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그녀의 힘은 어쩌면 내 마법보다 더 많은 사람의 마음을 다스릴 만한 잠재력이 있을지도 몰랐다.
사람의 의지와 관련된 부분은 아무리 강한 마법사라도 함부로 할 수 없다.
사람을 조종하거나, 죽음을 명하는 마법은 금지된 흑마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그마한 소망이라도 사람들에게 그럴 마음이 들게 하는 것은 대단한 거다.
“그리고 언니의 그 힘으로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그리고 그녀의 능력을 그대로 썩히기는 너무 아까웠다.
“음식을 만들어주세요.”
나는 그녀의 능력이 효과적으로 쓰일 수 있는 적절한 방안을 생각했다.
***
내가 서이나에게 부탁한 소망은, 요리를 먹은 사람이 내 말에 진실을 말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내 말을 듣고 멍한 얼굴을 하던 서이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손뼉을 딱 쳤다.
“두 분의 사랑을 응원해요.”
서이나는 결연한 얼굴로 중얼거리며 흔쾌히 음식을 만들어주겠다 했다.
아무래도 내가 음식을 알버트에게 쓸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착각에 사로잡힌 듯한 태도였지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요즘 알버트의 상태를 보면 더더욱.
나와 떨어져 있는 시간을 알버트는 극도로 기피했다. 내가 어디에 있든 간에 사람들을 붙였고.
…알버트에게 굳이 드러내지 않았지만 슈버트가 나를 감시, 아니 살피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양이가 먼저 알아차리고 내게 텔레파시를 보내준 덕이었다.
티는 내지 않았다.
슈버트는 내가 어디 있는지만 확인할 뿐, 되도록 사생활은 지켜주려 애썼고 이조차도 알버트가 내 곁에 없을 때뿐이었으니까.
이런 걸 보면 알버트의 정신 상태가 보이는 것처럼 여유롭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가 털어놓지 않을 뿐이다.
…그가 보이는 집착적이고 광기 어린 모습이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나는 그조차도 당신이라 받아들일 수 있는데.
알버트가 이를 모르는 것 같아 서운하다.
조금 더 기다리다가 안 되면 붙잡아놓고 진지하게 대화를 해야겠어.
사람은 자고로 대화가 필요하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대부분의 불화는 이 대화의 부재에서부터 비롯된다.
알버트 생각을 하면서도 몸은 착실히 서이나와의 약속을 위해 움직였다.
나는 그녀 앞에서 물, 불, 땅, 바람을 이용하는 온갖 마법을 보여주며 그녀의 호기심을 채워주었다.
“와아아!”
정말 아이처럼 기뻐하던 서이나 언니는 내가 그녀의 음식을 처음 먹고서 지었던 표정과 비슷한 얼굴을 하며 내 두손을 다시 한번 꼭 잡았다.
“필요하면 언제든 저를 찾아주세요, 정인 님.”
필요하면 언제든 부르라는 소리에 솔깃했다. 때는 지금이다. 나는 서이나에게 내 마음을 고백했다.
“사실 예전부터 서이나 씨를 제 전용 요리사로 채용하고 싶었어요.”
“전 이미 황궁 요리사인데요?”
하지만 황궁 요리사면 내가 원할 때 부르기가 힘들잖아. 황궁 소속이면 제약도 많을 테고.
나는 내가 원할 때 서이나를 호출해 원하는 음식을 만들어달라 할 수 있는 프리함을 원했다. 그럴 만한 재력도 있었고.
알버트에게 말하면 서이나를 바로 내 전담으로 바꿔줄 건 알았지만, 그에게 모든 것을 기대고 싶지는 않다.
나는 진지한 얼굴로 드라마 남주인공이나 할 법한 대사를 뱉었다.
“돈은 원하는 만큼 드릴게요.”
내 통장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는 몰라도, 황궁 요리사 월급보다 많이 줄 정도는 되겠지.
아니면 드래곤 계약자라는 위치를 이용해서 돈을 벌어도 되고….
“지금 받는 돈의 다섯 배.”
최후의 방법으로는 황후 앞으로 배정되는 돈을 서이나에게 쏟아부으면 되겠지.
자, 언니 어때요. 언니가 거절하기에는 너무 많은 돈-
“하지만 전 돈은 이미 넘칠 만큼 받고 있는걸요.”
이라 생각했는데 서이나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다.
이 자본주의 세상에서 돈으로 되지 않는 게 있다니.
결국 내 첫 번째 서이나 스카우트는 장렬히 실패했다.
***
로제 아티어스를 만나기 하루 전, 메르시가 내 방을 찾아왔다.
알버트가 아주 드물게 내 곁을 비우는 시간이었는데, 메르시는 아마 이를 노려서 찾아온 듯했다.
내 앞에 앉은 하양이와 함께 즐거운 티파티 시간을 즐기던 내 손을 덥석 붙잡은 메르시가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요즘은 내 손을 잡는 사람이 참 많다.
“언니, 살려주세요.”
여전히 그녀와 잘 어울리는 붉은 숏컷을 자랑하는 눈 밑에는 짙은 그늘이 져 있었다.
왜지? 나도 찾았겠다, 이제 알버트에게 시달릴 일은 없….
지 않구나. 응. 로제 아티어스가 남아 있으니까.
로제에게 통하는 환영 마법을 쓸 수 있는 메르시의 능력과 알버트의 성정을 생각하면 지금 메르시가 시달리고 있을 것도 이해가 갔다.
그녀를 향한 안타까운 마음이 차올랐다.
“제가 어떻게 살려드리면 되나요.”
메르시가 드디어 구원자를 만났다는 양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스트레스는 역시 돈으로 풀어야죠.”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메르시의 갈망이 강했던 탓일까, 내 손을 잡아 몸을 일으키는 악력이 꽤 셌다.
“화이트 드래곤. 당신도 일어나세요.”
“…나, 나도?”
나와 같이 앉아 한가로운 티파티를 즐기고 있던 하양이도 얼떨결에 일어섰다.
“언제까지 똑같은 옷만 입고 있을 거에요. 당신처럼 잘생긴 사람이 매일 옷을 바꿔 입지 않는 건 범죄야. 누구에게? 내 눈에게.”
예전에 호탕한 웃음은 어디로 가고 이렇게 드립을 날리게 된 걸까.
메르시와 단둘이서 대화를 나누는 건 이번이 오랜만이다.
그녀의 변화가 영구적인지 일시적인지 가늠하는 게 쉽지 않았다. 고민하던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메르시 지금 제정신 맞아요?”
내 말에 파하하 웃던 메르시가 웃음을 뚝 멈춘 후 진지하게 답했다.
“솔직하게 시인할게요. 일에 너무 시달려서 반쯤 미친 거 같아요.”
그게 누구 때문인지 아는 나로서는 숙연해졌다. 메르시, 내가 다 잘못했어요….
주먹을 꽉 쥔 메르시가 인생 포부라도 털어놓을 듯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오늘 돈은 폐하가 놀랄 만큼 써버릴 거예요. 좋아, 거기 같이 앉아 있는 블루 드래곤님도 갑시다.”
티파티에 낑겨 있던 알렉산더의 귀가 솔깃한 듯 움직였다.
“…뭐 하는데?”
“쇼핑이요. 슈버트, 너도 나와.”
메르시의 손이 까닥였다. 말투도 훨씬 거리낌 없어 보였다.
둘이 가까운 건 알았지만 이렇게 건들거리는 걸 보니 색달랐다.
하지만 주위는 잠잠했다. 슈버트가 잔뜩 놀랐을 게 여기까지 느껴졌다.
알버트가 준 비밀 임무를 수행하며 나를 돌보고 있는 건데 그걸 메르시가 까발려 버린 거니까.
메르시가 이렇게 말하면 나도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고.
그냥 넘어가나 싶었는데, 메르시가 다시 입을 움직였다.
“아, 빨리 나와. 휴가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너와 다르게 나는-”
“아, 진짜!”
결국 슈버트가 창문을 열어젖혔다.
“야, 나도 업무 수행 중이거든?”
“이것도 업무의 일부야.”
“이상한 소리 마. 정인 님, 이거는….”
슈버트는 짜게 식은 눈으로 대꾸한 후 내게 상황을 설명하려 애썼다.
“아뇨, 괜찮아요.”
“예?”
“대신 우리 오늘 메르시의 말을 따라주도록 해요.”
나는 메르시를 위한 조건으로 슈버트까지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그녀에게 있어 악덕 상사였을 알버트를 향한 메르시의 소소한 복수를 돕기 위해서였다.
아무래도 그녀 선에서 끌어들일 수 있는 사람은 최대한 모아서 돈을 쓰려는 모양이니까.
어차피 몇 사람이 펑펑 돈을 써봤자 황궁에 티끌만 한 타격밖에 주지 못하겠지만….
“맞아요. 오늘은 폐하가 쏘시는 거니까요.”
로제를 보고 싶다는 말로 메르시의 야근을 늘리는 데 일조했을 내 죄책감은 오늘 메르시가 무엇을 하든 따라주겠다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우리의 가게 털기가 시작되었다.
***
처음 우리가 향한 곳은 크로엘의 숍이었다.
충동적으로 나가는 듯하던 모습과 다르게 메르시는 오늘 자신이 크로엘의 숍을 하루종일 전세 냈다 소리치며 마차에서 나섰다.
나는 메르시의 뒤를 따라 마차에서 내렸다.
‘어…. 이건….’
그리고 크로엘의 숍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보며 데자뷰를 느꼈다.
“…저분이시래. 위태로웠던 폐하의 목숨을 구한 전설적인 드래곤 계약자가!”
“세상에, 백발 좀 봐. 너무 신비로워….”
로제의 일 말고도 알버트가 나를 위해 깔아주는 떡밥이 꽤 많았던 모양이다.
나를 보는 사람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그리고 알버트의 목숨을 구한 계약자는 또 뭐야. 맹세코 이 세계에서 알버트의 목숨을 위협할 만한 사람은 없을 텐데.
나를 높이기 위해 자신을 낮춘 모습이 지극히 그다우면서 어이가 없었다.
어쨌든 내가 드래곤의 계약자라는 사실은 두루두루 퍼진 모양이었다.
머뭇거리면서 날 보는 사람들의 시선에는 선망과 존경이 섞여 있었다.
로제 아티어스일 때와 상황이 전혀 달라졌다.
나는 그때와 다름없이 똑같은 성격과 성정을 지닌 사람인데.
사람의 위치와 능력이 이렇게 중요하다.
…로제 아티어스는 예전과 같은 시선이 더 익숙했겠지. 마음이 복잡해진다.
아냐, 그녀를 이해하려 들면 안 돼.
단호히 고개를 저은 나는 메르시의 뒤를 황급히 따라갔다.
“주위에 계신 분들은 또 어떻고. 매일 눈이 호강할 것 같은걸….”
그 와중에 아직 크게 떠들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귀를 관통했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라. 슬쩍 뒤를 본 나는 나란히 걷고 있는 하양이, 그리고 알렉산더와 시선이 마주쳤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하양이의 은발이 부드럽게 찰랑거렸고, 알렉산더의 파란 머리카락이 파도처럼 물결쳤다.
하양이가 따사로운 햇살이라면, 알버트는 청량한 바다였다.
탄성이 절로 나온다. 둘의 얼굴은 보는 것만으로도 복지였다. 둘뿐이랴.
“아씨, 내가 왜 이런 자리에….”
그 뒤를 따르는 슈버트의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저들이 한 말 중에 그건 인정한다.
알버트와 하양이, 알렉산더나 메르시, 리암, 그리고 슈버트까지… 매일 내 눈은 다시 오지 않을 호사를 누리고 있다.
멋있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건 언제나 재밌고 짜릿하다.
미인은 그런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