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우는 알버트를 두고 떠나는 마음이 무거웠다.
나는 하양이와 순간이동을 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목놓아 우는 그를 달랠 수도 없었다. 꾹 감은 눈가가 뜨거웠다. 손목을 올려 눈물을 닦은 나는 심호흡을 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하양이와 시련이 시작되기 직전 인사를 나눴던 드래곤의 둥지에 있었다.
나는 동굴의 한쪽 면에 뭔가 새겨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비록 색은 없었지만 나와 하양이에게 새겨진 문양과 똑같은 것이었다.
온갖 문양이 그려져 있는 동굴 안은 계약자들과 성체 드래곤의 계약과 맹세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내 손목 위에 있던 단순한 문양이 이제 꽃을 피운 것처럼 화려하게 바뀌어 있었다.
나와 하양이의 계약이 잘 끝났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드디어 실감이 났다.
내가 성체 드래곤 하양이의 진정한 계약자가 된 것이다.
이는 하양이도 동시에 느꼈을 것이다. 고개를 돌리니 하양이가 자리에 물끄러미 서서 나를 응시하는 모습이 보였다.
“내 진정한 계약자가 되어줘서 고마워….”
내 어두운 얼굴 때문인지 계속해서 눈치를 살피던 하양이가 고개를 까닥 숙이며 인사했다.
어린 알버트와의 이별이 하양이 탓도 아닌데, 괜히 내 눈치를 살피게 만든 것 같아 미안했다.
미래로 가야 하는 건 꼭 일어나야 하는 일이기도 했으니까.
무엇보다 하양이도 고통을 이겨내고 나를 만나러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지금까지 전혀 신경 쓰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하양이도 그만큼 힘들었을 테니까.
나는 하양이의 앞발을 쓰다듬으며 애써 목소리를 올렸다.
“감사 인사가 늦었네. 나를 데리러 와줘서, 시련을 제대로 이겨내 줘서 고마워, 하양아.”
내 말에 하양이가 해맑게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같이 놀러 가기로 했잖아.”
그러니까 죽을 수 없었어. 작게 중얼거린 하양이의 미소는 새끼 드래곤일 때를 생각나게 했다.
훨씬 성숙한 모습이 되었지만 겉모습과 상관없이 하양이는 똑같았다. 그래, 우리는 함께 지내야 할 시간이 있었다.
“돌아가면 바다에 가자.”
눈부시게 내리쬐는 빛 아래 반짝이는 물결을 보면서, 우리에게 이렇게 힘든 시간도 있었노라, 지금의 기억을 추억으로 회상하자.
알버트와 함께.
속으로 굳게 다짐한 나는 찬찬히 머릿속에 흘러드는 정보를 훑었다.
계약이 완전히 끝나고 나니, 왜 이곳에 왔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드래곤의 둥지는 모든 차원과 시간이 연결되어 있는 기묘한 공간이다.
또한 둥지는 방에 들어가기 위해 열어야 하는 문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즉, 내가 시간이나 차원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항상 이곳을 거쳐야 한다는 말이다.
이곳에서 태어난 새끼 드래곤들이 서로 다른 세계로 떨어지는 것도, 나와 하양이의 시련이 이곳에서 시작된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였다.
머릿속에 마법진이 저절로 그려졌다. 계약자가 되면서 새로운 마법이 몸 안으로 흘러든 느낌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볼 수 없고, 봐도 이해하지 못할 시간의 마법진일 테지만 나에게는 다른 이야기였다.
내 세상이 다시 한번 뒤바뀌었다. 눈 밑에 말라붙은 눈물 자국을 닦은 나는 덤덤히 선언했다.
“돌아가자.”
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가 된 것은 맞지만, 시련을 이겨내느라 나와 하양이가 부재했던 시간대만은 갈 수 없었다.
내가 알버트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건 시련이 끝난 현재의 날짜였다.
나머지의 시간은 내가 현재 살고 있는 현실과 충돌할 위험이 있었다.
나는 어린 알버트와 30일의 시간을 보냈다.
시련 동안에는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고 했으니 현실에서는 300일의 시간이 지났다는 소리다.
거의 1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나는 행방불명이었다는 말이었다.
알버트와 기약했던 한 달이 훨씬 지난 시간. 그는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있을까?
어쩌면 괴로움에 나를 잊으려 마음먹었을지도 모른다. 그도 사람이니까.
그렇기에 알버트가 그런 선택을 했다 해도 나는 감히 그 선택을 원망할 수 없다.
…내 가장 큰 두려움이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되는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상념이 길어진다.
모든 건 마주쳐 봐야 알겠지. 나는 심호흡을 하며 주문을 외웠다.
“타임(Time).”
주문을 외치는 순간 나와 하양이는 마법진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이윽고 나와 하양이는 마지막으로 자취를 감추었던 공터로 이동했다.
아니, 공터였어야 했을 공간으로 이동했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황량한 공터였던 그곳은 왁자지껄한 사람들이 가득한 번화가로 탈바꿈해 있었다.
허공에서 착지하려던 나와 하양이는 기겁하고 우선 투명 마법을 걸었다.
허공에서 나타나는 드래곤이라니,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도 모자라 평생 이야깃거리가 되고도 남을 거였다.
이런 일로 하양이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건 사양이었다.
마을 위에 하양이의 그림자가 졌다. 성체 드래곤 사이즈라면 주변 건물을 사뿐히 즈려밟고도 남는다.
이대로 착지하면 마을의 집을 부수는 것은 물론 인명 사고도 있을 터였다.
어떡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하양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사람으로 폴리모프할게.”
이대로라면 사람들이 깔릴지도 몰라. 하양이가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나도 동의하는 바였다.
인간이 된 하양이의 모습은 어떨지 궁금하기도 했고.
이윽고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한 하양이는 순식간에 인간으로 폴리모프했다.
“와….”
내심 알버트의 얼굴에 익숙해져 누굴 보아도 감흥 없을 거라 생각했던 나는 감탄사를 뱉었다.
알버트의 미모와는 다른 처연함을 가진, 가는 선이 어울리는 미인이 눈앞에 서 있었다.
모든 것이 새하얀 남자였다. 허리까지 흐르는 머리카락은 내 백발과 닮은 듯 다르면서 푸른 기가 살짝 흘렀다.
옅은 하늘색의 눈동자는 밝았다.
겉모습은 새하얀 겨울을 연상시키는데, 졸린 듯 적당히 치켜뜬 눈은 마치 봄바람처럼 따사로운 분위기였다.
몸에 걸친 순백색의 로브가 고귀해 보였다.
적당히 치켜 올라간 눈동자가 나를 보며 곱게 휘어졌다.
“그럼 가자.”
“…옷은 저절로 입게 되는 거야?”
폴리모프한다는 말을 들은 순간 옷을 입지 않는 것 아닌가 걱정했기에 궁금해 물었다.
평소 인간의 관념에 다소 어색한 하양이를 생각하면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이미지대로 폴리모프되긴 하는데… 갈아입을 수는 있어.”
그렇다면 하양이도 옷을 사야겠구나. 나중에 크로엘의 숍을 다시 방문할 이유가 생겼다.
하양이의 삶에 내가 선사할 수 있는 또 다른 행복이 될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중에 옷도 사러 가자.”
하양이가 열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난 그 모자도 좋았는데 잃어버려서 슬퍼….”
하양이는 크로엘이 주었던 모자를 떠올리며 아쉬워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자, 가자.”
나와 하양이는 사뿐히 거리에 내려앉아 사람들 사이에 섞여들며 투명 마법을 풀었다.
이곳이 1년 전에 공터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번화한 시장가였다.
대체 1년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 건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이게 정상적인 건가?
알버트를 만나기 전에 상황 파악을 하는 것도 중요하겠다 싶어 길거리를 느리게 걸으며 나는 귀를 기울였다.
사람들이 하나같이 알버트를 칭송하고 있었다.
“폐하 만세!”
“알버트 황제 폐하는 정말 대단하시지….”
그런데 그를 부르는 호칭이 좀 이상했다. 전하가 아니라 ‘황제 폐하’였다.
왕을 부르는 전하, 라는 호칭이 아니라 여러 나라를 다스리는 황… 제.
…뭐지?
내가 알기로 이 책의 내용에 다른 나라 정복 따위는 담겨 있지 않았다.
여주인공이 한식으로 왕과 주위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힐링 로맨스 판타지였단 말이다.
소문을 들으면 들을수록 마음이 조급해졌다. 어서 궁으로 가봐야겠다 싶은데 사람들의 대화가 이상했다.
“지금 코토아르를 지나 저 북쪽과 남쪽 나라까지 정복하고 돌아오시는 중이잖아?”
“이제 이 대륙 전체를 통일한 황제가 되신 거지. 그런 황제 폐하가 태어난 나라에 살고 있다니 우린 얼마나 행운아인가….”
감격한 듯한 목소리는 슈버트를 연상시켰다.
그만큼이나 알버트를 따르는 추종자들이 늘어난 듯했다. 그것도 기하급수적으로.
아니, 왜 다른 나라들을 통일하기 시작한 거지? 혹시 정복자가 꿈이었나?
나 없는 동안 꿈이나 이루자, 마음먹고 나라를 싹 통일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리가 없다.
이는 얼토당토않은 소리다. 나는 다시 생각을 갈무리했다.
그가 날 쉬이 포기했을 리 없다. 내가 죽지 않도록 모든 힘을 다하려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만일 알버트가 내가 죽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면?
그래서 보이지 않는 나를 찾기 위해 이 대륙 전체를 쥐 잡듯이 뒤진 거라면? 대륙 정복은 덤으로 하고?
알버트가 워낙 먼치킨이라서 가능한 것처럼 들리는 게 더 무서웠다.
하지만 이는 알버트가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이야기였다.
마지막으로 로제의 흑마법진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으니 이건 확실하지 않았다.
어쨌든 알버트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은 더 확고해졌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지금 알버트는 수도에 없다.
그가 있는 지역을 물어물어 순간이동할 수도 있지만, 수도로 돌아오고 있다니 엇갈릴 가능성이 있었다.
우선 수도에 돌아오는 중일 테니 기다리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리암이나 슈버트, 메르시 등의 사람들을 만나 정보를 얻어야 했다.
지금 나는 신분조차 존재하지 않는 미지의 이방인일 뿐이니까.
돈도 많… 기는 한데 그게 모조리 로제 아티어스의 이름 앞으로 되어 있다.
드래곤의 계약자가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돈이 뿅 하고 생기는 것도 아니고. 마법을 이용하면 돈을 만들 수도 있겠지만, 이는 불법이다.
나를 고깝게 보던 인물은 좀 뒤에 두고… 가장 먼저 생각난 건 메르시였다.
그녀는 알버트와 함께 로제를 공격하려 했던 인물이기도 했고, 나와 언니 동생 하는 스스럼없는 사이였으니까.
물론 내 겉모습이 달라져 메르시가 놀랄 수 있었다. 하지만 내게는 하양이가 있었다.
폴리모프한 모습을 믿지 못하면 성체 모습을 보여주면 되는 일이고, 내 손등에 새겨진 문양도 증거로 보일 수 있었다.
내가 나임을 증명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들을 만날 수만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