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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133화 (133/156)

133화.

“안 그래도 제 마법 문제로 정인 님께 드리고 싶었던 말이 있었어요.”

서이나는 이야기를 꺼낸 후 멈칫했다. 자신이 선을 넘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눈앞에 있는 여자가 자신과 같은 차원이동자라는 사실을 알고서 반갑기는 했지만 그녀와 자신은 서로 완전히 동떨어진 인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황제’의 정인이 아닌가.

서이나는 아직도 그날을 기억했다.

갑자기 다른 세계에 떨어졌을 때, 그녀는 생각보다 주위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본래 있던 세계에서도 현실에 이미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일은 열심히 했고, 요리도 즐거웠지만 자신을 위해 산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갈수록 오히려 제가 돈과 요리에 잡아먹히고 있는 듯한 기분까지 들었다.

사람들이 그녀를 알아갈수록, 그녀에게 더해지는 책임감이 무거웠다.

그저 요리가 하고 싶었을 뿐인데, 그녀는 너무 긴 길을 왔다. 유명세를 타며 자신을 쫓아다니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몇 번 그만하라 말한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네가 버는 돈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어디까지 수용해야 하나 고민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요리를 그만둘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요리는 그녀의 삶의 전부였다.

요리를 일로 삼을 수 없다면, 자신은 이제 뭐를 해야 하는가? 여전히 살아가야 하는데.

제 삶에는 변화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게 어떤 변화인지는 서이나도 아직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새로운 세계로 떨어진 건 고민에 한창 빠져 있을 때였다. 아무도 자신에 대해 몰랐다.

그 사실을 깨닫자 새로운 세계에 왔다는 두려움보다 안도감이 먼저 생겼다.

그녀에게 주어진 새로운 기회 같았다. 이곳에서 그녀는 어느 것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요리를 제외한 것들을 모두 해보았다. 하지만 뭔가 허했다. 결국 서이나는 다시 요리를 시작했다.

기묘하게도 이곳에는 한식 재료들이 모두 준비되어 있었다.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는 않았다 뿐이지, 한국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저 주류가 아닐 뿐이다.

‘한식이 주류가 아니라니.’

서이나의 기묘한 애국심이 불타올랐다. 결국 그녀는 새로운 사람들에게 한국 음식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머릿속에는 그녀 평생에 걸쳐 만들어낸 레시피들이 수두룩했다.

결국 서이나는 요리와 그녀는 떼어놓을 수 없는 사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확실히, 그녀를 모르는 사람들 틈에 있는 것은 좋았다.

그녀는 이곳에서 다소 기묘하지만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외국인일 뿐이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기묘한 나라에서 서이나는 편안함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서이나는 자신이 얼마나 잘난 인물인지 알고 있었다.

그녀의 요리는 점점 이곳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었고, 한국에서 그랬듯 같은 시간을 겪게 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던 차에 그 남자가 나타났다.

현실성 없는 외모에 고막을 녹일 듯한 목소리를 가진 남자.

짙은 눈썹에 붉은 눈을 반짝이는 남자는 나른하면서 날카로운 느낌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바깥소식에 그리 관심 없던 서이나라도 알 수밖에 없는 남자, 알버트 그레이.

“황궁에서 일하는 것이 어떤가.”

바깥 나라란 나라는 모조리 제 복종하에 만들고 있다는 황제가 자신을 황궁 요리사로 캐스팅하러 온 것이다.

얼마 전 저 멀리 있는 나라를 정복하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그런 황제가 왜 자신의 앞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눈을 내리까는 알버트는 이 상황이 지루한 듯 보였다.

하지만 서이나는 턱을 괸 손가락이 다소 초조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대답은?”

“제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실 수 있다면요.”

“조건이라…”

말을 흐리던 알버트의 얼굴에 찰나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마치 무언가 떠올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네가 돌아온다면 어떤 조건이라도 들어줄 텐데.”

분명 저에게 하는 말은 아니었다. 부드러운 미소는 금세 자조적이게 변했다.

잠시 후 처음 그 모습으로 돌아온 남자가 말했다.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것이라면 그리하지.”

황제에게 대놓고 조건을 거는데, 남자는 전혀 화가 나지 않은 듯 보였다.

예의를 차리지만, 묘하게 대하는 태도가 쌀쌀맞다.

‘소문은 역시 믿을 바가 못 되는구나.’

소문 속 알버트 그레이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살가웠었다. 그가 ‘왕자’일 때는 그리했다는 말이 더 옳을 것이다.

서이나는 상념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제 조건을 걸었다.

첫 번째. 그녀의 안전을 보장할 것.

황궁에서 일하는 요리사 대접이 나쁘지 않을 것은 알지만 전에 살던 때를 생각하면 이렇게 준비하는 것이 훨씬 마음 편했다.

두 번째. 그녀의 연봉을 맞춰줄 것.

이곳 사람들에게 요리를 알려주고 또 잡일을 하며 나름 살아가고 있었지만 예전 자신이 살던 때와 비교하면 벌리는 돈은 현저히 적었다.

자존감이 높은 서이나는 자신이 이 정도보다는 벌 수 있다 생각했다.

“이게 전부입니다, 폐하.”

“받아들이지.”

알버트는 그녀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내건 조건을 바로 받아들였다.

“그럼 오늘부터 황궁으로 출근하도록. 요리는 계속 정진하는 것으로 알고 있겠어.”

“예, 다시 만나 뵐 날까지 열심히 하겠습니다.”

황제에게 올라갈 상이면 더 신경 써야 할 테다.

이곳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매운 음식에 약하니 간을 너무 맵게 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이미 어떤 요리를 내놓을지 고민에 빠져 있는데, 알버트의 목소리가 단호히 울렸다.

“아, 내가 먹을 건 아니고.”

“…예?”

얼빠진 대답에 알버트는 아까 전과 같은 옅은 미소를 띠고 이야기했다.

“정인이 먹을 거란다.”

봄바람처럼 따사로운 목소리였다.

정인.

…그게 사랑하는 이를 뜻하는 정인이 아닌, 사람의 이름이라는 걸 깨닫게 된 건 황궁에서 일하기 시작한 후였다.

황제가 사랑하는 이이기도 하니 처음 말도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처음 알버트의 말도 안 되는 외모를 보고 여자로서 끌린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정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서이나는 완전히 관심을 껐다.

‘임자 있는 사람은 건드리는 거 아니야.’

그녀는 지극히 상식인이었기 때문이다.

황궁은 정말 괜찮은 직장이었다.

황제의 편애를 받는 그녀를 시기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서이나가 가진 요리 레시피를 보면서 그녀가 만든 요리의 희귀성을 인정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그렇게 정인이 언제 오나 기다리면서, 서이나는 자신의 요리를 마음에 들어 하는 이들을 만났다.

마탑주 메르시도 이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비록 한 번밖에 보지 못했지만, 메르시는 그녀를 보며 묘한 얼굴을 했다.

“…신기하네요.”

“네?”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요리할 때 소망 같은 걸 넣지 않으시나요?”

메르시의 말에 서이나는 요리할 때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상기해 보았다.

사람들이 즐거웠으면, 행복했으면. 때로는 덜 우울했으면.

“당신이 만드는 음식이 당신을 표현하고 있어요.”

메르시가 해준 말은 그게 전부였다.

몇 번 그녀를 더 만나보려 애썼지만 황제를 따라다니는 그녀는 황궁 요리사인 서이나가 만나기에도 너무 바빴다.

멀리서 볼 때면 다크서클이 볼까지 내려와 있는 것이 너무 적나라해서 불러세우기도 죄책감이 들었다.

언젠가 물어볼 수 있는 날이 오겠지. 서이나는 자신이 가진 뜻 모를 힘을 열심히 갈고 닦았다.

마법 기초서도 사서 읽었다.

이윽고 서이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마법이, ‘제 소망을 불어넣으면 상대에게 그럴 만한 생각이 들게 바꿔줄 수 있는 정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이 음식을 먹으며 즐거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 사람들이 실제로 그 음식을 먹으며 즐겁다 느꼈다.

얼마나 즐거운지는 사람마다 다르긴 했지만.

마법진을 그리며 여러 주문을 외울 정도로 강하지는 않았지만, 제게 딱 어울리는 능력이라 이 정도면 만족했다.

황궁에 와 혼자 요리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면 알지 못했을 마법의 존재는 그녀의 삶에 찾아온 선물 같았다.

하지만 자신의 한계를 깨달았다고 해서 마법을 향한 서이나의 궁금증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마법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가 드래곤의 계약자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고,

“…혹 괜찮으시다면 정인 님께서 마법 쓰는 모습을 가끔, 아주 가아끔 볼 수 있게 해주시면 안 될까요?”

누가 봐도 드래곤 계약자인 정인을 우러러보게 되는 것은 필연적인 수순이었다.

***

뺨을 발그레하게 붉히며 수줍게 웃는 서이나를 보며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네? 뭐라고요?

“드래곤의 계약자시라니 너무 멋있고, 대단해서 그래요. 진짜 아무런 흑심도 없고….”

원작의 궤를 벗어난 서이나의 행동이 달라질 것은 알았지만, 그녀가 마법을 살짝 쓸 수 있다는 것부터 내 팬에 가깝게 변할 거는 몰랐다고요?

원작 알버트의 자리를 내가 꿰찬 느낌이었다.

“제 생애 드래곤 계약자를 볼 수 있게 되다니, 이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

내 손을 덥석 붙잡고 말하는 눈이 반짝였다.

그래도 사람들 앞이라고 감추고 있던 그녀의 덕심이 다 드러나는 기분이었다.

흡사 슈버트가 알버트에 대해 말할 때 같은 느낌이다.

…아무래도 서이나는 내 생각보다 훨씬 이 세계에 적응을 잘 해버린 모양이다.

그녀가 나를 위해 맛있는 요리를 해주는데 이 정도도 못 할까.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을 쓸 때 불러드리면 될까요?”

“네! 당연하죠!”

서이나는 뛸듯이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저도 한 가지 드리고 싶은 부탁이 있어요.”

서이나는 자신의 능력이 별것 아니라고 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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