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나는 느리게 몸을 일으키며 신음했다. 진짜 운동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심각하게 고민이 들었다.
밥을 잘 먹었는데 다시 배가 고픈 것 같다. 몸의 피로가 풀렸는데 다시 쌓인 느낌이다. 이대로 자도 좋을 것 같은데.
아냐. 지금 자면 저녁에 눈이 말똥말똥할 것이다. 그것만은 안 되었다.
저녁에 알버트한테 또 시달리라고? 오늘은 일찌감치 잠들어서 그의 애처로운 얼굴을 피할 것이다.
우선 저녁에 알버트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들으면 거절할 수가 없어졌으니까.
눈을 감은 나는 이 방 주위에 결계가 쳐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들이 이곳을 드나들 수 없게 하는 종류였다.
…알버트의 불안이 생각보다 깊은 모양이다. 날 두 번 잃을 뻔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알버트가 더 걱정하게 만들 필요는 없으니 방 안에 있어야겠다.
책이나 읽을까 싶어 일어서는데 머릿속에 하양이의 목소리가 울렸다.
[정인, 이제 만나러 가도 돼?]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라 그런지 더 반가우면서 좀 섭섭했다.
내 옆에만 붙어 있을 때는 언제고 이렇게 밖에 다니면서 연락도 안 해.
…그리고 좀 얄밉기도 했다.
나와 알버트를 존중해서 마련해 준 시간이기는 했지만….
하양아, 만일 네가 있었더라면 내가 이 정도로 시달리지는 않았을 텐데!
어쨌든 하양이와 알버트의 사이가 진전된 것 같아 기쁜 것도 사실이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만 하면 으르렁거리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한데.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고 합의까지 했다니까.
언젠가 알버트도 하양이를 하양이라 부르는 날이 오겠지? 왜 하양이인데 하양이라 부르지 못하고.
엉뚱하게 홍길동을 떠올리던 나는 하양이에게 얼른 답변을 보냈다.
[응, 당연하지.]
일주일 동안 잘 지냈으려나. 나는 밖에 나가기 곤란하니 하양이한테 이리 오라고 해야겠다.
그런데 여기 주소를 어떻게 전달하지? 고민하고 있는데 하양이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도착했어.]
벌써 왔어? 눈을 깜빡이는데 창문을 툭툭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내가 있는 곳은 또 어떻게 안 거야?
창문을 열자 인간의 모습을 한 하양이가 쑥 들어왔다.
알버트가 사람은 드나들 수 없게 해두었지만 드래곤까지는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다.
혹은 하양이의 마력이 알버트를 뛰어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바깥에서 솔솔 부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예쁘게 흩날렸다. 하양이가 나를 보며 화사하게 웃었다.
“정인, 잘 지냈어? 내가 정인이 기뻐할 만한 소식을 가지고 왔는데.”
“네가 돌아온 것보다 기쁜 소식이야?”
내가 웃으며 묻자 하양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그가 손을 올려 창문을 가리켰다.
“정인을 만나러 온 손님이야.”
…손님? 고개를 갸웃거리는 데 낯선 그림자가 보였다.
이내 창문을 날렵하게 뛰어넘은 남자가 바닥에 완벽히 착지했다.
몸을 일으킨 남자는 생각보다 키가 작았다. 170cm 정도 되어 보인달까.
얼떨떨한 얼굴로 이방인을 마주 보는데 남자가 먼저 내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 오랜만이야.”
블루블랙의 머리카락에 바다와 같은 파란 눈동자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날렵한 눈매는 고양이를 연상시켰다.
기억을 더듬었지만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눈을 가늘게 뜨며 남자를 주의 깊게 관찰하던 나는 기억 더듬기를 포기하고 물었다.
“실례지만 누구신지….”
“실례라니! 실례 같은 건 없어. 무려 내 생명을 구한 사람이잖아. 더 거만한 표정을 짓도록 해.”
묘하게 심기를 건드리는 말투가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못 알아보겠나? 변한 모습을 보여줘야 하나, 이거. 나 비싼 몸인데.”
계속되는 말에 확신이 들었다.
“설마.”
“그 설마가 사람 잡지.”
저렇게 말하는 사람은 내 주위에 한 명뿐이라고!
“알렉산더?”
“이제야 이름 말해주네.”
씩 웃는 알렉산더의 모습에서는 자신감이 넘쳤다. 죽기 전 보이던 고뇌와 절망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눈앞의 남자가 정말 알렉산더라니.
내가 과거에서 한 행동의 여파가 현재까지 미친 것을 깨달은 건 이번이 처음이라 얼떨떨했다.
“…진짜 살았네.”
내 말에 알렉산더가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누가 해준 충고 덕에 예프넨 후작을 멀리할 수 있었거든.”
“내 말을 정말 믿어줬네요.”
한편으로는 신기했다.
그때 나는 유령에 가까웠고 알렉산더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도 정말 찰나에 불과했다.
“내 평생 소망을 알고, 그렇게 절박하게 이야기하는데 어떻게 그냥 넘길 수 있겠어.”
그가 나와 하양이에게 뽐내듯 말했던 소망을 기억했던 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가만, 알렉산더도 사람으로 폴리모프했다면 시련을 이겨냈다는 소리 아닌가? 성체 드래곤으로 진화해서?
하지만 주위에 계약자는 보이지 않는데.
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걸 눈치챈 알렉산더가 뽐내듯 말했다.
“난 혼자 시련을 이겨냈어. 계약자가 항상 필요한 건 아니잖아?”
“혼자서요? 대단하다!”
“흐흠! 내가 좀 대단하지!”
칭찬을 듣고 좋아하는 알렉산더의 모습에서 하양이가 겹쳐 보였다. 죽기 전 현자에 가까웠던 모습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도 조심성이 엿보였지.
성체 드래곤이 되기 전에 자신의 본심을 쉬이 보여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원래는 이런 성격이었구나.
“성체가 되고 나서 네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어 기다리다 얘를 만난 거야. 얘가 날 먼저 찾을 줄은 몰랐지만.”
알렉산더는 이 세계에 내가 있을 것임을 직감하고 기다렸다고 했다.
성체 드래곤이 되는 고통을 거뜬히-이는 알렉산더의 표현이었다- 이겨내고 우선 이 세계를 구경하며 여행하다 그를 찾아다니던 하양이와 마주친 것이다.
“진짜, 진짜 고마워.”
알렉산더는 얼굴에 웃음기를 지운 후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의 짙은 눈동자는 진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네 덕에 내 소원을 이룰 수 있게 됐어.”
알버트와 내가 함께하는 미래는 바뀌지 않았지만, 알렉산더가 살아났다.
내 행동이 만들어낸 기적이 눈앞에 있다.
살아서 나와 이야기하고, 내게 감사하다 말한다. 마음이 벅차올랐다.
“그래서 네가 감사 인사를 하고 싶어. 원하는 건 무엇이든 말해봐. 앗, 이미 드래곤의 계약자라 원하는 건 없으려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감사 인사는 예전에 받았는걸요.”
“응? 난 뭐 해준 기억이 없는데….”
“당신 덕에 제가 하양이와 계약할 결심을 할 수 있었으니까요.”
알렉산더가 눈을 가늘게 뜨다 흠 소리를 냈다.
“내가 죽었던 과거의 이야기군.”
“네.”
“그래도 상관없어. 난 원래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란 말이야. 착한 인간들에게는 더더욱.”
알렉산더가 내 말에 손사래를 치며 재촉했다.
“차원 드나들기 시작하면 만나기 힘들 텐데 지금 한몫 잘 챙겨두라고.”
내게 작게 소곤거리는 모습은 마치 장사꾼 같기도 했다. 알렉산더의 행동과 말투에서는 생기가 넘쳐 흘렀다.
“그래도 됐어요. 당신은 나와 하양이를 위해 재해를 바꿔줬으니까.”
내 말에 조잘거리던 알렉산더가 조용해졌다. 과거를 떠올리는 듯했다.
아무래도 성체 드래곤이 되면서 달라진 시간에 대한 기억도 생긴 모양이다.
“그 덕에 제가 하양이와 계약을 했고, 이렇게 살아 있으니 알렉산더도 제 목숨을 구해준 셈이잖아요. 우리 서로 비긴 걸로 해요.”
“으으, 그래도 그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은 과거잖아. 생명의 은인에게 아무것도 안 해주는 건 좀 그런데….”
알렉산더는 고민에 빠진 얼굴로 한참 턱을 괴고 있었다.
결국 나는 그에게 내밀 조건을 하나 생각해 냈다.
“그럼 이렇게 가끔 얼굴이나 보여주러 오세요. 다른 차원 이야기도 해주고.”
“오, 그 정도야 할 수 있지! 내가 또 이야기를 잘하거든!”
내 말에 알렉산더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네 뒤에 있는 사람은 누구야? 표정이 좀 살벌한데.”
알렉산더가 가리킨 곳을 돌아본 나는 미간을 좁히고 서 있는 알버트를 발견했다.
알버트는 내 등 뒤에서부터 나를 안았다.
“화이… 아니, 드래곤 새끼가 손님을 데리고 온 모양이구나.”
“응, 내가 데리고 왔어!”
안 돼. 하양이의 호칭이 드디어 바뀌려던 순간이었는데!
이를 눈채채지 못한 하양이는 해맑게 알버트에게 꾸벅 인사했다.
미간을 좁힌 얼굴을 살벌했지만, 알버트는 하양이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러고는 알렉산더를 응시하며 물었다.
“…그래서 이쪽은 누구지?”
알렉산더가 고개를 높이 쳐들며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간이여, 날 만난 것을 영광으로 여기거라. 난 차원을 넘나드는 성체 드래곤, 알렉산더다.”
흡사 x켓몬에 나오는 x켓단의 등장 멘트 같은 어조였다.
알렉산더가 성체 드래곤이라는 말을 듣고 나서도 알버트의 시선은 바뀔 줄 몰랐다.
“성체 드래곤이 정인은 왜 만나러 온 거지?”
“응? 그거야 이 여자가 내 목숨을 구했으니까.”
“목숨을 구해?”
어째 뉘앙스가 좀 이상한데. 불안한 내가 입을 열려던 순간 알렉산더가 다시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이렇게 날 생각해 주는 인간은 흔치 않은데 감동했다고.”
무표정한 얼굴로 알렉산더와 이야기를 잇던 알버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흠칫 놀라는 나를 발견한 알버트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화사하게 웃는 모양새였지만 마치 저승사자가 온 것처럼 느낌이 싸했다.
“드래곤을 챙겨줄 마음은 언제 든 건지 모르겠구나. 네 계약자도 있는데.”
“…….”
“목숨을 구해주다니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네가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나를 껴안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웃는 입매가 비틀릴 듯 말 듯 떨린다.
…질투다. 질투! 알버트의 불안감을 아직 제대로 잠재우지도 못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알렉산더의 등장에 심기가 불편해진 것이다!
알렉산더의 존재부터 해명해야겠어. 나는 얼른 입을 열었다.
“알버트, 이건 정말 인류애적인 마음에서 비롯된 거예요. 알렉산더는 당신도 기억할….”
뒷말을 말하려던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알렉산더는 죽지 않았다.
리암이나 알버트와 마주쳤던 과거도 사라졌단 이야기다.
“애초에 본 적 없는 인물을 어떻게 기억하겠느냐. 내 기억력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아.”
알버트가 내 말을 덤덤히 받으며 고개를 비스듬히 숙였다.
달라진 시간을 기억하는 건 나와 하양이뿐이다. 나는 현장을 바꾼 장본인이었고 하양이는 내 계약자니까.
나는 숨을 고르고 알버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원래는 마주쳤었어요.”
알렉산더의 부재와 함께 알버트의 과거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바뀐 시간축에 대해서 설명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