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에밋은 편안히 누운 채 알버트의 별장 앞마당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그를 보며 나는 이게 예전에 알버트가 이야기했던 에밋의 마지막임을 깨달았다.
“…울지 마시라고 했잖아요.”
모든 힘을 다해 중얼거린 에밋은 알버트의 손을 잡으며 웃었다.
에밋의 몸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알버트는 멍하니 에밋의 손을 잡고 있다 허공을 허우적댔다. 그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안 돼.”
돌아오시라 했잖아요. 작게 중얼거리는 모습이 고통스러워 보였다.
에밋의 곁에 있던 블래키도 제 모습을 서서히 감추었다.
…드래곤의 마지막 재해가 시작될 시간이다. 블래키가 몸을 감추는 순간, 주위에 거센 바람이 일었다.
나와 알버트의 머리카락과 옷이 바람을 타고 마구 흩날렸다.
손을 올려 얼굴을 가리려 드는데, 눈앞에 거대한 그림자가 일었다.
찌푸렸던 눈을 뜬 나는 하늘을 응시했다.
에밋이 사라진 곳을 멍하니 살피던 알버트도 그림자를 눈치채고서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눈부시게 빛나는 하늘 아래, 드래곤이 있었다.
어린 새끼 드래곤이 귀엽기만 했다면, 성체 드래곤은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겼다.
인외의 존재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가 있었다.
온몸이 온통 새하얀 드래곤은 조각상처럼 아름다운 동시에 위압감 넘치는 모습을 뽐냈다.
책에서만 보았던 모습. 내가 원하던 하양이의 미래.
나를 보는 드래곤의 맑은 눈동자가 곱게 휘어졌다. 드래곤이 내 쪽으로 고개를 내렸다. 그가 서서히 내려앉았다.
“뒤로 물러서야-”
“괜찮아, 알버트.”
나는 알버트를 저지했다. 내 눈앞에 나타난 이가 누군지 알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드래곤에게 손을 올린 나는 내 눈높이에 맞춰 고개를 숙인 드래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드래곤이 기분 좋은 듯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나와 눈을 마주친 드래곤이 웃었다.
[오랜만이야….]
그리움을 담아 울리는 미성의 목소리는 예전보다 훨씬 성숙했다. 하지만 나른한 음성은 여전했다.
안도감이 제일 먼저 파고들었다. 오랜만에 보는 모습에 울컥했다.
나만큼이나, 하양이도 시련을 어렵게 이겨낸 것을 알았기에.
“수고했어.”
하양이가 나를 찾는 순간 내 몸이 완전해졌다.
동시에 나는 알 수 있었다. 지금의 내가 과거에 오기 전 알버트와 비슷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아직 드래곤의 계약자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 정도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힘은 점점 더 강해질 것이다. 드래곤의 잠재능력에 따라서.
마법진을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하양이와 다시 만나 공명하는 순간부터 머릿속이 맑아졌다. 머릿속에 있던 뿌연 안개가 걷힌 느낌이었다.
알버트가 이런 마음이었을까? 더 이상 지팡이는 불필요하게 느껴졌다. 나를 결연히 보던 하양이가 중얼거렸다.
“이제 정인이 좋아하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
탑에서 나가기 전, 알버트의 상반신을 보며 얼굴을 붉히던 내게 자신도 저런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다짐하던 하양이가 생각났다.
감동하려던 찰나에 정신이 확 들었다.
아니, 하양아. 난 변태가 아니야! 그런 건 안 보여줘도 돼! 내가 고개를 격렬히 저으며 반항하자 하양이가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참이나 내 의사를 표현한 후, 하양이가 날 보며 선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야.”
에밋이 이미 귀띔했던 시간이다.
오늘이 오기 전, 나는 알버트와 최대한 좋은 기억을 쌓아주기 위해 애썼다.
그가 행복했던 기억이 많았으면 좋겠어서 시간을 쪼개 여러 추억을 만들었다.
미래의 알버트가 보고 싶다.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완전한 계약자가 아니었던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양이를 믿고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어느덧 과거에 온 지 한 달에 준하는 시간이 흘렀다.
알버트는 나와 이야기를 나눴던 레스토랑에서 어릴 적 만난 사람이 한 달 정도 머물다 갔다고 했다.
그가 했던 말과 딱 맞아떨어졌다.
이제 우리가 헤어질 시간이다.
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나라고 그와 이별하는 게 쉬울 리 없었다.
미래의 그를 위해서라면 바로 가야 하지만, 혼자 남은 알버트가 어떻게 그 힘든 시간을 이겨낼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래도 해야 했다.
“알버트.”
알버트가 내 말에 흠칫했다. 그가 내 손목을 꽉 잡았다. 이미 닥칠 일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가지 않기로 했잖아.”
“알버트, 우리는 헤어져야 해.”
내 말에 알버트가 잔뜩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
“가지 마. 제발 가지 마.”
그가 현실을 부정하듯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두 손으로 내 손목을 움켜쥔 알버트가 거의 매달리다시피 했다.
“당신이 가면 난 어떻게 버티라고. 어떻게 혼자 버티라고!”
“할 수 있어.”
내 손목을 더 세게 움켜쥔 알버트가 절박하게 소리쳤다.
“말로만 그러지 마! 옆에서 도와줘. 있어 줘. 나를 구한 건 당신이었잖아. 옆에서 봐줄 거잖아.”
평소의 침착한 모습과는 달랐다. 알버트의 동공이 흔들렸다. 머리를 굴리는 거다.
내가 왜 떠나는 건지, 이유를 찾는 거다. 막기 위해서. 내가 절대로 갈 수 없도록.
“내가 너무 부족했어? 그럼 더 노력할게, 응?”
그는 스스로에게서 이유를 찾으려 들었다.
“아냐, 넌 부족하지 않아.”
“그런데 왜 당신이 떠나려 해!”
이 순간 나는 다시금 깨닫고 만다. 나는 그의 기억을 지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나는 이미 엉엉 울고 있는 알버트의 눈물을 닦았다.
“울지 마, 알버트.”
“가지 마. 가지 마… 제발….”
하지만 알버트는 내 말을 듣지 못한 듯 똑같은 말을 되뇌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내 눈에 눈물이 맺히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 이 상황에서 울지 않을 수 있을까.
온몸으로 가지 말라 외치는 알버트를 두고 떠나야 하는데.
나는 알버트를 품에 꼭 안았다.
***
“알버트, 우리는 다시 만날 거야.”
“…거짓말하지 마.”
“나는 다시 너를 볼 거야. 계약서도 쓰게 될 거고 너와 같이 시간도 보내면서… 우리는 결국 사랑에 빠지겠지.”
알버트는 눈앞의 여자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 그녀가 왜 떠날까 자꾸 의문이 솟아올랐다. 답은 자신이었다.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어? 내가 너무 감정을 너무 숨기기만 해서 그래?”
여자는 매번 감정에 솔직해지라 말했다. 하지만 자신은 그러는 게 쉽지 않았다.
여자는 매번 그렇게 말했으니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떠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가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변명했다.
“이런 적이 없어서 그랬어.”
이렇게 나를 위해준 사람이 없어서, 떠나간다고 생각하니 마음 주는 게 무서웠다.
나는 이미 당신에게 모든 것을 줬는데, 당신에게 나는 아무것도 아닐까 봐 무서웠다.
“떠나지 마.”
알버트는 그녀의 팔을 붙잡고 매달렸다.
여태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이 샘물처럼 솟아올랐다.
끝이라 생각하니 아무것도 숨길 수 없었다. 끝내 후회가 숨 막히게 밀려들었다.
이럴 거면 처음부터 말할 걸 그랬다. 처음부터 다 이야기하고 표현할 걸 그랬다.
한 가지 잘못한 것을 떠올리니 우수수 잘못한 기억이 났다.
지금이라도 사과하면 봐줄지 모른다. 떠나지 않을지 모른다. 알버트는 얼른 입을 열었다.
“내가 중간에 냉정하게 말했던 거 미안해. 제발, 응?”
자신의 구원자를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눈물에 범벅된 시야가 뿌예졌다.
하지만 눈을 감을 수는 없었다. 여자가 언제 자신 앞에서 사라질지 몰랐으므로.
“제발….”
그녀는 입술을 짓씹으며 눈을 감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아직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행복했던 기억만 남겨줄게. 내 이름은….”
“…….”
“정인이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정인은 알버트에게 포겟 마법을 걸었다.
알버트는 자신의 기억이 흐트러지는 것을 느꼈다. 정인의 존재가 점차 흐릿해지고 있었다.
‘…당신이 어떻게 내게.’
그녀가 자신에게 마법을 걸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름을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머리는 모든 것을 지워 버리려 하고 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이 되어버린 사람을.
안 돼. 안 돼. 절대 잊으면 안 돼!
알버트는 악착같이 정인을 기억해 내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부질없는 일이었다.
아직 어린 알버트와 성체 드래곤의 계약자인 정인의 마력의 차이는 상상을 초월했다.
알버트도 이를 뼈저리게 느꼈다. 그의 머리가 다시 굴러갔다.
잊어버려야 한다면.
다시 기억할 수 있게 암시를 걸면 된다.
알버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다시 당신을 만난다면….”
이는 자신에게 하는 다짐이었다.
알버트는 눈물을 닦아주는 정인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바로 다가갈 거야.”
“…….”
“바로 표현할 거야.”
알버트는 자신에게 세뇌하듯 마법을 걸었다. 이 여자를 다시 만나면, 다시는. 다시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리라.
온몸이 이 여자를 알아볼 것이다.
그녀의 말투와 상냥한 목소리. 자신을 대하던 태도. 그녀를 기억할 수 없다면, 자신이 사랑하던 모든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끝내 자신은, 다시 사랑에 빠질 것이다.
모두 이해할 수 없다 해도, 자신만은 알고 있을 사랑.
‘당신이 내게 해주던 것처럼 상냥한 말로 당신을 맞이할 거야. 내 감정을 모두 표현해서, 다음번에는 절대 놓치지 않을 거야.’
다음번에는.
이 모든 기억이 사라지더라도, 다짐은 암시로 남을 것이다.
알버트 그레이는 누구보다 대단한 사람이 되어,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그녀를 기다릴 것이다.
어떤 모습이든, 어떤 곳이든 상관없었다.
그가 정인을 기적적으로 만났듯이, 그는 기적적으로 정인을 사랑할 것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