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S공금]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겨 있는데 바로 앞에 그늘이 졌다. 눈을 말똥히 뜬 하양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들이민 것이다.
“무슨 생각 해?”
찰랑거리며 흘러내린 하양이의 머리카락이 내 어깨를 간질였다.
완연한 남자임에도 소년 같은 싱그러움이 남아 있는 얼굴로 하양이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하양이의 어깨를 살살 밀었다.
“하양아, 조금만 떨어지자. 너무 가까워.”
“응?”
하양이가 한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알버트와 맞먹을 키를 가진 청초한 미남에게는 눈치가 없었다.
왜 그래야 하는지 납득은 되지 않은 듯한 모양새였지만, 하양이는 잠자코 내 말을 따랐다.
하지만 여전히 가까운 건 마찬가지였다.
그래, 내가 가르쳐 줘야지. 나는 하양이가 새끼 드래곤일 적을 떠올렸다.
시련을 이겨내고 자랐다지만, 그가 갑자기 인간 세계에 통달하게 되는 건 아니다.
지금의 하양이도 옛날처럼 이런 상식에 무지한 것은 어쩔 수 없다는 거다. 그러니 조곤조곤 이야기해야 한다.
“하양아, 조금만 더….”
떨어지자, 라고 말하려던 나는 주위의 뜨거운 시선을 느끼고 말았다.
아무리 봐도 성년 남자처럼 보이는 미남을 이상한 애칭을 부르고 있어서임이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인간일 때도 하양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나는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하양이의 뜻 자체가 하얀색이니까 화이트, 라고 부르면 되려나. 나는 하양이에게 작게 속삭였다.
“하양아, 앞으로 네가 인간 모습일 때는 화이트라고 부를게.”
내 말에 하양이가 살짝 입꼬리를 내렸다.
“나는 하양이가 좋은데.”
“…지금 네게 쓰기에는 좀 그래서.”
“왜?”
아까 전 말은 쉬이 납득하던 하양이도 이번에는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결국 사실을 실토했다.
“하양이 이름은 사람한테 쓰기엔 너무 귀엽잖아.”
“…지금 나는 정인이 눈에 귀여워 보이지 않아?”
시무룩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는 모습에서 예전의 새끼 드래곤 때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몸의 긴장이 순식간에 풀렸다. 나는 푸시시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귀엽기보다는 예쁘지.”
“예쁜 것도 칭찬이야?”
“당연하지.”
눈매를 살짝 접은 하양이가 내 어깨에 얼굴을 살짝 맞댔다가 고개를 올렸다.
“정인이 칭찬해 주는 거면 됐어….”
말끝이 늘어지는 말투는 여전한데, 그 모습이 예전과 좀 다르게 느껴졌다.
하지만 정작 이야기를 꺼낸 당사자는 이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 듯했다.
자신의 매력을 모르고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여주인공이 이런 느낌일까?
주위 사람들의 시선은 여전히 우리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럼 우선 마탑에 가볼까.”
나는 우선 메르시가 있을 마탑으로 향했다. 사실 마탑에 가는 건 처음이었다.
과거의 벨페트와 메르시를 떠올리니 그녀의 얼굴이 더 보고 싶어졌다.
리암도, 슈버트도 다시 보면 그들의 과거가 떠올라 새롭게 보일 듯했다.
예프넨 후작의 연회를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린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전혀 없었기에 더.
마탑에 가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기도 했고, 알버트의 일을 도우면서 메르시의 명성도 더 널리 알려진 모양이었으니까.
문제는 메르시도 부재중이었다는 사실이다.
처음엔 심드렁하던 문지기 마법사는 내 마력의 척도가 자신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알고서 존경스럽다는 얼굴로 여러 가지를 알려주었다.
나를 숲에서 은둔하던 고수쯤으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지금 황제 폐하를 데리러 나가셨어요.”
그러니까 여기도 실패다. 메르시가 없다면 다음은 리암이지. 나는 마법사에게 리암 메이슨 공작의 저택을 물어 찾았다.
“메이슨 공작님께서는 현재 출타 중이십니다.”
그리고 또 실패했다. 어디 갔는지 말은 해주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알버트를 따라가지 않았을까 싶었다.
리암 성격상 알버트를 혼자 보냈을 리는 없으니까.
그러면 슈버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슈버트는 리암보다 알버트 옆에 더 달라붙었으면 붙었지, 떨어지지는 않았을 테니까.
내 정체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세 사람이 없다. 그나마 레오나와 안면이 있긴 한데 내 이야기를 믿어주려나?
한번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나는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길을 물어물어 궁을 찾아갔다.
“…미쳤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도 으리으리했던 궁은 그 크기를 압도적으로 늘린 채 서 있었다.
이건 로스투라투 때처럼 사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 대륙을 압도적으로 정복한 황제의 격에 맞는 예를 갖춘 것이었다.
준법정신을 지키는 시민으로서 궁에 무턱대고 순간이동을 쓰는 것은 자제하고 싶었다.
우선 법을 따르고, 안 되면 어기지 뭐. 나는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레오나 님을 뵈러 왔습니다.”
하지만 문지기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대놓고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레오나 기사단장님은 네가 뵐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어디 있는지는 알 수 있나요?”
“…애초에 수도에 없으시다. 그러니까 귀찮게 하지 말고 꺼져.”
하지만 레오나까지 알버트를 따라간 듯했다. 내 노력이 모두 헛수고가 되었다.
꼬르륵. 배 속에서 천둥이 쳤다.
주린 배를 부여잡고 궁에서 멀어지는데 저 멀리 노을이 지는 게 보였다.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한 명쯤은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모두 장렬히 실패했다. 우선 오늘 당장 잘 곳이 문제였다.
다른 나라를 정복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
그들이 수도에 없는 게 알버트를 도와주느라 바빠서임을 알면서도 괜스레 서운했다.
그래도 오늘 열심히 돌아다니며 얻은 중요한 정보가 몇 개 더 있었다.
첫 번째, 알버트가 머물렀던 탑은 여전히 보존되어 있다는 것.
주위에 마법이 걸려 있어 사람들은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지만 탑은 그 존재만으로도 알버트의 위상을 드높이는 역할을 했다.
탑에서의 역경은 그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큰 도움을 줬다.
두 번째, 흑마법사인 로제 아티어스에 대해서는 퍼진 이야기가 별로 없다는 것.
로제 아티어스는 1년 전부터 병을 앓아 자취를 감췄다는 정도의 소문만 떠돌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이조차도 모르는 사람들이 허다했다.
한때 알버트의 지지를 등에 업고 반역의 주동자로서 당당하게 이름을 알리던 로제의 이름이 사람들에게서 흐릿해져 있는 건 필시 알버트의 짓일 것이다.
“우리 어디에서 자?”
고민에 빠져 있던 나는 하양이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웃었다.
“우리 집으로 가야지.”
신분도 불분명하고 돈도 없지만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있었다.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머물렀고, 살았던 곳. 내 집, 이라 조심스레 말할 수 있는 공간.
나는 탑으로 향했다.
***
탑 주변에는 경계를 서는 병사도 없었다. 애초에 그럴 이유가 없었다.
알버트가 탑 주변에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프로텍트(Protect)를 걸어놓았기 때문이다.
탑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섰지만 벌써부터 알버트의 기운이 느껴졌다.
하지만 내게는 알버트의 힘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심호흡을 한 나는 그의 마법을 풀 수 있는 주문을 외웠다.
“언락(Unlock).”
나와 하양이는 탑 주변에 쳐져 있던 결계를 무사히 통과했다.
하지만 생각처럼 가뿐하게 한 일은 아니었다. 알버트의 힘과 내 힘의 차이는 생각보다 훨씬 적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쓰던 마법이나 운용 정도를 생각해 보면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알버트의 힘은 이제 먼치킨의 범주마저 뛰어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힘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경지.
…미쳤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힘인데? 알버트의 최측근들이 모두 다 그를 따라간 게 그를 돕는 게 아니라 말리기 위해서는 아닌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다행히 탑은 잠겨 있지 않았다. 알버트는 결계 정도면 충분하다 느꼈던 듯했다. 나라도 그랬을 테니까.
…얼마 만에 오는 탑이지? 왠지 모를 추억에 젖은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탑도 그대로 뒀는데 가구를 치우지는 않았겠지? 먼지가 쌓여 있는 건 상관없었다.
내가 치우면 되니까. 그것조차도 즐거울 것 같았다. 나는 꾹 감았던 눈을 슬그머니 떴다.
“…….”
그리고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다시 과거로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문 바로 앞에 보이는 부엌과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계단 모두 그대로였다.
가구의 배치까지 내 기억과 무엇 하나 달라진 것이 없었다.
새끼 드래곤 때 하양이가 잠들었던 책상 위에는 하양이가 덮고 자던 담요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하양이도 나와 마찬가지로 얼떨떨한 듯했다.
주위를 물끄러미 둘러보던 하양이는 담요를 손에 꽉 쥐었다. 나처럼 기억을 곱씹는 모양이었다.
하긴, 탑은 나뿐만이 아니라 하양이에게도 특별한 공간이었다.
하양이가 다시 살아갈 마음을 먹게 해준 곳이니까.
하양이에게 혼자 추억을 회상할 시간도 줄 겸, 나는 혼자 문을 열고 계단을 올랐다.
알버트와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공간.
알버트의 방이자, 우리의 거실을 향해서.
이게 뭐라고, 마음이 두근거렸다. 계단을 오르는 걸음은 빠른 듯 느렸다.
나는 숨을 가다듬은 후 문을 열었다.
“진짜….”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곳도 먼지는 한 톨도 없었다. 매일 사람이 관리했다고 해도 믿을 것이다.
부엌과 마찬가지로 계속 관리되고 있는 티가 났다.
모든 가구 배치는 내가 알버트가 아플 때 두었던 그대로였다. 우리가 살던 그때와 똑같았다.
나와 그의 추억이 이렇게 고스란히 보존되고 있었다.
아, 진짜. 나는 눈을 꾹 감았다 떴다. 빨개진 눈시울도 모자라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 같아 어쩔 수 없었다.
요즘 울보가 되어버린 기분이다. 매번 우는 건 싫어하는데, 자꾸 울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내가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면서 이곳을 완벽히 관리하고 있었을 알버트는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의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을까.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당신은 언제나 같았다.
…언제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잘 관리되어 있는 탑이라면, 그는 금방 다시 이곳을 찾을 것이다. 다른 곳에 갈 필요도 없었다.
나는 우리의 첫 만남처럼, 이곳에서 그를 기다리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