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어린 그는 몰랐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제 알버트는 제 스승이었던 에밋이 초월자, 혹은 현자라고 불리는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때는 ‘보관해 두던 선물’이라 했지만, 시간을 멈추는 모래시계는 에밋이 직접 만들어 건네준 것일 터였다.
그를 위해서.
‘죄송합니다. 예전에 잘못했던 것들.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것들에 대해서, 모두.’
에밋의 마지막을 보는 순간, 알버트는 그가 언제나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의 스승은 애초부터 시련을 이겨내 드래곤의 계약자 따위 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같은 길을 갈 수도 있다 예상하셨는지도.’
알버트는 어릴 적 에밋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정인이 그의 선물을 봐주러 나갔을 때 갑자기 던진 말이었다.
“초월자는 드래곤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드래곤이 바꾸는 과거에 대해 알게 된다는 거죠. 사람들의 기억은 바뀌는 시간축에 따라 변질되지만, 초월자의 기억은 똑같답니다. 신기하지 않나요?”
그때는 평소와 같은 스승의 기행인 줄 알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정인과 그가 어울리는 모습을 보면서, 에밋은 제 미래를 예견했다.
드래곤의 계약자 옆에서 불안해할 자신을 위해 넌지시 해답을 제시한 것이다.
그가 정인과 평생을 함께하기 위해서는 드래곤의 영향을 받지 않는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리 먼 이야기는 아니었다.
알버트는 죽음과 삶 사이의 경계를 1년 동안 반복한 몸이 거의 경지에 다다랐음을 느끼고 있었다.
아직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머지않아 일어날 일이지.’
다짐하듯 손을 꽉 쥐었다 놓은 알버트는 자신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에게도 오랜만인 공간이었다.
밖을 돌아다니며 막사, 혹은 탑을 들락날락하며 일을 처리했지 집무실을 올 시간은 없었으니까.
시계를 보니 슬슬 메르시, 리암과 슈버트가 올 때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생각대로 시계가 정각을 가리키자마자 집무실 문이 열렸다.
“왔느냐.”
“예.”
“예!”
“예.”
메르시, 슈버트, 그리고 리암이 차례대로 말하며 그의 책상 앞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아직도 다른 대륙으로 가는 배가 필요할까요?”
제일 먼저 입을 연 건 리암이었다. 그는 한껏 긴장한 눈으로 알버트를 응시했다.
“되었다.”
리암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긴 시간 전장과 저택을 오가는 생활에 그도 피폐해지던 참이었다.
무엇보다 어딘가 나사가 빠진 듯 광기가 어려 있던 알버트의 동공에 생기가 돌기 시작한 게 가장 그를 안심시켰다.
이제 정인이 누구든 상관없었다. 그녀를 밀어내는 건 어불성설이다.
오히려 알버트가 계속 제정신일 수 있도록 그녀를 잡아두는 게 옳았다.
리암의 얼굴을 보며 알버트가 픽 웃었다.
제 욕심과 이기심이 리암을 얼마나 고생시켰는지 생각하면 할 말이 없었다.
정인이 돌아오고서 정신이 살짝 돌아오니, 그가 미쳐 날뛰는 동안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어했을지 보였다.
“…너희에게는 미안하다는 말 말고 할 게 없구나.”
알버트의 말에 리암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폐하의 마음을 더 잘 헤아려야 했는데….”
고작 한 달 떨어지게 만드는 것으로 알버트를 단념하게 만들려 했다니. 그 정도에 끝날 만큼 얕은 마음이 아니었다.
알버트의 삶에는 정인이 꼭 있어야 함을 리암도 이제 인정하는 바였다.
아까 전 식사를 할 때 풀어진 알버트의 모습을 보면서도 느꼈다.
자신은 신하로서 알버트에게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정인은 정인으로서 알버트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있다.
그녀의 존재는 제 주군에게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다.
“당분간 쉬거라.”
“휴가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평소 일하는 걸 좋아하는 그이지만, 이번 휴가는 반가웠다.
알버트가 자신을 생각해서 하사하는 시간임을 알기에 더 그런지도 몰랐다.
‘드디어 정신을 차리셨군요.’
속으로 감격한 리암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났다.
리암이 홀가분한 얼굴로 제일 먼저 방을 나섰다. 그는 이미 휴양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해산물을 계속 먹을 수 있는 바닷가로. 되도록 일과 멀어질 생각이었다.
알버트는 다음으로 슈버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와 전장을 뒹굴던 암살자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맑은 눈이 알버트를 오롯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어찌 보면 그가 정인을 보는 눈빛과 비슷했다. 알버트는 헛기침을 한 후 인자한 미소를 띠었다.
“슈버트.”
“예, 말만 하십시오!”
“전쟁도 끝났겠다, 휴가 겸 황궁에 머무는 것은 어떠냐.”
“저는 좋습니다.”
알버트의 말에 매번 일희일비하는 슈버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보아도 알버트는 완벽한 주군이었다.
전장을 오가는 게 좀 힘들긴 했지만 알버트의 곁을 지킬 기회가 생겨 진심으로 기뻤다.
가까이서 시간을 함께 보낸 우상은 계속 제 생각을 뛰어넘었으니까.
‘…나중에 나도 누군가에게 저런 존재가 되었으면.’
자신도 누군가의 삶을 구원할 수 있다면 해주고 싶다. 이름은 그와 알버트와 같은 ‘버트’ 돌림으로 지어주고 싶었다.
“한데 네게 맡기고 싶은 일이 하나 있다.”
“제게요?”
“네게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일 테지만….”
“무엇이든 말씀만 해주십시오!”
슈버트의 우렁찬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울렸다.
메르시는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목소리에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손가락으로 귀를 막았다.
저 자식은 항상 목청만 좋다니까.
“황궁에 머무르는 동안 정인의 동태를 살필 수 있겠니.”
“정인의 동태를요?”
“그래, 그녀가 방을 빠져나오면 어디에 가서 무얼 하는지 정도. 내가 옆에 없을 때만.”
암살자에게 사람 감시는 숨 쉬는 것처럼 익숙한 일이었다.
전쟁터도 아닌 황궁에서 정인의 동태를 살피는 것 정도야 휴가와 같을 테다.
“알겠습니다.”
슈버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으로 고맙구나. 너밖에 할 수 없는 일이어서 부득이하게 부탁하게 되었다.”
“제 목숨 구해주신 값은 아직도 갚지 못했는걸요.”
알버트의 너스레에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힌 슈버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이 떨어졌으니 수행할 시간이었다.
매번 알버트의 명을 따르고 이뤄낼 때마다 느끼는 희열은 짜릿했다. 그는 알버트가 자신의 주군이라 행복했다.
메르시는 슈버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평소 슈버트에게 장난을 치는 건 자신이었지만 이럴 때 보면 슈버트가 훨씬 어린 티가 났다.
얼굴에 감정이 다 드러나는 것부터가 그랬다.
“메르시.”
“예.”
리암도 쉬게 해주고, 슈버트도 가벼운 업무로 바꿔주었으니 자신에게 해줄 말도 비슷할 것이다. 메르시는 내심 기대했다.
휴가가 정말 가고 싶었다. 정인이 돌아왔으니 같이 쇼핑도 가고 싶다.
크로엘을 찾아가면 또 얼마나 재밌겠어! 알버트만큼은 아니지만 메르시도 정인을 다시 만나게 되어 기뻤다.
“정인이 로제 아티어스를 보고 싶어 해.”
“예? 뭐 하러… 아니, 저라도 직접 보고 복수해 주고 싶을 것 같긴 하네요.”
처음 무엇 하러 그녀를 만나냐 물으려던 메르시는 자신의 과거를 생각해 내고 말을 바꿨다.
자신이 아버지의 마지막을 보았듯, 정인도 비슷한 심정이 아닐까.
“현 로제 아티어스의 상태는?”
“…솔직히 미치지 않은 게 대단하다 생각될 정도입니다. 아니, 애초에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긴 하지만.”
로제는 아직 마법사용 감옥에 갇혀 있었다.
정인의 행방이 불투명했을 때, 육체는 필요하다 생각했기에 직접적인 고문은 없었지만 메르시는 주기적으로 로제를 찾아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보이는 화면은 언제나 비슷했다.
로제는 예프넨 후작과 같은 방에 있었고, 그에게 학대당했다. 예프넨 후작이 직접 목을 죄려 드는 모습도 빈번하게 보였다.
메르시는 계속되는 고문 중에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본래 로제 아티어스는 예프넨 후작의 마력을 위해 바쳐져야 했던 제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중간에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멀리 나가서 살 것이지, 왜 굳이 왕궁으로 들어와 알버트와 엮이려 들었는지는 잘 이해 가지 않았지만….
뭐, 사랑은 사람을 미치게 한다니까.
사실 메르시가 보기에 알버트를 향한 로제의 감정은 사랑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불행을 원하는 이는 드물다.
로제가 보이는 모습은 지독한 결핍과 자기혐오에 가까웠다.
심지어 오랜 학대로 축적되어 완전히 세뇌되어 버린 거라서 어떻게 설득하거나 교육시킬 수도 없었다.
어쨌든 로제는 환상을 본 후에 매번 발작을 일으키며 몸부림쳤다.
예프넨 후작을 지독히 두려워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있는 곳이 감옥이고 예프넨 후작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아직 정인을 찾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로제는 매번 정신을 차렸다.
한 번은 물었던 적이 있다.
왜 그렇게 정신을 붙들고 있냐고. 메르시의 물음에 로제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언젠가 내가 사랑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 희망 하나면 충분한걸.”
썩다 못해 악취가 나는, 쓰레기 같은 헛된 희망이다. 메르시가 몇 번을 정정해도 로제는 굳셌다.
정인이 죽으면 알버트가 불행해질 것을 알기 때문에, 그녀를 죽이려 들었으면서 로제는 정인이 사라진 후 알버트가 자신을 사랑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는 말도 뒤죽박죽이었다. 보통 사람의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의 흐름이었다.
하지만 그 믿음이, 로제를 살아가게 하는 삶의 원동력 같기는 했다.
이제 정인이 무사히 살아 돌아온 이상, 그녀의 존재 자체가 로제에게는 최고의 복수가 될 것이었다.
“감옥의 경계를 더 강화하고, 양발과 손에 마력 억제 수갑을 채워야겠다. 정인과 만나기 전까지 네가 계속 상태를 주시하거라.”
“언제 만나시는데요?”
“다음 주 중.”
“…제 휴가는 나중에 더 길게 주실 것이라 믿겠습니다.”
자신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 메르시는 울며 겨자 먹기로 알버트의 명을 따랐다.
메르시가 축 처진 걸음걸이로 집무실을 나선 뒤, 결재해야 할 서류 더미를 챙긴 알버트는 다시 방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정인의 곁에서 일할 작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