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124화 (124/156)

124화.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이건 수갑이 맞았다.

나는 웃으며 답했다.

“이런 거 없더라도 평생 곁에 있을 텐데 왜 그러셨어요.”

내 말에 알버트가 입가에서 서서히 미소를 지웠다. 무표정한 모습이었다.

내 곁에 있을 때 냉한 얼굴을 하는 건 거의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순간 그가 낯선 이처럼 느껴졌다.

내가 흠칫하는 것을 본 알버트가 눈을 깜빡였다.

그의 얼굴이 다시 풀어져 내가 아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자리에서 일어난 알버트는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 옆으로 다가온 알버트는 내 어깨에 제 이마를 묻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자의이든, 타의이든 이미 내게서 두 번이나 멀어졌지 않니.”

사실을 말하는 목소리는 지독한 쓸쓸함을 담고 있었다.

…조금은 납득이 됐다.

두 번 다 내가 원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그에게는 평생의 상처로 남을 수밖에 없던 순간이었다.

나는 다른 손을 올려 그의 등을 토닥였다.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았어.”

그가 몸을 살짝 떨었다. 심연을 침잠하는 듯한 목소리는 사람의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네가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면 어찌해야 하나.”

나는 잠자코 그의 말을 들었다.

“목숨을 바친다면, 구할 수는 있을까.”

“…….”

“내가 그날 탑에서 함께 나가자고 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진 않지 않았을까….”

내가 없는 1년 동안, 그는 나를 찾고, 내 행방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또 자신을 책망했다.

매 순간 자신의 선택을 되새기며 괴로워했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아렸다.

그가 잘못한 것이 뭐 있다고.

“알버트, 저 봐주세요.”

내 말에 알버트는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그가 움직이며 가운의 앞섬이 느슨해졌다. 나도 모르게 가운에 시선이 갔다.

처음에는 외출복인가 싶었는데 앞을 여민 가운은 예전에 잠자리에 들 때 입었던 것을 똑 닮아 있었다.

살짝 풀어 헤친 가운을 걸친 남자의 얼굴은 평소의 정제된 미보다, 날것의 욕망으로 물들어 있었다.

“옷은 언제 갈아입으셨어요?”

“네가 잠든 사이에.”

대체 언제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깨어날 때까지 당연히 기다리려 했다는 태도가 오히려 나를 미안하게 만들었다. 깨워도 되는데.

“네 곁에 더러운 옷을 입고 누울 수는 없지 않으냐.”

정말 깨워도 되는데. 내 인상이 어두워지는 것을 본 알버트가 다독이듯 말했다.

“안심하거라. 그냥 보기만 했단다.”

아무래도 내가 다른 것을 무서워한 줄 안 듯했다.

“당신을 믿으니까 그런 건 신경 안 썼어요.”

내가 바로 해명하자 알버트가 픽 웃었다.

기분이 미묘했다.

이렇게 광기와 열기가 뒤섞인 눈을 하고, 내게 그와 연결된 수갑까지 만들어놓았으면서도, 감히 나를 깨울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는 게 얼떨떨해서….

“그저….”

살짝 치켜뜬 알버트의 속눈썹이 팔랑였다.

“곁에 있지 않으면 네가 다시 사라져 버릴까 두려워서 한시라도 눈을 뗄 수가 없었어.”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있던 손을 풀어 그의 양쪽 뺨에 손을 맞댔다.

“나 이제 어디 안 갈 거예요.”

“…….”

“당신 곁에 평생 붙어 있을 거란 말이에요.”

제대로 해본 적 없던 사랑 고백이지만, 지금이 적기다 싶었다.

알버트에게 확신을 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으니까.

나는 용감히 입을 열었다.

“당신을 사랑하니까.”

알버트가 눈을 홉떴다. 사랑 고백을 처음 들은 아이처럼 얼빠진 얼굴을 하는 모습이 낯설었다.

사랑에 대해서는 모든 걸 알 것 같은 노련한 남자가, 사춘기를 막 맞이한 소년 같은 얼굴을 한다.

그보다 내 얼굴이 더 달아올랐다.

빨개진 얼굴을 식히기 위해 애써 숨을 고르던 나는 가볍게 눈을 흘겼다.

“제가 사랑하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왜 새삼스레 그런 얼굴을 하세요?”

내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한 알버트가 평소처럼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눈가에 깃들었던 기묘한 광기는 봄에 눈이 녹듯 녹아내렸다.

“네가 이렇게 말한 적은 없으니까.”

그가 나를 보챘다.

“다시 해주거라.”

“사랑해요.”

쑥스러운 것도 무릅쓰고 말했지만, 그는 또 듣지 못한 사람처럼 다시 보챘다.

“다시.”

“사랑해요.”

다시. 낮게 내려앉은 목소리는 몇 번이나 그에게 사랑을 고백하라 종용했다.

나는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알버트가 안심할 수 있다면 나는 몇 번이고 해줄 수 있었다.

알버트의 입꼬리가 예쁜 곡선을 그렸다.

다시 보는 그의 웃는 얼굴은 세상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벌써 아침이 온 것처럼 빛이 찾아왔다. 그의 등 뒤에 후광이 비추는 듯했다.

내 심장은 지금 막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세차게 박동했다.

“사랑해요.”

“더 가까이서 듣고 싶어.”

내게 중얼거리듯 말한 알버트는 내 어깨에 기댔다.

나보다 훨씬 덩치가 커서 거의 내가 그에게 기대는 듯한 모양새긴 했지만.

“아직 들어야 할 이야기가 많은데….”

“저도 이해해요. 우선 어릴 적 당신을 만난 것부터 설명을-”

“사랑한다는 말이 제일 듣고 싶구나.”

하지만 내 말은 알버트의 애원에 그대로 먹혀들었다.

알버트가 내게 이렇게 약해진 모습을 보인 건 처음이라 감히 이야기를 하자 할 수 없었다.

사랑한다는 말도 이야기이긴 했으니까, 계속 이야기를 했다는 말도 틀리지는 않았다.

사랑한다, 지금도, 앞으로도 당신만을 사랑하겠다…. 계속 말하고 있으니 고백이 마치 주문이라도 된 것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그와 내 사이에 영원히 존재할 주문.

어느새 나는 알버트에게 덩달아 몸을 기댄 채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다.

“사랑해요.”

이때, 목덜미에 살짝 따끔한 게 느껴졌다. 미약하게 인상을 찌푸린 나와 알버트의 시선이 닿았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열기가 그를 감싸고 있었다.

“나도 사랑한단다.”

뻔뻔히 말한 알버트는 내 목에 입술을 맞춘 후 고개를 들었다.

이윽고 제 입술을 살짝 핥은 알버트가 빙그레 웃었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내 입술에 내려앉았다.

“정인.”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계속 이렇게 나를 불렀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발음이었다.

그는 계속 연습했는지도 모른다. 나를 부를 수 있을 날이 올 때까지.

“네 입술이 참 예뻐서 키스하고 싶어.”

“…….”

“코가 예쁘고 눈이 예쁘구나.”

“…….”

“사실 네 모든 게 예뻐서, 키스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구나.”

이 정도면 오래 참지 않았느냐. 그가 낮게 중얼거리며 내 아랫입술을 어루만졌다.

“허락해 주겠느냐.”

감미로운 목소리는 달고, 어조는 우아하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도 불구하고, 알버트는 내 허락을 구했다.

이런 세심한 행동에 나는 그가 나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말하는 대신 그와 이마를 맞댔다. 내 허락을 눈치챈 그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이윽고 알버트가 내 입술을 덮었다.

입을 헤집는 열기에 온몸이 뜨거워졌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욕망에 내 얼굴도 덩달아 달아올랐다.

숨에 찬 내가 그의 가슴을 몇 번 두드리고 나서야, 알버트는 입을 뗐다.

못내 아쉬운 얼굴은 아직 입맞춤이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다시 입술을 맞대려는 모습에 화들짝 놀란 나는 아직 가쁜 숨을 고르며 그의 입 앞에 내 손바닥을 댔다.

“잠시만….”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알버트는 정말 왜인지 모르겠다는 듯 순진무구한 얼굴을 했다.

능청스러운 모습이 얄밉기는 했지만 아까 전보다는 이성을 찾은 것 같아 다행이었다.

그의 낯선 모습이 두렵지만, 계속 보고 싶다는 열망이 조그맣게 피어올랐다.

나조차도 몰랐던 모순적인 생각에 놀랐다. 하지만 이내 긍정했다.

나는 그가 내 앞에서,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이 좋으니까.

그가 이렇게 평정심을 잃은 얼굴을 하는 것에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안심하게 되니까.

그도 내 앞에서 항상 여유로울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왜 인상을 써.”

알버트가 조곤조곤 묻는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알버트가 심각한 얼굴을 했다.

“설마 내 키스가 형편없었느냐.”

아니요…? 그건 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내가 격하게 고개를 흔드는데 곰곰이 생각하던 알버트가 예쁘게 웃었다.

“그럼 네가 더 책임져야지.”

제가 책임지려 했던 것은 맞는데, 왜 ‘더’가 붙는 걸까요.

내 생각을 눈치챈 알버트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투정하듯 말했다.

“네가 없는 동안 수절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

“혼자서 버티느라고.”

‘혼자’라는 말이 유난히 강조된 것처럼 느낀 건 분명 내 기분 탓일 테다.

안 그래도 달아올랐던 얼굴이 붓으로 막 칠한 것처럼 새빨개졌다.

입만 뻐끔거리는데 알버트가 나를 책망했다.

“모든 게 준비되었는데 한 달 뒤에 온다던 사람이….”

나를 보는 눈빛에 형형한 무언가가 맴돌았던 것도 같다.

달아오른 얼굴도 잠시, 그의 원망이 어디서 왔는지 생각하니 머릿속이 차분해졌다.

“알버트, 알고 있을 테지만-”

그래, 이제 슬슬 이야기를 할 때가 되었….

“그래, 나도 사랑한단다.”

다고 생각하는 것도 잠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준 알버트는 다시 입술을 붙였다.

사막에 떨어진 그에게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길고 집요한 입맞춤이었다.

떨어진 시간을 모두 다 받아내겠다는 것처럼 고집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상냥했다.

나를 다 잡아먹을 것처럼 굴면서, 섬세하게 그지없는 행동에서는 배려심이 돋보였다.

서로 대조되는 표현이었지만, 그게 지금의 알버트와 딱 들어맞는 말이었다.

내가 숨을 고르는 순간에도 키스는 내 얼굴 자잘한 곳에 흩뿌려졌다.

그가 주는 애정이 너무 달아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끈적끈적한 꿀에 온몸이 빠진 것 같다. 내가 움직일수록 더 깊게 빠져든다.

“…수갑은 잠시 없애야겠구나. 이대로는 옷을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알버트가 말하자마자 손이 가벼워졌다. 속내가 무엇인지 아는 건 빨랐다.

그는 어느새 내 양쪽 귀 옆에 손을 올린 채 위에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잔뜩 흐트러진 얼굴에는 나를 향한 욕망이 남아 있었다. 지금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바보는 없었다.

내 목덜미를 어루만지던 손은 잠옷의 단추로 미끄러지다 멈칫했다.

“네가 너무 빠르다 생각할 수 있는 것 안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이 유난히 선명했다.

“하지만 내게 지금까지의 기다림은 억겁과 같았어.”

나는 안다. 지금 이 남자가 이렇게 말하면서도, 하기 싫다는 말 한마디면 고분고분 따라줄 것을.

“평생 나를 기다린 사람에게 어떻게 더 기다리라 할 수 있겠어요.”

나는 웃으며 그에게 손을 뻗었다.

우리의 밤은 이제 시작이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