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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129화 (129/156)

129화.

위로가 필요하다는 게 온전한 거짓은 아니다.

다시 만나서 몇 밤을 함께했지만 불안감은 여전히 평정심을 좀먹는다.

정인이 자신을 얼마나 귀하게 여겨주는지 잘 안다.

그의 불안을 눈치채고 말과 행동을 이해하려는 모습은 분명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안다. 정인의 마음과 행동과는 별개로 그녀가 사라진 동안 제 마음에는 괴물이 자리 잡았다는 것을.

일주일 동안 그녀를 가지고, 또 가지고 서로 하나가 되는 일을 밤낮없이 반복했다.

태초 인간의 모습으로 서로를 보고 또 보았다.

하나 갈증은 여전했다.

물기란 물기는 족족 빨아들이지만 끝내 같은 모습을 한 사막처럼. 물을 받지만 끝내 채워지지 못하는 구멍 난 바구니처럼, 어딘가 허했다.

정인의 시련 때문에 그들은 두 번 헤어졌다.

두 번의 이별은 알버트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이었다. 그녀가 떠나갈 때마다 그의 인생이 뒤바뀌었다.

정인은 자신을 휩쓰는 태풍이었다. 변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었다.

이별 때 느낀 감정은 뇌리에 선명히 박혀 그의 목을 조였다.

상실과 절망. 그녀의 잘못이 아닌 것임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느꼈던 배신감까지 마찬가지였다.

생각에 잠겨 있는데 정인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오늘은 여기서 잘게요. 같이 방안을 좀 더 생각해 봐요.”

그의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마음을 울린다. 알버트는 입술을 짓씹었다.

내가 너를 어찌해야 좋을까.

여러모로 응축된 감정은 그의 가슴을 가득 채워, 때로는 불안감으로, 혹은 갈증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어쩔 때는 욕망, 소유욕, 끝내는 그녀 주위 모든 것을 파괴하고 싶다는 잔인함으로.

가지고 가져도 부족했다. 자신의 허기는 정인이 평생을 함께한다고 해도 계속되리라.

정인의 얼굴빛을 살핀 알버트는 그녀의 허리 뒤를 감싸고 무릎 뒤에 손을 넣었다.

손쉽게 정인을 품에 안아 올린 알버트는 발걸음을 옮겼다.

“노, 놓아줘요!”

정인이 아무리 움직여도 그에게 타격을 주는 건 불가능했다.

알버트는 마치 깃털이 두드리는 것 같은 주먹질을 받아주며 아픈 척 미간을 슬쩍 찡그렸다.

이것도 접촉의 일종이니 나쁘지 않았다.

“혈색이 좋지 않으니 목욕을 하며 푹 쉬는 것이 어떤가 싶어서. 욕조도 탑에 있던 것보다 훨씬 크고 좋거든.”

당혹스럽다는 듯 목소리를 내던 입술이 지그시 다물렸다.

그가 지금 정인이 원하는 핵심을 콕 찌른 것이다. 그의 말에 잔뜩 솔깃한 얼굴이었다.

“목욕은 좋지만 전 제 힘으로 충분히 걸어갈 수 있는 성인이니 그만 놓아주세요.”

“싫으냐.”

고개를 저은 정인이 솔직히 답했다.

“제가 너무 많이 먹어 조금이라도 무겁다 느끼면 어쩌나 싶어서요.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항상 완벽하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라.”

어떻게 하는 말마다 이렇게 예쁠 수 있을까. 알버트는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욕실에 들어간 알버트는 욕조 바로 앞에서 정인을 놓아주었다.

“자.”

“이런 곳에서는 정말 안 진다니까.”

정인이 작게 투덜거리며 그의 품을 벗어났다. 하지만 나직하게 고맙다 말하는 건 잊지 않았다.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욕조는 우아한 느낌을 자아낸다.

새하얀 대리석과 잘 어울리는 은색 수도꼭지는 진주로 장식되어 있었다.

욕조를 구경하며 탄성을 내지르던 정인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시녀는 어디 있어요? 물도 채우고 향유에 대해서도 물어보고 싶은데.”

물음의 답은 너무 당연했다. 알버트는 손을 올려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네 앞에 있잖니.”

“…황제 폐하를 이렇게 부리는 게 어디 있어요? 저도 염치가 있지.”

“그러니 더 할 만한 가치가 있지 않느냐. 네게만 이러는 건데.”

“이럴 시간 없으시잖아요. 아까 전에 메르시더러 보자고 하지 않으셨어요?”

“만나는 건 세 시간 뒤란다.”

가볍게 대꾸하며 정인을 지나친 알버트는 수도꼭지를 틀었다. 따듯한 물이 욕조를 채우기 시작했다.

그가 손을 움직이자 나오는 물의 세기가 훨씬 강해졌다. 따듯하다 못해 뜨거운 물에서 몽글몽글한 수증기가 나왔다.

물이 받아지는 걸 확인한 알버트는 재킷을 벗고 목까지 꽉 잠가두었던 단추를 풀었다.

“그리고 나도 피곤하구나.”

“…설마.”

수상히 보는 시선을 부정할 생각은 전혀 없다.

알버트의 눈꼬리가 초승달처럼 휘었다.

“마침 욕조는 두 명이서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크고.”

부끄러운 듯한 얼굴은 하루에도 몇 번씩 달아오른다. 익숙해질 법도 한 반응은 매번 새롭다.

솔직한 얼굴은 거절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정인이 입을 열기 전, 알버트가 먼저 선수를 쳤다.

“일하느라 잠을 제대로 잔 적이 없거든.”

“제가 잠든 사이에도 일하고 있었어요?”

“그래, 티는 내지 않았지만….”

알버트는 제 앞머리를 쓸어내리며 입술을 지그시 다물었다.

제대로 자지 않은 건 1년 전부터지만, 정인이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었다.

알버트의 약한 소리에 정인이 침묵했다.

“너와 함께 하면, 피곤함도 가실 것 같은데.”

정인은 아주 잠시 침묵했다. 장렬히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알겠어요. 우리 씻기만 하는 거 맞죠?”

“그건 장담 못 하겠구나.”

화사하게 웃으며 거절의 뜻을 내비친 알버트는 서랍장에서 향유를 꺼냈다.

욕조에 향유를 들이붓자 향기로운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알버트는 물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온도를 확인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싫으냐.”

자신이 처연한 얼굴을 하면, 정인이 못 이기는 척 받아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싫은 건 아니고요.”

제 생각대로였다. 정인은 후 숨을 내쉰 후 솔직히 이야기했다.

“부끄러워서 그래요.”

알버트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허락하는 것으로 아마.”

둘의 간격이 가까워졌다.

“옷 벗는 것부터 도와줘야겠지.”

시녀가 하는 일은 모두 해줘야 하니까. 정인 뒤에 선 알버트는 리본을 푸르며 목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살 내음은, 그 어떤 향유보다 좋았다. 그러고는 정인에게 하지 못할 말을 속삭였다.

나는 매 순간 너를 집어삼키고 싶어.

너와 함께 뒹굴며, 네 모든 걸 나로 가득 채우고 싶다.

다른 이들이 널 보면, 그들의 눈을 도려내고 널 만진 손과 발은 그대로 잘라내고 싶다.

하지만 이 음습한 욕망을 털어놓으면 넌 내게 실망하겠지.

네가 아는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알버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숨을 내쉬었다.

평소 여유로운 표정 뒤에 숨어 있는 냉정한 성정이 드러날 때, 그를 보던 정인의 시선을 기억한다.

다시 만난 후 불안을 숨기는 일에 지쳐 한 번 진심을 말한 적 있었다.

네가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까, 싶어서.

“평생 널 이 탑에 가둬두고 싶어.”

“이 탑에 가둬두고 나만 보며 평생을 살게 하고 싶어. 네가 어디에 가든 함께하고, 매 순간 나만을 위해 살았으면 좋겠어. 다른 사람들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정인은 그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알버트는 정인의 얼굴의 얼굴에 다시금 스민 두려움을 보았다. 떨리는 눈동자와 확장된 동공.

정인은 알버트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의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한다.

알버트는 정인이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길 바랐다.

그녀가 자신에게 꾸밈없이 말하는 모습이 좋았고 솔직한 태도가 즐거웠다.

지금 정인이 아는 자신은 여유롭고, 때로 짓궂지만 자신의 의견을 잘 따라주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그런 사람을 원한다면, 앞에서 그런 사람이 될 것이다.

원래 모습이 무슨 상관인가. 살아남기 위해서도 썼던 가면을,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못 쓸 리가 없었다

그녀를 위한 공작들은 물밑으로 작업하면 되는 거였다. 평생 알지 못하도록.

‘네 앞에서 나는 네가 좋아하는 그대로 남을 테니까.’

계속 너를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서.

***

목욕을 끝낸 알버트는 늘어진 정인을 침대로 옮겨주었다. 침대 위에 누운 정인은 그를 흘겨보았다.

“결국….”

뒷말을 흐리는 정인을 보며 웃은 알버트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일 끝내고 돌아오마. 네가 읽을 만한 책도 들였으니 봐도 좋고. 방에 있어.”

“나갈 기운도 없어요.”

“잘되었구나.”

의도한 바였다. 알버트는 정인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방을 나섰다.

복도로 나서며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한 얼굴에 미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평소 무표정한 모습으로 돌아온 알버트는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이윽고 알버트는 정인의 방 전체에 마법을 걸었다. 다른 이들이 드나들 수 없게 하는 방어 마법이었다.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으니까.

동시에 정인이 밖으로 나가면 그가 알아챌 수 있는 추적 마법도 함께 걸었다.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방 안에 가둬두고 싶지만, 정인이 감금은 싫다 했으니….

유사 감금 정도로 바꾸면 되지 않는가.

어릴 적 만난 정인을 떠올리던 알버트는 후 숨을 내쉬었다.

‘기억을 되찾은 건 천운이군.’

드래곤의 계약자는 드래곤이 가진 역량에 따라 마력이 좌우된다.

알버트가 가늠해 본 현재 정인의 마력은 어릴 적 자신이 만났을 때를 살짝 뛰어넘었다.

그저 시간이 지난 것만으로 그녀의 마력이 성장한 것이다.

기억을 되찾을 수 있던 건, 어릴 적 자신에게 마법을 걸고 간 정인보다 현재 자신의 힘이 강해졌기 때문이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다시 정인에게 추월당했다 봐도 좋았다.

하양이의 잠재력은 그만큼 대단했다.

정인이 그보다 강한 것에 느끼는 무력감은 없었다. 오히려 강한 힘으로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했다.

다만, 그녀가 또다시 자신을 위한답시고 기억을 지우는 일 같은 게 생기면 어쩌나 불안했다.

‘내 마력도 더 성장시켜야겠군.’

계속, 계속. 드래곤의 계약자가 된 정인과 같은 선상에 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드래곤의 계약자는 드래곤에게서 받은 생명을 토대로 보통 인간보다 훨씬 긴 세월을 살아간다.

하지만 자신은 한낱 인간에 불과했다. 언젠가 스러질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

자신의 손바닥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알버트는 손을 꽉 쥐었다.

‘…네 곁에서 함께하려면.’

그녀가 모든 시련을 뛰어넘고 제게 온 것처럼, 그도 성장해야 했다.

더 이상 정인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의 곁에서 함께하기 위해서.

초월자가 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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