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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122화 (122/156)

122화.

나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이를 악물었다. 알버트를 기다리려면 아직 확인해야 할 사항이 몇 가지 더 있었다.

“물이 나오려나?”

아직 수도가 제대로 연결되어 있는지도 확인해야 했다.

이곳 관리를 제대로 해놓은 것과 별개로 수도 같은 건 필요 없으니 끊어놓았을 수도 있으니까.

마법을 이용하면 다 쓸 수 있겠지만, 일상생활에까지 마력을 쓰고 싶지 않았다.

드래곤의 계약자가 되었어도 나는 여전히 수도꼭지를 틀어 물을 쓰는 것이 더 익숙하고, 직접 음식을 하는 게 좋은 사람이니까.

나를 이루고 있는 것들을 순식간에 너무 많이 바꾸고 싶지는 않았다.

욕실에 들어간 나는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돌렸다.

쏴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맑은 물이 뿜어져 나왔다. 예전보다 수압이 더 좋아진 것 같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바깥을 열심히 돌아다니느라 제대로 씻지도 못했다.

나는 흐르는 물에 손을 씻고 세수를 했다. 정신까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꼬르륵.

배 속에서 다시 천둥이 쳤다. 식욕이 돌아온 것이 오랜만이라 그런지 허기가 정말 잘 느껴졌다.

나는 고픈 배를 부여잡고 부엌으로 돌아왔다.

하양이는 의자에 앉아 식탁 위에 잘 개킨 담요를 베개처럼 베고 엎드려 있었다.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을 보니 예전 새끼 드래곤일 때 모습과 똑같은 것 같기도 하고. 하양이를 유심히 관찰하던 나는 창고 문을 열었다.

솔직히 여기 재료까지 채워져 있을 거란 생각은 욕심이란 거 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뭔가 있길 바랐다.

…그리고 창고를 연 나는 얼떨떨한 기분이 되었다.

창고 안이 내가 좋아하는 음식 재료들로 가득 차 있었던 탓이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주기적으로 채우는 듯 싱싱한 채소였다.

그뿐만인가? 떡볶이 재료와 상하기 쉬운 고기, 달걀, 고추장을 비롯한 각종 재료도 한국에서 공수해 온 것처럼 세심했다. 입에 군침이 잔뜩 돌았다.

영혼 상태일 때는 식욕도 없었고, 실제로 먹었던 음식은 케이크가 전부였기에 더 그랬다.

그리고 재료들의 상태를 확인할수록 현재 알버트가 어떤 상태인지 더 알 수 없었다.

탑의 상태를 보면 알버트가 주기적으로 관리하고 있다는 건 맞는데….

…그는 지금 수도로 돌아오는 중 아닌가? 한 나라를 함락시키는 데 걸리는 시간이 채소가 시드는 시간보다 빠르다고?

모든 나라를 통일하면서 정사도 돌보려면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터인데 대체 여기까지 어떻게 관리하는 거야?

그의 멀티태스킹 능력은 감탄을 뛰어넘어 경이롭기 그지없었다.

“…뭐 만들 거야?”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하양이가 옆에서 불쑥 물었다. 잔뜩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간단하게 먹자.”

알버트를 생각하니 그와 자주 만들어 먹던 감자국이 생각나던 참이었다.

고기도 있으니 구운 고기에다 국물로 감자국을 먹으면 좋을 듯했다.

재료를 모조리 가져온 나는 우선 냄비 안에 쌀을 안쳤다.

“나도 이제 알버트처럼 도와줄 수 있어!”

옆에 선 하양이가 씩씩하게 말했다. 자신의 손을 앞으로 내미는 모습이 다소 비장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하양이가 요리하는 건 알버트만큼이나 상상이 되지 않았다.

알버트와는 전혀 다른 이유긴 하지만.

“마음만 받을게. 뒤에서 구경해 줘, 하양아.”

“…왜 도와주면 안 되는 거야?”

시무룩한 얼굴을 보니 나까지 기분이 처지는 것 같다. 나는 하양이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를 다독였다.

“나중에 조금씩 알려줄게. 지금은 배고프잖아.”

내 말에 하양이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약속한 거야…?”

약속을 되새기듯 말투를 늘이는 모양새가 귀여웠다.

사람 같지 않은 신비로운 분위기와 전혀 다른 순수한 말투가 매력적이었다.

아이 같은 모습은 여전했지만 눈에 들어오는 모습이 하양이가 폴리모프한 모습이 이성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되새기게 했다.

가끔 하는 접촉에 내가 더 놀랄 때도 있었다.

나중에 알버트가 하양이를 보고 언짢아하는 건 아니겠지? 둘이 얼마나 앙숙인지 알았던 나로서는 그 사실이 가장 걱정되었다.

…하양이도 성체가 되었으니 더 열심히 알버트 속을 긁을 것 같기도 하고.

어릴 적 알버트가 싫어했던 성체 드래곤이 하양이라는 것을 알면 더 싫어할 것 같기도 했다.

으으, 진짜 그럼 어떻게 하지? 고민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나는 잡념을 떨치기 위해 더 열심히 요리에 집중했다.

퐁당퐁당. 알버트를 생각나게 하는 뽀얀 국물에 잘 썰어둔 감자가 들어가기 시작했다.

***

알버트는 턱을 괸 채 나른한 얼굴로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간청하는 이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턱선은 칼을 벼려놓은 것처럼 날카로웠다. 광기로 물든 눈은 금방이라도 누군가 죽일 것처럼 서늘했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이성의 선을 아슬아슬하게 지키는 군주의 얼굴은 명화 속 신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폐하, 이제 모든 곳을 돌아보고 정복하셨지 않습니까. 포기하실 때도 되었습니다.”

리암이 이제 그만하고 건강을 챙기라며 무릎을 꿇고 간청하고 있었다. 슈버트와 메르시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이 알버트 혼자서도 충분한 전쟁에 기어코 따라나선 이유는 하나였다.

사람 같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그를 설득하기 위해서.

하루에 30분도 자지 않은 채 정사를 보고, 나라를 떠돌며 점령하고, 아득바득 탑을 관리하는 그들의 주군이 죽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슈버트가 번쩍 손을 들며 용감히 말했다. 옆에서 메르시가 용감히 따라 말했다.

“제가 그녀를 찾겠습니다.”

“저도 마법으로 돕겠습니다.”

모두 가소롭기 그지없는 이야기였다.

“너희가 무슨 수로 그녀를 볼 수 있단 말이냐.”

알버트는 피식 웃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손에는 정인이 자신을 위해 맞춰주고 갔던 만년필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쓰는 것이 아까워 목걸이처럼 걸고 다니기만 하는 물건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알버트는 크라바트를 풀어 헤친 후 주먹을 꽉 쥐었다. 힘을 준 손에 핏줄이 불거졌다.

날카로워진 분위기와 더불어 그의 몸은 전체적으로 더 성장해 있었다.

마법에 이어 검술도 사람의 경지를 뛰어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찾아야 할 것이 있었으므로, 성장은 멈추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포기라니. 아직 1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눈을 번뜩이는 모습은 진심으로 의아한 기색을 보였다. 실제로도 그랬다.

평생을 헤매서라도, 자신은 정인을 찾을 것이다.

이 정도는 힘든 축에도 끼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이 대륙은 포기해야 할지도 몰랐다.

모든 곳을 쥐 잡듯이 뒤졌지만, 정인에 대한 정보나 그녀의 흔적 같은 건 전혀 찾을 수 없었으니까.

이 대륙에 없다면….

“슬슬 다른 대륙으로 넘어가 보아도 좋겠지.”

“폐하!”

“제가 업무를 도와드리는 데도 한계가 있습니다!”

메르시가 진심으로 울상을 지으며 부르짖었다.

환영 마법을 써 알버트를 돕는 것도 한두 번이지, 1년 동안 정처 없이 떠도는 알버트를 보는 건 신하로서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었다.

그녀도 정인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알버트를 1년 동안 도왔다.

하지만 때로 사람은 포기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이제 정인은 그만 잊-”

“거기에서 한마디만 더하면 네 목을 죄어주마.”

알버트가 서서히 손을 올리며 음산히 중얼거렸다.

회색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가 이 1년간 그의 손에 묻은 피처럼 붉었다.

숨 막힐 듯한 긴장감이었다.

알버트는 제 미간을 꾹꾹 문지르다 짓씹듯 말했다.

“아무리 너희라도 지켜야 할 선이 있는 법이야.”

리암과 눈을 마주친 알버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계를 보니 탑을 관리할 시간이었다.

“메르시, 가서 로제 아티어스의 상태나 확인하거라.”

“…알겠습니다.”

“다른 대륙으로 넘어갈 배편은 리암, 네가 알아보는 것으로 알고 있으마.”

“…….”

리암은 답하지 않았다. 알버트는 리암이 제게 실망했을 것임을 알았다.

하지만, 그러면 또 어떠한가.

어차피 자신은 이런 인간인 것을.

삶의 이유가 없는데, 살아가기 위해, 숨 쉬기 위해 자연스레 하는 일에 비난받는 것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만 해도, 자신은 리암과 슈버트, 메르시에게 예의를 지킨 것이었다.

결국 리암을 비롯한 인물들이 알버트의 방을 나섰다. 소파에 잠시 걸터앉은 알버트는 두통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

요즘 들어 이런 일이 많아졌다.

전쟁을 하고, 사람들과 맞서 싸우며 알버트는 1년 동안 계속해서 마력 고갈로 죽을 위기에 처하는 일을 반복했다.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을 거라 여겼던 마력이 조금씩 늘어났다.

이제 메르시 정도의 마법사는 우습게 볼 수 있을 만한 경지에 다다랐다.

…하지만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다.

‘네가 없는 세계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을.’

씁쓸히 웃음 지은 알버트는 순간이동할 준비를 시작했다. 탑에 가기 위해서였다.

전쟁 속에서도, 다른 나라를 방문하는 중에도 알버트는 꼬박꼬박 탑에 들렀다.

자신이 유일하게 정인을 마음 편히 추억하며 숨 쉴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해야 할 일이 산더미더라도, 이는 한 번도 미룬 적 없었다.

“텔레포트(Teleport).”

알버트의 시야가 뒤바뀌었다. 탑 앞에 선 알버트는 평소와 뭔가 다르다는 것을 직감했다.

심지어 그가 걸었던 마법에 균열이 가 있는 것도 보였다.

…누구지? 알버트는 자신의 마법을 뛰어넘을 수 있을 만한 실력자를 간추리려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이를 찾기는 역부족이었다.

들어가 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다. 순간 밀려오는 두통에 다시금 인상을 찌푸린 알버트가 신경질적으로 뇌까렸다.

“…두통에 죽을 것 같군.”

머리와 가슴이 자꾸 무언가 떠올리려는 것처럼 답답했다.

알버트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부엌에 뭔가 요리되어 있는 냄비를 발견했다.

“…….”

이곳에 들어와 생활하다니, 간덩이도 크군. 갈기갈기 찢어주는 것이 나을까, 사지를 자르는 것이 나을까.

이미 정상인의 범주를 뛰어넘는 생각을 하며, 알버트는 부엌을 지나쳐 바로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자신의 침대 위에 잠들어 있는 여자를 발견했다.

새하얀 백발에 선한 인상을 가진 자신의 첫사랑을.

‘왜 당신이 여기에….’

의문을 가지던 찰나, 머릿속에 여태 잊고 있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넌 살 자격이 있는 사람이니까.”

처음 자신을 구했던 여인의 모습부터-

“나는 다시 너를 볼 거야. 계약서도 쓰게 될 거고 너와 같이 시간도 보내면서… 우리는 결국 사랑에 빠지겠지.”

“내 이름은… 정인이야.”

자신의 이름을 말하며 떠나가던 순간까지.

모든 것이 기억났다.

알버트의 눈가에 결국 눈물이 차올랐다.

‘나는 평생 너를 기다렸구나.’

그는 몸을 덜덜 떨며 정인 앞으로 다가섰다.

자신의 첫사랑이자, 제 삶의 영원한 구원자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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