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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132화 (132/156)

132화.

나는 본래 내가 겪었던 과거에 대해 이야기했다.

처음 알버트에게 하양이와 계약하겠다 이야기했을 때 그가 나를 수도로 올려보냈던 일부터, 그곳에서 알렉산더의 재해를 겪고 돌아왔던 일까지 전부.

“그 속에서 네가 이 드래곤을 만났단 말이지….”

“그렇지! 넌 기억하지 못하는가 보군.”

함께 이야기를 듣던 알렉산더가 쫑알거리자 팔짱을 낀 알버트의 주먹에 핏줄이 선명하게 불거졌다. 이크, 이거 조심해야 하는데.

자신 앞에 앉은 하양이와 알렉산더를 보는 알버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왜 드래곤은 하나같이 내 신경을 건드리는지 모르겠구나.”

“내 말이 신경을 건드렸나 보군. 사과하겠어.”

알렉산더가 화를 내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는 의외로 순순히 사과했다.

자신이 드래곤이라는 사실에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과 다른 태도라 놀랐다.

내가 놀란 듯 바라보자 알렉산더가 하하 웃으며 중얼거렸다.

“성체가 된 후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졌어.”

약간 나사가 빠진 모습이긴 해도 행복해 보인다. 평생의 소원을 이룰 수 있게 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일어나지 않는 일이 되었으니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알렉산더를 보며 한숨을 내쉰 알버트는 미간을 좁혔다.

“그건 그렇지. 현자가 되면 모르지만.”

알버트의 말에 알렉산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되는 말대꾸가 피곤한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른 알버트는 자신의 과거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이야기해 줬다.

알렉산더가 없었지만 예프넨 후작과 로스투라투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연회에 숨어드는 일은 여전히 진행되었다.

알버트는 나를 여전히 리암에게 보냈다. 하지만 연회에서 재해를 겪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대신 수도에서 나는 극진히 대접받으며 하양이가 없는 삶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메르시와 처음 만난 게 이때인 것도 변함이 없었다.

알렉산더가 없었던 과거에서 알버트는 사탕으로 아이를 회유시키듯, 내게 인생의 달콤함을 보여주기로 한 것이다.

…다른 때 보여줘도 되었을 것 같긴 한데, 그때 알버트가 나를 수도로 보내야 했던 이유라도 있었던 걸까?

아니다. 너무 생각을 깊게 하는 것 같아. 나는 고개를 저으며 알버트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 뒤 알버트의 이야기는 내가 아는 과거와 비슷한 양상을 띠었다.

“과거를 바꾸는 건 정말 조심해야 하는 일이긴 해. 네 존재 자체도 지워 버릴 수 있는 일이니까.”

“…존재 자체를 지워 버린다고.”

알렉산더의 말에 알버트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어, 위험한데. 그가 과거를 떠올리고 있는 건 내게 안 좋은 징조였다.

“모래시계….”

알버트가 내 시련의 날을 떠올리는 말을 할수록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의 긴 손가락이 톡톡 무언가 두드리듯 움직였다.

바로 나를 추궁할 줄 알았는데, 알버트는 오히려 알렉산더에게 말을 걸었다.

“어찌 되었든 성체 드래곤이 황궁을 찾은 것은 길조라 하지. 머물다 가겠나.”

“…황궁에 와본 건 처음이긴 한데.”

알렉산더가 솔깃한 듯 말했다. 하긴 성체 드래곤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드래곤에게 맞는 격식을 맞춰 준비하지. 이번에 요리사도 새로 들였고 말이야. 밖에 나가면 시종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방금 전까지 알렉산더에게 못마땅해하던 태도는 어디 가고…? 너무 수상하다.

“좋군.”

알렉산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나를 보며 결연한 얼굴을 했다.

“네가 얼굴 보여달라 했으니 여기 좀 더 머무르다 떠날게. 같이 밥도 먹고 하자고.”

“…정인이 그런 말을 했다고.”

알버트가 뇌까리는 말에 몸이 덜덜 떨렸다.

“아니, 알렉산더. 왜 말을 그렇게… 그냥 가끔 서로 살아 있는 것만 알고 살자고 그런 거예요. 다른 뜻 없고.”

“당연하지. 다른 뜻이 있으면 이미 무슨 일이 일어나고도 남았단다.”

그건 또 무슨 뜻이죠? 대체 나를 안심시키려는 건지 더 떨게 만들려는 건지 모를 말이었다.

알렉산더는 세상이 꽃밭으로 보이는지 행복한 얼굴로 방을 나섰다.

이제 나와 알버트 앞에는 하양이가 앉아 있었다.

“화이트, 라고 부르는 것이 낫겠지.”

알버트가 인자한 미소와 함께 넌지시 운을 뗐다. 하양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제 드래곤 새끼라고 안 부르네….”

“이름이 있는데 무엇 하러.”

알버트가 뻔뻔히 대답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황당해졌다.

아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못 불렀잖아요? 나랑 탑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고.

이건 필시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데.

“슈버트가 보고 싶다던데 같이 시간 보낼 생각은 없느냐.”

“…슈버트?”

하양이가 놀란 듯 되물었다. 나도 알버트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슈버트는 파충류를 싫어하는데? 하양이의 정체를 깨닫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던 게 기억에 선명했다.

“정인과 있을 시간은 많지 않느냐. 널 기다린 이들을 만나주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렇지….”

알버트의 화려한 말발에 넘어간 하양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결국 하양이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결국 나와 알버트만 방 안에 남았다. 고요한 분위기가 마치 폭풍전야처럼 느껴진다.

두 손을 모으고 있던 알버트의 검지가 다른 손가락을 톡톡 두드렸다.

“다른 남자의 목숨을 구하고 얼굴도 보여달라 했다고.”

“알렉산더의 말엔 곡해의 여지가 너무 많아요. 절대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알버트가 있을 때만 말하든가 해야지….”

죽는소리를 하는데 알버트가 내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계속 무표정일 것 같아 무서웠는데 입가에 은근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앞으로 내가 있을 때만 말하거라. 그럼 오해할 일도 없고 완벽하겠어.”

“…그게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일까요?”

“내가 널 계속 따라다니면 가능한 일이겠지. 좋은 방법인 것 같아. 아, 그리고.”

알버트가 내 턱을 살며시 그러쥐었다.

“그때는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는데….”

“…….”

“내가 모래시계를 부숴 널 막지 않았더라면.”

턱을 그러쥔 손에 힘이 들어가고 그의 얼굴이 더 가까워졌다. 짙게 물든 붉은 눈동자 안에 내 모습이 비쳤다.

조마조마한 얼굴로 그를 응시하고 있는 내가 보였다.

그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넌 죽었겠지.”

“…….”

“아예 존재하지 않게 되었을지도 모르겠구나.”

목소리에 가득한 확신에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었다. 들켰다. 나는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아까 당신이 말했듯, 일어나지 않은 일이잖아요.”

내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당신이 나를 구했으니까.”

나는 내 턱을 그러쥔 그의 손에 내 손을 얹었다. 내 손의 온기가 그를 조금이라도 차분하게 만들 수 있길 바라면서.

“당신이 제 구원자니까요.”

구원자라는 말을 내뱉는 순간, 알버트의 눈빛이 흔들렸다. 한숨을 내쉰 알버트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나를 위해 목숨을 내던지려 하지 말거라. 절대로.”

그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도 제 상황이었으면 그렇게 했을 거잖아요.”

반박할 수 없던 모양인지 알버트기 입술을 지그시 다물었다. 내 턱을 쥐고 있는 손의 힘이 느슨해졌다.

그때, 나는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니까 용서해 주세요.”

그리고 배시시 웃었다.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알버트의 얼굴을 보니 내가 먼저 입을 맞추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매번 알버트가 상황을 리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몰랐는데 알버트의 저런 모습을 보니 신선한걸.

그가 왜 매번 나를 놀래키는지 알 것 같다.

내 목을 감싸며 알버트가 얼굴을 좁혀왔다.

“목욕은 다시 해야겠구나.”

그가 내 입술을 덮었다. 나를 집어삼킬 듯한 키스였다.

그 속에서 나는 다시 알버트의 불안을 읽었다. 나와 함께 있을 때마다 숨기려 드는 감정의 잔재.

나는 입술을 떼고 알버트에게 중얼거렸다.

“당신이 원하니까 방에서 나가지 않았던 거예요.”

다시 입을 맞추려던 알버트가 멈칫했다.

“불안하면, 내가 무엇을 해주길 바라는지 말해줘요. 다 들어주지는 못해도, 내가 할 수 있는 걸 할 테니까.”

“…….”

“속에만 담아두지 말고.”

내 말에 알버트가 희미하게 웃었다.

“…노력해 보마.”

제 자신에게 하는 다짐과 같은 말 뒤, 그와 내 간격이 좁아졌다.

***

황궁으로 돌아온 이상, 알버트도 직접 귀족들을 보고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결국 알버트는 며칠 후 잠시 내 곁을 비웠다.

그리고 방을 따로 쓰자는 내 말은 깔끔히 묻혔다. 대신 알버트는 사람들 입단속을 단단히 하겠다 말해주었다.

나는 점심을 먹으러 다이닝룸으로 향했다. 오늘도 내 음식은 서이나가 준비해 주었다.

밥 먹을 때는 역시 고기지. 잘 삶아진 수육에 김치의 조합이 얼마나 환상인지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것 같았다.

야들야들한 고기에 느끼함을 잡아주는 김치의 완벽한 하모니였다.

괜히 이 책이 먹방 힐링 로맨스가 아니었다. 알버트 같은 입맛을 사로잡으려면 이 정도 실력은 있어야 하는 거였어.

이제 서이나는 여주인공이 아니라 거의 내 전용 요리사가 되었긴 하지만….

그러고 보니 내 소유의 영지는 어떻게 굴러가고 있으려나. 나중에 알버트에게 물어보고 서이나를 정식으로 고용해야겠다. 꼭.

약간 찔리는 마음에 나는 서이나에게 음식이 맛있다며 따봉을 날렸다.

언니, 제가 알버트는 양보할 수 없어도 돈은 드릴 수 있습니다.

옆에 앉아 음식에 열중하던 하양이와 알렉산더는 서이나가 칭찬에 쑥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따라 했다.

세 사람이 엄지를 척 내미는 모습을 보고 서이나가 소리내어 웃었다.

사실 내가 먼저 날리는 모습을 보고 하양이와 알렉산더는 눈치보다 따라 했다. 서이나가 우리를 보며 웃었다.

“새삼스레 저와 같은 시간대에 있다 오신 분이라는 게 느껴지네요. 이번 요리는 드시는 분들이 모두 행복한 기분으로 드셨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만들었어요.”

“정말 말 그대로인 것 같아요.”

서이나의 말에 감탄하던 나는 문득 그녀에게서 마력이 느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를 만날 때마다 음식에만 집중해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서이나… 씨. 몸에서 마력이 느껴지는데….”

나는 그녀를 향한 호칭을 조심스레 정한 후 운을 뗐다. 내가 먼저 이에 대해 말하자 서이나가 수줍은 얼굴을 했다.

“네, 메르시 님 덕에 제게 마법의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언니가 마법사요?

“비록 드래곤의 계약자이신 정인 님에 비하면 보잘 것 없지만요.”

상상도 못 한 전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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