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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127화 (127/156)

127화.

내 말을 듣는 알버트의 얼굴에 고운 미소가 피어났다. 고운 미소와 다르게 침잠한 눈은 심연처럼 어두웠다.

내 말이 내키지 않는 듯 침묵하는 모습이 미안했다.

내 이기심으로 그를 힘들게 하는 걸까. 아예 로제를 만나지 않는 것이 나은 선택일까.

“싫으면 싫다고 해도 돼요. 나도 알버트 의견을 존중하니까.”

“…….”

“매번 당신만 져줄 필요는 없잖아요.”

침묵하던 알버트가 눈을 깜빡이다 픽 웃었다.

그가 두 손을 올리며 항복하는 듯한 제스처를 했다. 그가 날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말해도, 내가 널 어찌 이기겠니.”

말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딱 맞다.

그의 미모가 지금처럼 대단하지 않았더라도 그는 여전히 사람들의 중심에 있었을 것이다.

“말만으로도 사람을 다시 반하게 하는 거 진짜 대단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뭐가 있을까 생각하던 나는 그를 꼭 껴안았다.

심장이 뛴다. 그의 가슴께에 얼굴을 대니 심장박동 소리가 들렸다.

나만큼이나 열심히 뛰고 있는 심장이, 같은 마음임을 느끼게 해줘서 기뻤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나를 위해 져주는 알버트를 위로하고 싶어 껴안은 건데, 내 기분이 더 좋아지는 것 같다.

“따듯하니 너무 좋다.”

내가 배시시 웃으며 말하자 알버트가 내 몸이 뻐근해질 정도로 꽉 안아주었다.

“하지만 그녀를 보는 건 내가 모든 준비를 마친 후로 하자꾸나.”

“당연하죠. 그 정도는 기다릴 수 있어요.”

알버트가 내 말을 들어주는데 그 정도도 못 할까.

“그럼 이 주 후로 하자꾸나.”

알버트의 불안을 잠재워 줄 수 있는데 2주면 오히려 짧다고 생각했다.

다시 고개를 끄덕인 나는 잠시 후 힘차게 입을 열었다.

“자, 이제 슬슬 나갈 준비를 할까요?”

“나갈 준비?”

내 말에 알버트가 무슨 소리냐며 고개를 비스듬히 숙였다.

나를 바라보는 얼굴에 그늘이 져서 그런지 표정이 사악해 보였다.

“탑에서 나가는 건 일주일 후인데?”

“네?”

“아직 여기서 할 일이 남았거든.”

이 좁은 탑에서 할 게 뭐 있다고? 아니, 할 게 없는 건 아닌데 왜 저 말이 야릇하게 들리는지 모르겠다. 내 착각이겠지.

마음을 다스리며 알버트를 마주 보는데 그가 내 목덜미를 감싸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내 불안을 다스리는 데 일주일이면 짧은 시간이구나.”

히익, 나는 목을 뒤로 뺐다. 어제도 겨우 잠들었는데 일주일이나 시달리라고요? 사람이 복상사로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야!

내가 살려면 그를 진정시켜야 한다.

“알버트.”

“내가 얼마나 참는지 알면, 그런 얼굴을 할 수 없을 텐데.”

시선을 내리깐 알버트가 선연한 미소를 지었다. 내 목을 잡은 손길에서 느껴지는 열기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으음.”

나를 찬찬히 살피던 알버트가 제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시간을 늘리는 것이 나을까.”

아뇨! 그것만은! 나는 다급하게 다른 이유를 찾았다.

“하양이는요? 하양이가 돌아올 수도 있는데 여기 저희만 있는 것처럼 행동할 수는 없잖아요.”

하지만 알버트는 이조차도 예상했던 듯했다.

“이미 이야기 끝난 일이란다. 흔쾌히 자리를 비켜주더구나.”

내 마지막 보루였던 하양이도 저 멀리 날아갔다.

알버트가 내 입술을 덮었다. 기나긴 일주일이 시작되었다.

***

“…정인아.”

애절하게 부르는 것에 넘어가는 것도 한두 번이지.

저 목소리에 마음 약해져서 원하는 대로 하게 놔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어.

나는 내 등 뒤에서 나를 끌어안은 알버트를 겨우 떼어냈다.

“이제는… 안 돼요….”

나는 목이 다 쉰 채로 중얼거렸다. 알버트는 못 이기는 척 나를 놓아주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옅은 웃음과 함께 알버트가 내 팔을 들었다.

“나가면 체력을 좀 키워줘야겠구나. 뭐 이리 약한지 모르겠어.”

…그냥 알버트 체력이 사람의 범위를 뛰어넘은 게 아닌가 싶은데.

하지만 내가 운동을 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긴 했어서 변명할 수 없었다.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당신 원하는 대로 합시다….

“안 그래도 너를 위한 요리사를 준비해 두었던 참이야.”

“요리사요?”

“오늘 나가면 만나게 해주마.”

잘 먹는 걸로 체력이 올라갈 것 같지는 않지만 맛있는 음식 먹는 건 언제나 환영이다.

알버트는 널브러져 있는 내게 천천히 옷을 입혀주었다. 황제가 옷을 입혀주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야.

하지만 너무 편해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일어나거라.”

그의 말에 일어난 나는 드디어 그와 내 사이를 잇던 수갑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알버트와 내 손목에는 백금 팔찌만 남아 있었다.

“이제 좀 괜찮아지신 거예요?”

“그건 아니지만….”

팔찌를 낀 손목을 어루만지던 알버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자신의 크라바트를 매만지며 나를 흘긋 보았다.

“네가 불편할 테니까.”

감동도 잠시, 나는 그를 아련하게 보며 물었다.

“일주일 동안은 그 생각 안 해주신 건가요.”

“널 그만큼 생각했던 거라고 여겨주면 좋겠구나.”

나만 좋았던 건 아니지 않니. 알버트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래, 알버트를 말싸움에서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채비를 시작했다.

알버트가 내 모습을 보며 결국 소리 내어 웃었다.

***

알버트의 도움을 받아 준비를 끝낸 나는 느리게 걸어 나갔다.

탑 밖에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 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메르시와 리암, 그리고 슈버트까지. 알버트의 최측근이라 할 만한 사람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모두 1년 전에 비해 다크서클이 심해졌는걸. 알버트에게 많이 시달린 모양이다.

“…언니?”

가장 먼저 핼쑥해진 메르시가 내 앞에 다가섰다. 나를 살피는 모습이 아무래도 이 모습이 어색한 듯했다.

사실 그렇긴 했다. 이 모습으로는 처음 만나는 거니까. 그래도 어색한 건 싫다.

나는 먼저 웃으며 메르시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이에요, 메르시.”

“언… 니.”

내 말을 듣고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메르시는 성큼 다가와 나를 꽉 껴안았다.

“진짜, 진짜 잘 왔어요! 진짜 내가 언니 없을 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메르시, 정인이 힘들겠구나.”

메르시가 정신없이 말을 이어가는데 알버트가 상냥히 웃으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메르시가 흠칫하더니 나를 놓아주었다.

…나중에 메르시를 따로 불러서 무슨 일 있었냐고 물어보든가 해야겠어.

메르시가 나를 놓아주니 뒤에 서 있는 리암과 슈버트가 보였다. 리암은 나를 보며 입술을 지그시 다물고 있었다.

원래 내가 알버트 옆에 있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지금 내 모습을 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암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이에요, 메이슨 공작님.”

나는 먼저 인사를 건넸다. 한데 리암의 반응이 이상했다.

입술을 지그시 깨문 리암이 다소 흔들리는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예?

“앞으로 계속 폐하의 곁을 지켜주십시오. 저도 돕겠습니다.”

“나도 마찬가지로 생각해.”

리암이 말하자 뒤에서 슈버트가 덧붙였다. 내가 없는 동안, 나를 그리워하다니. 내 실종의 기묘한 순기능이다.

졸지에 내 앞에서 세 사람이 후회물을 찍고 있지 않은가.

리암의 허락을 받는 건 시간이 꽤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손쉽게 끝날 줄이야.

나는 얼떨떨한 기분을 느끼며 황궁으로 향했다.

[하양아, 돌아오면 황궁으로 와.]

물론 하양이에게 텔레파시는 전한 후였다. 알렉산더를 찾는 일이 바쁜지 하양이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어쩌면 알버트와 내 사이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준 것일지도 모르고.

알버트와 하양이 사이가 언제 그렇게 좋아졌는지 모르겠다.

알버트 때문에 아침도 먹지 않고 황궁에 온 터라 배가 무척 고팠다.

알버트가 장담한 요리사니 꽤 실력은 좋을 텐데.

그리고 알버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뜻밖의 손님이 황궁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세상에….”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안녕하세요.”

내 눈앞에는 이 책의 본래 여주인공이자 엄청난 요리 실력을 가진 인물, 서이나가 있었다.

찰랑거리는 검은색 생머리에 적갈색 눈이 완벽하게 어울리는 그녀는 목소리까지 예뻤다.

그녀는 내 손을 잡으며 환하게 웃었다.

“이야기만 들으면서 기다렸는데 드디어 뵙네요. 서이나라고 합니다.”

자신감이 섞인 목소리는 그녀를 더 당당해 보이게 해줬다. 책을 읽으며 그렸던 이미지 그대로였다.

“제 이야기를 들으셨어요?”

“한식을 좋아하시는 분이라고 들었어요. 만들기도 하시고. 그렇다면… 저와 비슷한 처지이실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녀가 내 손을 흔들었다. 난데없이 새로운 세계로 떨어진 그녀에게 나 같은 사람은 반가운 친구일지도 몰랐다.

“오늘은 제가 잘하는 음식 위주로 준비해 보았는데 괜찮으실까요?”

원래 남이 해주는 음식은 그게 무엇이든 맛있는 법이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며 안심한 서이나가 다이닝룸에 함께 들어서며 음식 소개를 시작했다.

“푹 익은 김치를 이용한 김치찜과 쌀밥, 계란말이와 장조림을 비롯한 여러 음식을 준비해 보았습니다.”

…세상에.

감격스럽다. 눈앞에 펼쳐진 음식이 내 후각을 잔뜩 자극했다.

나 혼자서는 겉절이나 만들어 먹을 줄 알았지, 푹 익은 김치는 불가능한 일이었는데!

김치 국물이 스며든 고기는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그렇다고 빨간 음식만 있는 건 아니었다. 여러 사람의 입맛을 고려한 건지 식탁의 색감이 다채로웠다.

향이 강하지 않은 불고기나 궁중 떡볶이 같은 음식도 같이 있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식탁 구경을 마친 나는 서이나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나는 인터넷에 유행하던 짤을 떠올리며 비장하게 말했다.

“제 돈은 모조리 가져가 주세요.”

Take my money!

내 오롯한 진심을 담은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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