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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126화 (126/156)

126화.

나는 눈을 부릅떴다.

물론 황궁보다야 알버트가 마음에 드는 선물이고, 나를 위해 리본을 달고 오는 알버트가 조금 궁금하기도 하지만!

일단은 지금 당장이라도 내게 모든 선물을 안겨줄 듯한 알버트를 말려야 했다.

그와 황궁을 내게 준다는 건, 내가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를 가진다는 말이었다. 쉽게 말하면 황후가 되는 거다.

그의 옆에 서는 게 싫은 건 아니다. 오히려 돌아온 순간부터 나는 알버트 곁에 있길 바랐으니까.

하지만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다.

우선 나는 신분증도 없는 신세고, 황후로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드래곤의 계약자가 된 만큼 사람들에게 혈통이나 지위를 인정받는 건 쉽겠지만, 내가 황후로서 일을 제대로 해내는 건 다른 이야기였다.

영지 다스리는 것도 사람들에게 전부 맡기려 했었던 내게 황후는 아직 부담스러운 자리였다.

이 시간대로 돌아온 뒤 사람들의 대화를 들은 건 한순간에 불과했지만, 알버트가 국민들에게 얼마나 존경받는지 보았다.

나는 그게 계속되길 바란다.

대중의 심리는 금방 바뀌고, 그가 사람들에게 미움받는다 해서 그가 상처받지 않을 것도 알지만.

그의 삶이 인정받고, 그를 알아주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게 좋은, 내 이기심이다.

그의 삶에 더 좋은 것만 안겨주고 싶은 욕심.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준비한 선물은 고맙지만, 궁은 좀 나중에 받을게요.”

알버트가 눈썹을 슬쩍 올렸다. 나는 장난기 어린 눈을 반짝이며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당신은 이미 받았으니까.”

이미 오래전에 당신은 나와 같은 마음이었으니까. 나는 해사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건 당신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내 마음은 오래전에 받았을 테니까.”

우리가 서로의 선물이 된 지는 오래되었다. 그저 내가 내 마음을 제대로 인정하는 데 오래 걸렸을 뿐.

내 말에 눈을 깜빡이던 알버트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그의 얼굴에 환한 빛이 번졌다.

무표정한 얼굴에 번지는 미미한 미소는 빈 도화지에 펼쳐지는 수채화처럼 아름다웠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알버트는 나를 안았다.

그의 품에서는 그리운 향기가 났다. 베개에 어렴풋이 남아 있던 그의 냄새가.

“그래, 넌 언제나 내게 과분했지.”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계신데요.”

“…내 삶엔 너만 있으면 되었어.”

목소리 끝이 떨린 것처럼 들리는 건 내 착각이 아닐 터다.

그가 다시 내 입술을 집어삼켰다. 그의 불안한 심리를 반영하는 듯한 행동이었다.

말은 꾸며낼 수 있지만, 마음이 담긴 행동까지 숨기지는 못한다.

계속되는 입맞춤이, 아직 우리를 잇는 사슬이 그의 심정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단시간에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에게 내 존재를 계속해서 되새겨 주고 불안을 가라앉혀 주는 것이다.

입맞춤이 끝난 후 나는 알버트와 시선을 맞추며 그의 양쪽 뺨에 손을 올렸다.

그러고는 분명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알버트, 나 어디 안 가요.”

“날 떠나는 데 네 의사는 한 번도 반영되지 않았던 듯한데.”

알버트가 짓씹듯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무슨 말을 해줘야 하지! 머리를 팽팽히 굴리는데 알버트가 날 제 품에 꽉 껴안았다.

“으앗.”

얼굴이 닿은 가슴팍이 단단했다. 나는 팔을 버둥거리다 그의 등을 토닥였다.

잠시 후 그의 품에서 빼꼼 고개를 든 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

“이제 알버트만큼 강하잖아요.”

내 말에 알버트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는 내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내가 이 탑에 들어온 것부터가 그 증거니까.

성체가 되어 사람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한 하양이도 마찬가지다.

알버트는 내 손을 잡고 안쪽에 입을 맞췄다. 꾹 찍어누르는 입술의 감촉이 야릇하다. 마치 내게 찍는 인장 같았다.

손바닥에 내뱉는 숨이 생생히 느껴져서, 손이 절로 오므라들었다. 살짝 간지럽기도 했다.

알버트가 눈을 가늘게 떴다.

가까이서 보이는 속눈썹이 마치 섬세한 꽃줄기 같다. 이런 부분까지 예쁘면 어쩌자는 거야.

속눈썹 사이에 자리한 눈동자는 요요히 제 색을 빛내며 반짝였다. 맑은 눈동자 안에 담긴 내 모습이 비쳤다.

“평생 널 이 탑에 가둬두고 싶어.”

낮게 내려앉은 목소리는 지금 한 말이 오롯한 진심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 탑에 가둬두고 나만 보며 평생을 살게 하고 싶어. 네가 어디에 가든 함께하고, 매 순간 나만을 위해 살았으면 좋겠어. 다른 사람들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욕망이 그득한 말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와 내 몸을 감쌌다.

등에 쭈뼛 소름이 돋았다. 그가 말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마주한 눈은 찬찬히 나를 살폈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내 모습을, 먹이를 앞에 둔 맹수처럼 유유히 관찰했다.

그건 옳지 않다 말할 때 알버트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럼 네게 미움받겠지.”

그의 얼굴에 허탈한 웃음이 번진다. 자신의 마음을 알면서도, 그대로 할 수 없는 자의 고뇌가 엿보였다.

“그건 더 싫구나.”

이윽고 나와 이마를 맞댄 알버트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네가 원하지 않는 건 부질없거든.”

예전에 그가 내게 매번 져준다고 한 적 있었다.

그가 나를 언제 이길 수 있을까, 중얼거리는 말에 나는 진심으로 억울해했다.

나는 매번 알버트에게 끌려다니는 기분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 말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는 나를 사랑하기에, 제 욕망을 억누르고 나를 위해줄 수 있는 것이다.

“네 삶은 너를 위한 것이니까.”

알버트의 목소리를 들으며 난 다시금 깨달았다.

우리가 사랑에 빠지지 않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가 없었다면 존재하지 못했을 존재였기 때문에.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진정한 해피엔딩이 가까이 있다. 몇 가지의 문제를 끝낸다면, 나와 알버트 앞을 가로막는 것은 없을 테다.

“밖에 나가 하고 싶은 일이 있어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일이 남아 있었다.

“메르시와 리암, 슈버트도 만나고 싶고….”

우선 알버트는 본래 전쟁을 끝내고 돌아오던 중이라 소문이 나 있었다.

메르시와 리암을 비롯해 사람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탑에 드나들 수 없다. 우리가 직접 탑을 나가야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니 직접 나가야 했다.

…그리고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로제 아티어스, 살려두셨죠.”

그녀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알버트의 눈이 짙게 내려앉았다.

미간을 좁힌 알버트는 다소 신경질적으로 손을 올려 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제 감정을 다스리는 듯 숨을 내쉰 알버트가 날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널 위한 육체였는데, 어찌 죽이겠니. 감옥에 가둬두었지.”

“…….”

“더 이상 그럴 필요는 없겠지만.”

심연에서부터 긁은 목소리는 깊은 증오로 물들어 있었다.

이는 알버트가 로제 아티어스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자비였을 것이다.

로제 아티어스는 자신이 알버트를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그가 불행하길 바랐다. 그래서 나를 죽이려 들었던 것이다.

나와 알버트를 향한 로제의 행동은 무슨 이유를 들어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녀의 비틀어진 애정에 고통받은 알버트나, 죽을 위기를 거친 나는 피해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알버트는 로제의 존재조차 제대로 몰랐다.

뿐만 아니라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죽을 뻔했다.

로제에게 그녀가 내게 한 만큼은 아니더라도 되갚아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알버트와 헤어지며 느껴야 했던 고통을 되돌려 주고 싶었다.

로제에게 가장 큰 고문은 나와 알버트가 행복해지는 것이겠지. 시간을 너무 끌 수는 없었다.

로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였다.

감옥에 가둬둔 것은 임시방편이고 그녀의 행동에 대한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져야 했다.

영혼이 아니라 몸을 지닌 내게 로제의 육체는 이제 불필요하니, 더 이상 걱정할 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이대로 로제를 살려두기가 껄끄러웠다.

나와 알버트의 힘은 로제의 것을 훨씬 뛰어넘지만,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하는 흑마법은 자신의 개인 능력과 전혀 다른 문제였다.

때문에 그녀를 살려두면 알버트와 내게 또 어떤 짓을 할지 몰랐다.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게 낯설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알버트는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 익숙할지 몰라도, 나는 아니니까.

하지만 어느 한쪽이 끝내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뫼비우스의 띠라면.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고통받게 하는 이에 대한 처벌이라면.

두렵더라도 외면할 수 없다.

나는 로제가 더 이상 나와 알버트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길 원했다.

이를 이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로제 아티어스의 영원한 안식이다.

그리고 난 로제가 죽기 전에, 그녀에게 복수하고 싶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려던 대가를 조금이나마 치르게 하고 싶다.

“한번 만나고 싶어요.”

죽음을 앞둔 그녀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복수는, 그녀의 선택이 나와 알버트의 행복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살아 있으며 알버트와 계속 행복할 것임을 뇌리에 박아주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해 낸 최고의 복수였다.

나는 정신적인 고통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고 있다.

그녀가 자신의 생명까지 쏟아부어 한 모든 일이 부정당하고, 오히려 우리를 이어줬다는 걸 아는 순간 그녀는 견딜 수 없어 할 것이다.

알버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시다.

“네가 무엇 하러.”

“복수하려고요.”

“내가 대신하마.”

복수라는 말에도 알버트는 아직 그녀와 내가 만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안심되지 않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복수를 대신 해주는 것은 사양이다. 나는 고개를 단호히 저었다.

“제가 멀쩡하다는 걸 보여주는 것도, 복수의 일부인걸요.”

나는 손을 올려 알버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무엇보다 내게는 확신이 있었다.

“안심해요. 로제가 또 무엇을 하든, 나와 당신을 갈라놓을 수는 없을 테니까.”

그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서로를 만나고 구원했다.

“그리고 어떤 상황이 오든 간에 우리는 서로를 사랑할 테니까.”

나는 우리 사이에 그만큼의 믿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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