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나는 알버트를 수절시킨 대가를 톡톡하게 치렀다.
그의 품에서 이제 제발 자게 해달라 애원했지만 헛수고였다.
그는 이제 그만하고 싶은 마음을 이해한다고 하면서 조곤조곤한 말투로 나를 어르고 달랬다.
한마디로 놓아주지 않았다는 말이다.
온몸을 감싸는 희열에 몇 번을 울고 난 후에야 알버트는 못 이기는 척 내 옆에 누웠다.
손가락 하나도 까닥할 수 없던 나는 숨만 쌕쌕 내쉬었다.
커튼 사이로 조금씩 햇빛이 스며들었다. 알버트가 내 눈가를 어루만지며 피식 웃었다.
“우는 얼굴이 생각보다 예뻐서 악취미가 생길 것 같구나.”
나는 질겁하며 중얼거렸다.
“그런 취미는 별로인 것 같아요.”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니 난 오히려 좋은데.”
기뻐서 흘리는 눈물만큼 귀한 것이 어디 있겠니. 작게 중얼거린 알버트가 내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떼주었다.
“억울하기도 하거든. 난 많이 참았는데.”
처음에는 농담을 하나 싶었는데 얼굴이 너무 진지했다.
그의 체력이 좋은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경악하던 나는 화제를 돌렸다.
“저 진짜 졸린데….”
상황을 모면하려 한 말이었지만 하고 나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밤새도록 시달리면서 한숨도 못 잤으니까.
턱을 괸 채 내 얼굴을 들여다보던 알버트가 손을 들어 내 눈꺼풀을 슬쩍 덮어주었다.
나는 그의 손을 내리고 시선을 맞췄다.
“알버트는요.”
“난 괜찮단다.”
말간 웃음을 지은 알버트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아무리 대단한 알버트라도 눈가에 드리운 음영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
“어릴 적이나 지금이나… 왜 괜찮다는 말만 하려 드는지 모르겠어.”
나는 손을 올려 그의 눈꺼풀을 닫아주었다. 눈을 감으니 긴 속눈썹이 더 선명히 보였다.
“마지막으로 제대로 잠을 청하신 때가 언제예요?”
“…말하지 않는 게 낫겠구나.”
드물게 알버트가 묵비권을 행사했다. 듣지 않아도 알 만했다.
평소 그의 체력을 생각하면 잠을 자지 않아도 생활이 가능할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사람이 잠은 자고 살아야지.
어쩌면 알버트가 좀 미친 것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생긴 불상사가 아닐까. 충분히 일리 있는 가설이다.
“당신이 자는 모습도 보고 싶은데.”
내 말에 픽 웃은 알버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 드래곤 새끼는.”
“드래곤 새끼가 아니라 하양이….”
내가 한숨을 내쉬며 지적하자 알버트가 모르겠다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였다.
“…하양이가 좀 그러면 화이트는 어떠세요?”
나는 밖에서 하양이라 부를 수 없어 만들었던 이름을 떠올렸다.
화이트라. 중얼거리던 알버트가 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생각해 보려는 모양이다. 뭐, 단번에 호칭이 달라질 거란 생각은 안 했으니까.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은 알버트가 중얼거렸다.
“너를 위해 준비해 둔 것이 많아.”
“…….”
“하지만 이야기해 주는 건 아쉽게도 뒤로 미뤄야겠구나.”
“어째서요?”
“내가 거부할 수 없는 명을 받아서.”
그 명을 내린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고도 남았다.
“아시면 잘 지켜주세요….”
푸시시 웃은 내 눈꺼풀도 점점 감겼다. 커튼 사이로 비치는 빛을 친구 삼아 우리는 잠에 빠져들었다.
***
알버트가 잠에 빠진 건 찰나에 불과했다. 그를 좀먹는 불안감에 긴 잠은 잘 수 없었다.
그는 아직도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 제 옆에 누가 있는지도.
제 옆에서 잠든 정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알버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깔끔하게 옷을 차려입은 그는 정신없이 잠에 빠져든 정인의 옷을 갈아입혀 주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
자신만 있으면 모를까, 드래곤이 언제 올지 모르는데 이렇게 놔둘 수는 없었다.
부엌에 내려가 있을까 싶었지만 정인과 잠시라도 헤어지는 건 불안했다.
저를 좀먹는 감정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떨쳐낼 수 없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도, 몇 번이고 품에 안아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은 이 갈증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하리라.
주먹을 쥔 손에 핏줄이 불거졌다. 미간을 좁힌 얼굴에 진 그늘은 심연을 닮아 있었다.
오랜 시간 기다려야 했던 자의 고독 혹은 불안감이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어.”
앞머리를 헤집던 알버트는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알버트다.”
자신을 향해 삿대질을 하는 남자의 긴 머리가 찰랑거렸다.
푸른 기가 살짝 남아 있는 은발, 맹한 말투에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얼굴을 할 만한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이제 새끼라고는 할 수 없겠군.”
알버트가 픽 웃자 하양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앉아 있는 침대 앞에 풀썩 앉았다.
“음….”
알버트를 바라보던 하양이는 인상을 살풋 찡그렸다.
알버트와 있을 때마다 서로 싸우는 게 일상이었다 보니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랐던 탓이다.
알버트는 먼저 입을 열었다.
“네가 옳았어.”
그보다 맞는 말이 어디 있을까.
자신의 이기적인 부름은 정인을 죽일 뻔했고, 이 새끼 드래곤과의 계약은 그녀의 생명을 구해냈다.
알버트의 칭찬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던 하양이는 환하게 웃었다.
“죽이지 않는다고 했잖아.”
다소 으스대는 목소리는 약속을 지킨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아이 같았다.
하양이는 알버트를 보며 과거의 마지막 기억을 헤집었다.
자신과 정인이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가지 말라 울부짖던 어린애와 지금 알버트의 모습이 이상하게 겹쳐 보였다.
어린 알버트가 정인에게 얼마나 의지했는지 그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생에 삶의 이유를 부여해 줬던 것처럼, 정인은 어린 알버트의 삶에 살 이유를 만들어줬던 것이다.
“음… 나도 혼자 두고 갔던 거 미안해.”
돌아와야 해서 어쩔 수 없었어. 하양이가 쩔쩔매며 내뱉는 변명에 알버트는 픽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어린 자신에게 전부였던 세상이 무너졌던 건 지금 정인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어디 갔다 오는 거지?”
“알렉산더가 있나 찾아보려고.”
“…알렉산더?”
알버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기억 속에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으음, 사람은 아니고 드래곤인데… 내가 만나보고 싶어서.”
“그럼 지금 나가서 마저 찾아보는 것은 어떤가 싶은데. 수색은 한번 시작했을 때 계속하는 것이 좋아.”
하양이에게 한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수색을 시작하면 끝까지 밀고 가는 게 좋다는 말을 한 장본인이 바로 그 자신이었으니까.
정인을 찾는 일도 여기까지 끌고 와서 결국 성공시키지 않았나.
“그런가… 알버트는 똑똑하니까 맞을 것 같기도 하고….”
하양이가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자 알버트는 그를 살살 구슬리기 시작했다.
“원하면 내가 병력을 보내 도와줄 수도 있어. 이 세계에 있는 건 확실한가?”
“아마도.”
하양이는 알렉산더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옆에 곤히 잠든 정인을 보며 팔짱을 끼고 고뇌했다.
“하지만 정인을 혼자 둘 수도 없고….”
“내가 옆에 있을 텐데.”
“그건 그렇네.”
하양이는 인정했다. 이 세계에서 알버트 옆보다 안전한 곳을 없을 터였다.
정인도 강해졌으니 애초에 위험에 빠질 일이 드물 테지만.
알버트는 하양이가 거의 넘어왔다는 것을 확신했다. 눈빛이 흔들리는 게 실시간으로 보였다.
“네가 반려라 칭하던 우리가 오랜만에 서로를 만났으니 단둘이 있을 시간도 필요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회심의 한 방을 던졌다.
“어린 내게 미안했던 걸 이렇게 갚는 것이 어때.”
아까 전 하양이가 내보였던 죄책감까지 알뜰하게 이용한 알버트는 결국 하양이를 설득해 내는 데 성공했다.
물론 하양이도 단순히 죄책감 때문에 알버트의 제안을 수락한 것은 아니었다.
하양이는 알렉산더가 만일 살아 있다면, 정인과 다시 만나보기 위해 이 세계를 떠돌고 있을 거라 확신했다.
정이 없는 척하면서 그와 정인을 챙겨줬던 드래곤이다.
정인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구했다면, 이대로 인사도 없이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정인도 알렉산더를 다시 보면 좋아하겠지.’
드래곤인 알렉산더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런 쪽에서 성체가 된 하양이는 적격이었다.
만일 알렉산더가 다시 불행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더라도 자신이 먼저 알렉산더의 죽음을 알 수 있다면, 정인을 위해 그 사실을 숨길 수 있다.
정인이 우는 걸 보는 건 한 번으로 족했다.
슬퍼하는 모습은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
정신없이 잠들었다 깨어난 나는 알버트와 돌아온 하양이 사이에서 늦은 아침을 먹었다.
오랜만에 먹는 감자국과 뒤늦게 한 밥이었다. 초라한 밥상이지만, 알버트는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다.
나와 알버트를 잇는 수갑은 여전했다.
밥을 먹고 난 후, 하양이는 알렉산더를 찾는 일을 재개하겠다고 나섰고 나는 알버트와 탑 안에 남았다. 우리는 할 이야기가 남아 있었다.
드디어 알버트와 제대로 이야기를 한다! 나는 다소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어린 알버트를 구한 건 저였어요.”
과거로 가는 것이 나의 시련이었다는 사실부터 차근차근 이야기를 시작했다.
알버트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연회의 당신을 구할지 말지 정해야 했고….”
예프넨 후작의 연회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다시 좀 울컥했다. 내가 너무 무력했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당신을 두고 돌아왔어요.”
내가 한 이야기는 모두 알버트의 기억과 맞아떨어졌다. 내가 그에게 걸었던 포겟 마법의 효력이 사라진 것이다.
이는 알버트가 막 드래곤의 계약자가 된 나와 비슷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는 걸 의미했다.
“이제 알버트의 이야기를 들을 차례네요.”
나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그 앞에 가 앉았다.
폭신한 카펫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진지한 얼굴로 시선을 맞췄다.
“나를 찾기 위해 여러 곳을 돌아다닌 것 같은데 맞나요?”
알버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살아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로제 아티어스가 네게 건 주문의 마법진이 계속 남아 있었으니까.”
“아아….”
알버트의 말을 들으니 상황을 납득할 수 있었다. 내가 했던 가정이 맞았다.
알버트는 나를 찾기 위해 모든 나라를 뒤졌고 결국 모든 나라를 통일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아니, 그래도 어떻게 황제가 되지? 아무리 생각해도 대단했다. 어제 잠시 보았던 궁의 규모만 생각해도 그랬다.
“황궁을 본 소감은 어떠했느냐.”
알버트가 문득 던진 질문에 나는 어제 보았던 으리으리한 모습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말 화려하고 크더라고요. 눈이 머는 줄 알았어요.”
내 말에 알버트의 눈매가 곱게 휘어졌다.
“네게 바치는 두 번째 선물이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구나.”
“…두번 째 선물이요?”
“그래, 첫 번째는 나거든.”
자신을 가리키며 선물이라 말한 알버트가 뻔뻔히 대꾸했다.
“선물 리본이라도 묶고 올까?”
나는 황급히 답했다.
“아니요!”
“격한 부정은 긍정이라 하던데.”
나를 향한 나른한 미소에, 왠지 그의 욕망이 스며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