에 남았던 모양이다.

역시 사람은 착하고 볼 일이다. 말 한마디가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에 틀린 게 없다.

“그저 그랬을 뿐입니다.”

레오나가 딱딱한 어조로 중얼거리며 내 시선을 회피했다.

내 위치가 달라져 대하는 말투는 달라졌지만, 그녀의 태도는 똑같았다. 올곧고 바른 모습.

레오나나 크로엘이나 멋있는 사람들이라니까.

“저를 찾아줘서 고마워요, 레오나.”

“아닙니다. 이제는 곁에서 항상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레오나가 내 앞에 무릎을 꿇으며 진지하게 답했다.

응? 곁에서?

뭔가 말이 이상한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슈버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당분간 네 호위기사야.”

“…기사단장이 호위기사 하는 건 너무 수지 타산이 안 맞는 일 아냐? 아까 들으니 이글 기사단의 단장이라며!”

훌륭한 기사단장이 된 줄 알고 기뻐했는데 갑자기 내 호위기사라니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

“레오나, 혹시 협박이나 압박이라도 당한 거예요? 만일 문제가 있었다면 당근을 흔들어주세요.”

내가 진지하게 묻자 레오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드래곤 계약자를 호위하는 건 기사로서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인걸요. 그리고 이번 로제 아티어스의 참형이 끝나기 전까지만이니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그런데 당근은 왜 흔드는 건가요? 레오나의 말에 나는 튀어나와 버린 드립을 주섬주섬 담았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쨌든 로제 아티어스의 참형이 조만간 진행될 거란 말이죠.”

“네, 이틀 후에요.”

이틀이라면 내가 로제와 이야기를 나누고 난 뒤다.

로제에 대한 이야기는 알버트와 하지 않는 편이라 몰랐다.

아마 알버트라면 내일, 로제를 만나고 온 후에 알려줬었겠지.

굳이 미리 알려줄 필요 없는 사안이기도 하고. 일 처리는 정말 칼 같은 사람이라니까.

로제와 이야기할 때 알버트가 가장 걱정하는 건 그녀가 나를 다시 해하면 어쩌나 하는 거겠지.

이에 관한 안전장치를 분명 해두었을 텐데, 이게 과연 뭘까. 그를 믿기에 불안하지는 않지만 궁금하긴 했다.

더 물으려는데 메르시가 고개를 휘휘 저으며 결연한 얼굴을 했다.

“이제 일 이야기는 그만해요. 원래 밖에 나왔을 때는 즐기는 거예요.”

이미 자리에 앉아 그녀 이름으로 적힌 종이 더미를 살피며 행복해하고 있던 메르시가 덧붙였다.

“언니도 얼른 골라요. 화이트 드래곤도, 블루 드래곤도. 내가 남자 옷 카탈로그도 싹쓸이했으니까.”

메르시가 손뼉을 짝짝 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그녀는 소파에 차례대로 앉은 나와 하양이, 알렉산더 그리고 슈버트에게까지 카탈로그를 건네주었다.

바야흐로 우리의 돈x랄이 시작되었다.

***

크로엘의 숍은 수도에서도 비싸기로 소문난 곳이다.

드레스 한 벌 가격이 집 한 채와 맞먹는다 할 정도로 고가였다.

그만큼 화려하고 비싼 장식이 아낌없이 들어간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우리는 한 사람당 옷을 20벌씩 주문했다.

이곳을 방문한 사람은 메르시, 나, 하양이, 알렉산더, 그리고 슈버트까지 합해서 100벌.

“…미쳤어.”

오로지 내게만 맞춘 고가의 드레스를 20벌이나 사다니.

내가 아무리 돈이 많아졌다 해도 아직 마음은 소시민이라 그런지 돈을 쓰는 게 덜덜 떨렸다.

“자, 이브닝드레스 20벌이니까 잠옷도 20벌 주문해야죠.”

메르시의 소비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브닝드레스가 있는데 티파티 드레스가 없을 수는 없지. 이것도 20벌.”

…결국 우리는 한 사람당 옷을 100벌씩 주문하고 나서야 숍을 나설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돈을 쓰면 쓸수록 메르시의 얼굴이 한층 개운해졌다는 거였다.

우리는 즐겁게 크로엘의 가게를 나왔다.

하양이와 알렉산더, 그리고 슈버트는 크로엘이 준 슈트로 쫙 빼입은 채 우리 뒤를 따랐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자, 다음은 보석 가게예요. 원하는 것은 모조리 골라요.”

보석 가게에 들어간 후 메르시는 자신의 눈에 닿는 것이면 뭐든 포장해 달라 말했다. 그 말은 내게도 포함되었다.

가게 주인은 황홀한 얼굴로 바삐 움직였다.

내 시선이 움직일 때마다 진열대에 놓여 있던 보석이 휙휙 사라졌다.

우리는 도둑이라도 된 양 3층 규모의 커다란 보석 가게를 싹쓸이했다. 불법이 아닌 합법으로.

“자, 다음 가게입니다. 여러분.”

쇼핑 관광을 온 듯한 기분으로 들어선 곳은 구두 가게였다.

한 사람당 100벌의 옷을 샀으니 100켤레의 구두를 맞추는 게 맞지 않느냐며 큰소리를 땅땅 치며 들어간 메르시는 구두를 신어보지도 않은 채 모조리 사들였다.

“자고로 거리 정도는 쓸어줘야 하는 법이지요….”

내 생각보다 마탑주의 물욕은 대단했다.

이게 귀족의 세계일까? 나는 신세계에 들어선 기분으로 메르시의 말을 따랐다.

“언니 눈이 닿는 것이라면 모조리 결제해 주세요.”

가방을 파는 가게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고.

“언니와 제가 숨 쉬는 공간에 있는 것이면 모조리 다 사들일 거예요.”

진정한 플렉스란 이런 것이구나.

나는 그저 어리석은 중생일 뿐이었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