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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123화 (123/156)

123화.

오랜만에 뽀얀 쌀밥을 한 나는 감자국에 밥을 말아 먹었다.

포슬포슬한 감자와 함께 따듯한 국물이 예술이었다. 역시 한국인은 국물이다.

칼칼한 감자국을 할까 하다 알버트가 생각나 고춧가루는 넣지 않았다. 뽀얀 국물도 맛있었으니 후회는 없다.

구운 고기에서 흘러나오는 육즙은 또 얼마나 환상인지! 이곳에 살 때 병사들이 가져다주던 재료보다 훨씬 질이 좋았다.

알버트는 언제쯤 돌아올까. 생각에 잠긴 나는 우선 아직 남은 감자국을 팔팔 끓였다.

다 먹은 후에 국을 한 번 끓이는 건 중요하지!

어느덧 어둠이 찾아든 밤이 되었다.

위로 올라간 나는 책장을 구경하다 마법 서적을 하나 꺼내 들었다. 마법진에 대해 적힌 것이었다.

예전에는 이걸 대체 어떻게 다 이해하고 외우지 싶었는데 지금 보니 동화책을 읽는 것처럼 쉬웠다.

알버트가 나를 가르칠 때 얼마나 답답했을지 약간이나마 가늠할 수 있었다.

천재가 된다는 건 이런 느낌이구나. 짜릿해, 너무 좋아! 공부하는 게 재밌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젠 알 것 같은 기분이다.

나는 한참이나 책을 들여다보다 옷을 갈아입었다.

옷장 안에는 헐렁한 잠옷이 있었는데 그게 생각보다 내게 잘 맞았다. 원피스 타입이라 입고 다니기 딱 좋았다.

저녁을 맞아 커튼을 친 나는 알버트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생각했다.

부디 그가 탑에 빨리 돌아오길 바라면서 나는 잘 준비를 했다.

“으음….”

그런데 하양이가 어디에서 잘지가 문제였다.

드래곤으로 돌아가면 더 잘 곳이 없고, 다 큰 성인 남자의 몸을 한 하양이와 한 곳에서 자기도 뭐했다.

…그런데 이걸 하양이가 이해할 수 있을까?

나와 알버트를 반려로 엮었던 것을 보면 인간관계에 대해 완전히 무지한 것은 아닌데,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모르겠어서 더 골치가 아팠다.

하지만 내 고민은 쓸데없는 것으로 판명 났다.

“나는 다락에서 잘래….”

하양이가 먼저 다락에서 자겠다 청한 것이다. 알버트와 함께 있었던 공간보다 내 공간이 더 익숙한 모양이었다.

다락도 내가 나갔던 날처럼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바닥에 있는 내 잠자리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여기서 자도 돼?”

나만 폭신한 침대에서 자는 게 마음에 걸렸는데 하양이는 너무 흔쾌히 답했다.

“응.”

그러다 문득, 하양이에게 알렉산더에 대해 아직 말해주지 않았다는 게 생각났다.

“하양아.”

“응?”

하양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은빛 머리카락이 달빛에 눈부시게 찰랑거렸다.

빛을 받아 빛나는 모습은 정말 하양이가 사람이 아님을 깨닫게 했다.

현실로 돌아왔으니 알렉산더의 미래가 바뀌었는지도 알 수 있겠지. 이에 대해서 하양이도 당연히 알 권리가 있었다.

나는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알렉산더가 살아 있을 수도 있어.”

확실하지 못한 사실에 대해서는 섣불리 확신하지 않는 것이 옳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침묵 끝에 하양이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나는 하양이에게 과거에서 일어난 내 시련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예프넨 후작이 연 연회에서 만났던 알렉산더와, 내가 그에게 했던 경고에 대해서.

만일 알렉산더가 내 경고를 듣고 예프넨 후작을 끝까지 경계했다면 그는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도 있었다.

이야기를 듣고 난 하양이는 생각에 잠긴 듯 턱을 쓰다듬었다.

우수에 젖은 눈빛은 학자를 연상케 했다. 골똘히 생각하던 하양이가 입을 열었다.

“나 좀 나갔다 올게.”

“…지금 시간에?”

이미 밖은 늦은 밤이었다.

“응, 정인이 잘 거니까 지금 시간이 딱 적당할 것 같아.”

하양이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까지 내가 쓰던 다락방에서 잘 수 있다며 해맑게 웃던 하양이가 생각을 바꾼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밖에 없었다.

“알렉산더를 찾아보고 싶은 거구나?”

“응.”

하양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곰곰이 생각하던 하양이가 살짝 눈매를 찌푸렸다.

“비록 나를 좀 약 올리긴 했어도….”

하지만 이내 표정을 푼 하양이는 희미하게 웃었다.

“좋은 드래곤이었으니까.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한번 다시 만나보고 싶고, 만일 곤경에 처해 있다면 도와주고 싶어.”

하양이가 나와 알버트가 아닌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고 돕는 것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내가 알렉산더한테 받은 것은 갚고 싶어….”

하양이가 이렇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고통은 사람을 여러모로 성장시킨다.

비록 하양이는 사람이 아니지만, 유독 그 사실이 마음에 와닿았다. 고통으로 인해 하양이의 생각의 척도도 바뀐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죽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죽음에 대한 욕구가 사라진 후, 하양이에게는 하고 싶은 일에 정신을 쏟을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조금씩 자신의 성정을 알아가는 하양이를 보니 마음이 따스해졌다.

하양이가 머쓱한 듯 목덜미를 만지며 내 시선을 피했다.

“물론 드래곤으로서 이게 이상한 말이라는 건 알지만.”

“아냐, 난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해.”

“정말?”

내 말에 하양이가 눈을 반짝였다. 이럴 때 엿보이는 모습은 어릴 적 알버트를 떠올리게 한다.

아직 때 묻지 않은 순수함. 나는 하양이가 이걸 오래 가지고 있었으면 했다.

“그럼 내일 아침 먹을 때쯤 돌아올게.”

그렇게 하양이와 짧은 작별 인사를 한 나는 잘 준비를 끝내고 침대에 누웠다.

베개에서 희미하게 알버트의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한참이나 그의 모습을 떠올리다 잠들었다.

***

그리고 새벽에 얼핏 눈을 떴을 때 나는,

“일어났느냐.”

그토록 보고 싶었던 알버트를 마주했다.

처음에는 꿈인 줄 알았다. 어리둥절해서 눈만 깜빡이고 있는데 침대맡에 앉아 있었던 알버트가 가까이 다가왔다.

오감이 열심히 작동했다.

선명하게 보이는 알버트의 모습이, 그의 냄새가, 나를 만지는 촉감이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다.

“이거 꿈 아니에요?”

“…꿈이었으면 좋겠니.”

“아니요, 그럴 리가.”

짧은 침묵 뒤에 흐르는 말에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를 만나길 얼마나 고대했는데.

그제야 실감이 났다. 나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알버트의 시선이 살짝 나를 훑었다. 집요한 눈길이었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으니, 이 정도는 당연했다. 나는 그가 그러하고 있듯이, 내 연인의 얼굴을 열심히 응시했다.

내가 없는 동안 더 날카로워진 턱선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눈매는 예전보다 더 깊어졌고 콧대도 지금 막 완성한 석고상처럼 오뚝했다.

언제 보아도 질리지 않을 얼굴이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나와 알버트의 눈빛이 마주쳤다. 나는 배시시 웃었다.

살짝 찌푸렸던 알버트의 미간이 곱게 펴지고 눈매가 곡선을 그리며 휘었다.

“깨우고 싶지 않았는데.”

속삭이는 듯 나른한 목소리가 귓가에 착 달라붙었다.

하지만 이보다 내 시선을 끈 건, 붉어진 눈가였다.

…누가 봐도 운 흔적이다.

눈가에 눈물 자국도 선연히 남아 있었다.

아직 어두운 방에 채 치지 못한 커튼 사이로 빛이 스며들어 그의 얼굴을 비췄다.

붉은빛으로 물든 얼굴이, 무섭기보다 안타까웠다.

“…너였어.”

나지막이 뇌까린 후, 내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집어넣은 알버트가 뒤통수를 살살 쓰다듬었다. 내가 어린 알버트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그의 말은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나를 보는 눈빛에서 많은 게 보였다. 여러모로 복합적인 감정은 단순히 1년 동안 헤어져 있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었다.

마치 도자기를 만지듯 섬세한 손길에는 그리움이 듬뿍 담겨 있었다.

“평생 기다린 너를 이제야 다시 만났구나.”

그의 목소리가 눅진하게 내려앉았다.

이내 내 머리카락을 손에 쥔 그는 새하얀 백발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알버트는 과거의 첫사랑이 나였다는 것까지 알아챈 것이다.

한순간이라도 그가 변했을지 모른다 무서워했던 내가 부끄러워진다. 이래서 사람은 직접 보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

할 얘기가 많았다.

그가 어떻게 지냈는지도 알고 싶고, 내가 왜 그렇게 떠나야 했는지, 왜 그의 기억을 지웠는지에 대해서도 제대로 설명해 줘야 했다.

그런데 그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자꾸 울컥하게 되는 건 왜일까.

말을 잇기 힘들다. 눈가에 진 그늘의 농도가 너무 짙어서 쉬이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내가 없던 시간의 당신은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내 모든 시간이 알버트를 위해서였다 해도, 결국 그가 혼자 있는 시간도 존재하지 않았나.

혼자 고독을 곱씹으며, 내 생사에 의문을 품어야 했던 지난한 나날이.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겨우 입을 열었다.

“알….”

버트, 라고 말하며 그에게 손을 뻗으려던 나는 손목에 느껴지는 무게에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알버트가 준 팔찌가 이렇게 무거웠던가.

고개를 돌린 나는 팔찌에 얇은 백금색 줄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줄이 어디로 이어졌나 시선으로 열심히 따라간 나는 이게 알버트의 왼쪽 손목과 맞닿아 있는 걸 발견했다.

그의 손에는 내가 낀 것과 같은 백금색 팔찌가 끼워져 있었다.

내가 낀 것과 똑같은 것으로 맞춘 듯했다.

아니 왜 줄이 이어져 있지? 이건 한쪽씩 차고 있는 수갑 같잖아.

아직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머리가 팽팽히 돌아가는데 알버트가 살며시 내 턱을 그러쥐었다.

“어딜 보느냐.”

생각에 빠져 잠시 바닥을 본 것도 용서하지 못하겠다는 어조였다. 나는 얼른 고개를 들었다.

“나를 봐야지.”

알버트가 야살스레 웃었다.

음,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은데.

나를 보는데 회까닥 돈 것 같은 알버트의 눈동자도 그렇고, 지금 나와 그를 이어놓은 사슬도 마찬가지다.

연인이 1년 동안 사라졌는데 그것도 무리는 아니지. 나는 우선 그를 안심시키기로 했다.

내가 아는 알버트는 더없이 이성적인 인간이니까, 이성을 찾으면 이런 건 없애줄 것이다.

우선 나부터 평소처럼 행동해야지.

“에이, 제가 알버트를 두고 어딜 보겠어요.”

“대답이 꽤 만족스럽구나.”

알버트는 서로 이어져 있는 팔찌를 낀 손을 올려 내 손을 잡고 깍지를 꼈다.

내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든 그의 손가락이 덩굴처럼 나를 옭아맸다.

…확실히 뭔가 이상해.

“그런데 이건 뭐예요?”

나는 애써 괜찮은 척하며 팔찌에 걸린 줄을 가리켰다.

“아아, 이거.”

낮게 웃는 모습이 왠지 섬뜩했다.

“널 옭아맬 수갑이란다.”

나른히 눈매를 치켜뜬 알버트가 내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소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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