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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118화 (118/156)

118화.

알버트 앞에 선 그는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평소처럼 의미 없는 미소가 아니라, 알버트를 향한 진심이 담긴 인사였다.

“제가 시련에서 어떻게 돌아오든 간에 소백작님. 아니, 알버트… 저는 당신을 만나게 되어 행운이었습니다.”

알버트를 향해 고개를 깊숙이 숙여 인사한 에밋이 그의 손을 잡았다. 알버트는 흠칫하다 에밋의 손을 꼭 붙잡았다.

현재 그의 생의 깊숙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사람이 떠나간다.

알버트의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처럼 공허할 것이다. 에밋은 그를 축복하듯 이마를 살짝 맞댔다가 떼었다.

“앞으로는 행복하십시오.”

처음 알버트를 위하지 않았던 그는, 알버트에게 진심이 되었다.

“저는 당신이 행복해지길 바라니까.”

알버트의 행복을 바라는 목소리는 너무도 아름다웠다.

모든 것을 끝낼 준비를 한 에밋의 얼굴이 너무 홀가분해 보여 나는 차마 그더러 살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나는 대신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에밋은 복도에 나와 빙글 몸을 돌렸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시련이 시작되면 바로 죽음을 택하실 건가요?”

“언제일지가 중요한가요?”

“저도 조만간 떠나게 될 텐데, 조금 시간을 두고 싶어서요.”

사실이었다. 에밋의 죽음과 나와의 이별이 같은 시기에 겹친다면 알버트가 얼마나 큰 상처를 받을지 가늠할 수 없었다.

에밋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윽고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타깝게도 그건 불가능합니다. 아마 제가 돌아오는 시기와 당신의 시련이 끝나는 시기가 맞물릴 테니까요.”

“예? 바꿀 수는 없을까요? 저 마력도 좀 생겼고, 몸도 있으니 어떻게든 맞춰볼게요.”

미래의 알버트를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떠나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와 동시에 현재 알버트가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떻게든 피해를 최소화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이런 상황에서 에밋의 알쏭달쏭한 말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더 이상은 말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부터 약 보름의 시간을 드리도록 하지요. 알버트와 좀 더 있으실 수 있도록.”

“…….”

“저는 알버트가 이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당신은 그를 저보다 믿지 못하는 것 같군요.”

“이겨낼 수 있다는 말이, 트라우마가 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니까요.”

“…저는 최선을 다할 겁니다.”

에밋이 내 말에 침묵하다 중얼거렸다. 굳은 다짐이 서린 얼굴에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에밋도 그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걸 테니까.

다시 방으로 돌아가 보려는데 에밋이 악수를 하자는 것처럼 손을 내밀었다.

“당신도 고마웠습니다.”

“저는 한 것도 없는데, 오히려 에밋이야말로 알버트의 유년 시절에 함께 있어 줘서 고마웠어요.”

“당신을 보며… 저도 알버트에게 좀 더 솔직할 수 있었던 것 같아서요.”

에밋이 날 보며 후련한 얼굴을 했다.

처음 보았을 때와 똑같은 미소였지만, 내게는 그의 인상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찌 보면 아주 오랜 시간을 산 사람 같기도 했고, 아직 미성년의 순수한 얼굴 같기도 했다.

맞잡은 손에서 처음으로 느껴지는 굳은살이 그가 여태 지녔던 삶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알려주는 것 같기도 했다.

“당신도 아주 오랜 삶을 살게 될 겁니다.”

드래곤의 계약자는 드래곤이 성체가 되는 순간 삶을 함께 공유하게 된다.

이는 계약자가 인간에 비해 아주 오랜 시간 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도, 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서는 아마 현자인 에밋과 비슷한 기간일 터였다.

“어떤 선택을 하든지, 후회하지 않길 바랍니다.”

나는 에밋의 모습에서 나 자신의 미래를 상상했다.

에밋은 알버트가 초월자가 될 수 없을 거라 했다. 그럼 나는 그 오랜 시간을 하양이와 둘이서만 살아야 한다.

…내가 알버트를 보내고 난 후에 홀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를 그냥 보낼 수 있을까.

그를 다시 만나 사랑하고 함께하기 전까지 답을 알 수 없을 거였다.

하지만 그가 살아 있는 순간에는 그를 절대 저버릴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나는 너무 잘 알았다.

***

이야기를 끝내고 나온 에밋은 블래키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시련이 시작되기 전에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모조리 했다.

정인 덕분에 속에 담아두려 했던 속내도 알버트에게 모두 전달할 수 있었다.

“왔어?”

블래키가 다소 도도한 목소리로 그를 반겼다. 에밋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계의 초침이 딱 정각을 알렸다. 주위의 시야가 뒤바뀌고, 에밋과 블래키는 드래곤의 둥지에 도착했다.

블래키의 시련이 시작되기 전, 서로를 볼 마지막 기회였다.

에밋은 블래키를 만나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머리를 부드러이 만졌다.

블래키가 간지럽다는 듯 움직였다. 하지만 그녀는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네 시련이 시작되겠구나.”

블래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에밋과 시선을 맞추며 콧방귀를 뀌었다.

“당신이 모든 고통을 지워줄 테니 괜찮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여 에밋에게 정중한 인사를 건넸다. 에밋은 그녀의 염원을 이뤄줄 수 있는 좋은 파트너였다.

아까 전 몰래 엿들었던 알버트와 에밋의 마지막 대화를 떠올린 그녀가 멈칫하다 말했다.

“당신을 만난 건 내게도 행운이었어.”

그녀에게는 옛날, 마음을 의지하고 사랑했던 인간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시한부였다.

그의 죽음 앞에서 블래키는 상실감을 느꼈다. 그가 존재하지 않는 삶이라면 포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삶의 마지막 앞에 선 그녀는 자신이 생각보다 겁쟁이였다는 걸 깨달았다.

모순적이었다. 그를 따라가고 싶었지만, 죽기 전에 느낄 고통이 무서웠다.

죽는 순간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 두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런지도 몰랐다.

자신은 왜 의연하지 못한가 오랜 시간 책망했다.

그때 떠올린 것이 바로 성체 드래곤이 되는 500살의 생일이었다.

그때라면,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죽음을 받아들여야 할 테니까. 자의가 아닌 타의로 일어나는 일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남자를 너무 오랜 시간 혼자 두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어찌해야 할까 생각하고 있는데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남자가 나타났다.

자신보다 먼저 떠난 연인의 부탁으로 억겁처럼 긴 세월을 사는, 그리고 이젠 자신과 함께 삶을 마감할 드래곤을 찾고 있던 현자.

현자는 목숨을 끊는 것도 쉽지 않았고, 더군다나 죽고 싶은 새끼 드래곤을 찾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불가능에 가까운 확률은 현실이 되었다.

이 사람을 도와주면, 500살을 먹을 때까지 기다린 자신의 죄책감이 조금이라도 덜해지지 않을까 해서 시작된 관계였다.

서로 이성적으로 끌린 적은 없지만, 오랜 시간 살아온 만큼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친구가 되었다.

“이게 너와도 마지막이 되겠구나.”

에밋은 정중히 블래키에게 인사했다. 블래키는 그의 인사를 공손히 받으며 물었다.

“언제 죽을 작정이야?”

에밋은 정인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도 빨리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므로 긴 시간은 주지 못했다.

자신의 힘으로도 고통을 완전히 지울 수 있는 시간은 이틀 정도가 한계이기도 하고.

“하루하고 반나절 정도 뒤에. 그리고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

“뭔데?”

“네 마지막 재해는 알버트를 도와주는 데 쓰면 어떨까 싶은데.”

드래곤이 죽는 순간 뿜어내는 힘.

에밋은 알버트와 함께 케이크를 먹던 정인을 기억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는 육체가 생기고 오감이 살아났다.

그저 영혼에 불과했던 자가 몸을 거의 가졌다는 건 드래곤이 고통 속에서 성체 드래곤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다면 그 드래곤은 시련의 마지막을 겪고 있을 것이다.

계약자를 찾아가는 과정.

어느 차원, 과거, 혹은 미래에 있을지 모르는 계약자를 찾아가는 일은 계약자와 드래곤의 힘을 온전하게 해주는 마지막 시련이었다.

이조차도 시련이니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시련은 어느 하나 쉬운 부분이 없었다.

…하지만 드래곤이 죽는 순간 발산하는 힘을 모조리 정인의 위치를 알려주는 데 쓴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에밋은 이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자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알버트의 미래.

자신의 이기적인 죽음이 알버트가 행복해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를 두고 떠나는 죄책감은 좀 덜어낼 수 있지 않을까.

그와 너무 닮아 있어서 정을 주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던 아이.

서로 정을 주지 않기 위해 애썼지만 결국 서로를 신경 쓰게 된 모습까지 똑 닮아 있었던 알버트에게 건네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블래키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고마워.”

에밋의 감사에 블래키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도 내가 원하는 것은 언제나 이뤄줬잖아. 그리고….”

뜸을 들이던 블래키가 중얼거렸다.

“나도 알버트가 행복해지면 좋겠으니까.”

어린 알버트가 모든 시련을 견뎌내고 어른이 될 수 있었던 건, 이처럼 그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들이 존재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찰나의 시간이 흘렀다.

에밋은 낯익은 마을에 도착했다.

몸을 관통하려던 고통은 마법을 이용해 고통을 최소화했다.

에밋은 주위를 둘러보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을 보는 여인을 발견했다.

“누구세요?”

자신을 향한 목소리에 그는 눈을 깜빡였다. 지금 꿈을 꾸는 것이 아닌가 의심해야 했다.

눈앞의 그녀가 유독 현실감 없게 느껴졌다. 구불구불한 금빛 머리카락이 유독 잘 어울리는, 모든 게 찬란했던 여인.

“에밋, 내가 죽더라도 절대 살리지 마. 알겠지? 너를 살리면서 죽는 건 내게 기쁜 일이야. 나는 네가 살길 바라. 내 몫까지 아주 오랜 시간 살면서 행복했으면 좋겠어.”

골드 드래곤의 계약자이자 자신을 위해 시간을 바꿔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던 메리.

자신이 그녀를 기억하게 된 건, 초월자가 되어 드래곤과 맞먹는 힘을 가지게 되었을 때였다.

그녀가 자신을 위해 희생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녀가 자신에게 남겨준 기억을 되새기는 것뿐이었다.

몇십 년을 부랑자처럼 살았다. 그녀가 살려준 목숨이라 버릴 수도 없었다.

새끼 드래곤을 통해 시간을 되돌려 그녀를 살리는 것도 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을 예상한 메리가 절대로 그럴 수 없도록 주문과 같은 기억을 남겼기 때문에.

결국 에밋은 그녀를 위해 긴 시간을 살았다. 오랜 시간 살며 여러 새끼 드래곤을 관찰하고 그들에 대해 집요히 파고들었다.

세상의 부조리를 알게 될수록, 자신의 선의가 너무 많은 것을 바꾸어놓고 끝내 생각지 않았던 악의로 바뀔 수 있다는 걸 겪을수록 모든 것에 환멸이 났다.

그녀가 사랑했던 세상은 왜 이리 타락했는가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의 손을 더럽히기엔 그녀를 볼 면목이 없었다.

그 대신 복수할 수 있는 인물을 찾았고, 이런 이유로 받아들인 알버트에게도 결국 마음을 주었다. 제 자신은 너무 나약했다.

‘나는 네 그런 모습도 사랑하는걸.’

죽어서야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시련은 그들의 만남을 되새길 시간을 주었다.

그가 유약하기 그지없던 어린 시절. 오로지 메리가 있었기에 살아남았던 시간.

‘현자’가 되기 전 까마득한 기억이지만 이는 언제나 선명했다. 이때의 기억은 그의 삶 평생의 원동력이 되었으므로.

에밋은 그녀를 뚫어져라 보다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옆 마을에서 온 나그네입니다.”

당신은 아무것도 바꾸지 말라 했었다.

매번 새끼 드래곤을 볼 때마다 돌아가 당신을 구하고 싶다는 유혹을 수천, 수만 번 이겨내야 했다.

그게 당신이 원하던 거였으니까.

아주 오랫동안 산 지금은,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부탁을 했는지 이해되어 더 어길 수 없었다.

이 시련은 그녀를 구하고 싶은 그의 마음을 시험하는 것일 테다. 그는 절대 시련을 이겨낼 수 없었다.

시련보다 자신을 살리지 말라는 그녀의 말이 먼저였으니까.

에밋은 웃었다.

‘그녀와의 첫 만남이 내 마지막이라면 나쁘지 않아.’

이는 자신의 삶을 가엽게 여긴 신의 마지막 선물일지도 모른다.

마지막에 이른 그의 미소는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이 찬란했다.

그렇게 그는 죽음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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