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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117화 (117/156)

117화.

폭풍 같던 연회가 지나가고 블래키의 500번째 생일날이 되었다.

어제 알렉산더에게 내 존재와 관련된 사실에 대해 경고했지만, 나는 사라지지 않았다.

아직 내 선택이 옳았는지는 알 수 없다. 알렉산더가 예전과 다름없는 선택을 했어도 나는 살았을 거기 때문이다.

나는 이 시간대의 알렉산더와 다시 만날 기회가 없을 거란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미래의 알렉산더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미래로 돌아가기 전엔 알 수 없을 것이다.

알버트와 에밋의 방을 찾기로 한 12시까지 10분을 남겨두고 있었다.

에밋과 블래키의 시련은 블래키가 태어난 저녁에 시작될 것이라 시간이 남아 있었다.

에밋이 내게 시간을 알려주며 말했다.

“시련이 시작되는 시간은 정해져 있습니다. 개인의 의지로 그 시기를 바꾸는 건 불가능에 가깝죠.”

고로 나와 하양이의 시련이 일찍 시작된 것은 오로지 나를 살리고 싶다는 하양이의 간절한 마음에서 비롯된 기적인 것이다.

누군가를 향한 진심이 내 목숨을 구했다.

알버트가 나를 구한 것처럼.

오전 외출을 마친 나는 알버트를 데리러 들어갔다.

“왔어?”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격식 있게 옷을 차려입은 알버트가 나를 반겼다.

내 눈에는 리암보다 알버트가 더 소공작에 가까워 보였다. 고고한 걸음걸이하며 우아한 행동거지 같은 면이 그랬다.

내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절대로.

“괜찮아?”

중의적인 질문으로 어제 연회에서의 일은 괜찮은지, 오늘 에밋과 헤어지는 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은 말이었다.

내 말에 알버트는 눈을 처연히 내리깔다 중얼거렸다.

“모르겠어.”

“뭐가.”

“…스승님은 언제나 나보다 그 드래곤을 먼저로 여기셨고 그런 태도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슬픈 것 같아서.”

“당연하지.”

알버트의 머릿속에는 어제의 일보다 에밋과의 일이 먼저인 모양이었다. 연회가 트라우마로 남지 않은 듯해 다행이었다.

“슬픈 게 당연한 거야. 그런 네게 좋은 소식이 하나 있는데.”

“…뭔데?”

“나 이제 거의 사람이 됐어.”

하루 만에 내게도 큰 변화가 생겼다. 육체가 거의 완성된 것이다. 이제 팔찌 없이도 내 모습을 드러내는 게 가능해졌다.

오롯한 내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손을 흔드는 순간이 그렇게 짜릿할 수가 없었다.

역시나 어제 겪었던 모든 일은 내 목숨을 건 시련이었다.

다시 어젯밤을 떠올리니 몸이 달달 떨렸다. 이성을 잃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순간이었다.

알버트가 나를 멈추지 못했더라면, 나는 그대로 알버트의 미래를 바꾼 채 이 세상에 없는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모두 네 덕분이야.”

나는 알버트를 위해 산 선물을 건네며 감사를 표했다.

그를 위해 준비한 오늘의 선물은 하얀색이 고급스러운 축음기와 그 위에 올려놓을 수 있는 레코드였다.

“마음에 들어? 음악은 기분 전환에 큰 도움이 되거든.”

오늘 선물은 꽤 신경 쓸 수 있었다. 직접 가서 값을 치르고 물건을 사는 게 가능했으니까!

나는 축음기를 만지작거리는 알버트를 보며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이젠 남몰래 일을 슬금슬금 도와주고 품삯 대신 꽃이나 음식 같은 걸 가져오는 건 그만해도 된다.

떳떳하게 사람들의 겨울나기를 도운 나는 알버트를 위한 선물을 샀다.

축음기는 생각보다 비싸서 에밋의 도움도 살짝 받았다.

처음엔 못 들은 척하던 에밋은 알버트를 위한 마지막 선물이라는 말에 결국 도와주었다.

에밋이 알버트 몫으로 남겨둔 돈을 썼으니 알버트의 현 자금 사정에 무리 가는 일도 아니었다.

“그 팔찌 말인데.”

내 말에 침묵하던 알버트가 뚱딴지같은 소리를 했다. 그의 시선은 내 팔찌로 향해 있었다.

저택 안에는 그레텐이 있으니 팔찌 끼는 게 낫다 싶어서 하고 있던 건데.

“…그냥 계속 끼고 있어.”

“응?”

축음기에 대해 묻는 것도 아니었고 이번 선물을 산 돈은 어떻게 마련했냐 추궁하는 것도 아니라 놀랐다.

더군다나 알버트가 이 팔찌의 주인공을 짙투하는 것을 알았기에 방금 한 말이 더 의외였다.

왜지? 왜지? 머리를 열심히 굴리던 나는 이내 이유를 알아냈다.

“알버트, 혹시 질투하는 거야?”

알버트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내가 뭐 하러?”

“왜? 나는 너하고 제일 친했으니까 질투할 법도 한데?”

“…그래?”

내 자연스러운 대답에 알버트가 솔깃한 게 보였다.

“응, 그리고 우리 서로한테 솔직하기로 했잖아. 네가 솔직하게 말해주면 팔찌 계속 차고 다닐게.”

내 말에 생각에 잠긴 듯 미간을 찌푸리던 알버트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질투한 거 맞아. 당신이 내 눈에만 보이면 좋겠어.”

“알겠어, 팔찌 차고 다닐게.”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알버트가 원하는 건 다 해주고 싶었다.

“자, 그럼 에밋에게 갈까?”

“알겠어.”

내 말에 알버트는 몸이 경직된 사람처럼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에밋의 방으로 들어갔다.

“오셨군요.”

에밋의 방은 그가 처음 도착했을 때처럼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블래키도 고개를 숙이며 알버트에게 인사했다. 테이블 위에는 내가 오전에 사온 케이크가 올려져 있었다.

수제 케이크는 예쁘게 장식되어 있어서 나도 설렜다. 나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몸이 완전히 생성되고 난 뒤부터 팔찌를 벗고 정신을 집중하면 오감이 살아났다.

몸을 찾으면 고통이 찾아올까 두려웠지만 그런 건 찾아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 시련과 비슷한 시기에 하양이가 자신의 시련을 마친 모양이었다.

지금 시간을 넘어 나를 찾아오는 중일 것이다.

어쨌든 설탕을 듬뿍 쓴 케이크는 생각보다 훨씬 비쌌지만 이게 알버트의 기억에 남을 순간이기 때문에 기꺼이 지불할 수 있었다.

…돈이 좀 모자라서 에밋이 알버트에게 남긴 돈을 좀 빌리긴 했지만, 미래로 돌아가면 알버트에게 모조리 갚을 거였다.

미래의 알버트에게 내 돈이 필요할까 의심스럽긴 했지만.

“…케이크를 사오신 겁니까?”

알버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밋이 재빠르게 대꾸했다.

“제가 안 샀습니다.”

오해는 절대 받기 싫은 모양이었다. 내가 손을 올렸다.

“내가 샀어.”

“아….”

바로 납득한 알버트를 보던 에밋이 머쓱한 듯 시선을 피하며 이야기 화제를 돌렸다.

“블래키의 생일을 축하하는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군요.”

“생일은 축복할 만한 날이니까요.”

오늘이 블래키가 사는 마지막 날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삶을 사는 이상, 태어난 것을 축하받을 이유는 충분했다.

혹여 그녀가 하양이처럼 더 살고 싶은 것은 아닐까 생각했지만 블래키는 단호했다.

그녀는 에밋과 삶을 마감하고 싶어 했다.

그저 에밋을 위해서가 아닌, 그녀 자신의 선택이었다.

“오래 살다 보면 그런 것에 대한 감각도 무뎌집니다.”

자신에게 변명하듯 말한 에밋이 우리에게 소파를 가리켰다.

“편히 앉으십시오.”

알버트와 에밋이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았다. 오늘은 둘이 서로를 볼 수 있는 마지막 날이나 다름없었다.

알버트가 에밋을 다시 만났을 때 에밋은 이미 죽음을 맞이한 후일 테니까.

하지만 두 남자는 입을 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고 결국 내가 먼저 두 사람의 대화를 주도하기에 이르렀다.

“자, 알버트에게 뭔가 줄 게 있다 하지 않으셨어요?”

우선 두 사람 사이의 어색한 분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선물 이야기를 꺼냈다.

에밋이 알버트 앞에 돌돌 말린 종이를 내밀었다.

“…이번에 머무르게 해주신 것에 대한 대가입니다. 나중에 필요할 때 쓰십시오.”

“아니, 선물에 더 가깝잖아요?”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왜 굳이 대가라 말하는 건데! 내가 황당해져 되묻자 에밋이 마지못해 덧붙였다.

선물하는 것이 정말 어색한 모양이었다. 나는 이야기하는 주체를 알버트로 바꿨다.

“알버트, 스승님께 선물 받은 기분이 어때?”

“…얼떨떨합니다. 선물을 준비하실 줄은 몰랐어서요.”

에밋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백작님께 제 인상이 그리 별로였습니까? 마지막인데 선물 준비하는 것이 의외라니.”

“인상이 별로라기보다, 스승님께서는….”

알버트가 나를 슬쩍 보고서 솔직하게 답했다.

“무정한 면이 없지 않아 있으시지 않습니까.”

솔직한 게 좋긴 하지만 여기서 그 말은 좋은 의미가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입을 쩍 벌리는데 에밋이 수긍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긴 합니다.”

…알버트의 직구에 아무런 충격도 받지 않은 듯 보이는 것도 의외였다.

오히려 흥미로운 듯 알버트를 바라보았으니 말 다 했다.

나는 이 둘의 사이를 평생 완벽히 이해할 수 없으리라.

어쨌든 이야기는 이어가고 있으니 다행… 이 아니었다. 그 후 둘은 다시 침묵을 지켰다.

나는 한숨을 내쉬다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오늘은 서로 속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모조리 꺼낼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게 포인트다.

“자, 알버트는 스승님께 해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했었지?”

아까 나한테 생각보다 슬프다고 했었잖아? 내 말에 알버트가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고개를 든 알버트의 귓가는 빨갛게 익어 있었다. 앞에서 대놓고 말하는 건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귀를 식히기 위해 고개를 젓던 알버트가 에밋과 시선을 맞대고 결연히 말했다.

“…시련 잘 끝내고 돌아오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알버트의 격려에 에밋이 눈을 깜빡였다.

그의 얼굴에 희미하게 어려 있었던 웃음기가 사라졌다. 나는 왜 그런지 잘 알았다.

애초에 에밋은 시련을 잘 끝낼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끝까지 일부러 죽음을 택했다는 것은 알지 않길 바라는 걸까. 그의 마음을 이해할 것도 같아서 나는 나서지 않았다.

알버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에밋이 작게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갑작스러운 사과에 알버트가 눈을 깜빡였다.

“…예?”

“예전에 잘못했던 것들.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것들에 대해서, 모두.”

“…제게 죄송할 것이 뭐가 있으시다고요.”

“아마 나중에 이해하게 되실 겁니다. 아주 오랜 시간 후에.”

에밋이 픽 웃었다.

“케이크는 샀으니 먹어야지요.”

그는 케이크를 잘라 알버트의 앞에 놓아주며 말했다.

“소백작님,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만일 제가 살아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섭섭히 생각하지 마십시오.”

“벌써부터 그런 말씀 하시면 안 됩니다.”

“…어쨌든 전 소백작님을 위해 노력할 거라는 말입니다.”

알버트의 말을 두루뭉술하게 넘긴 에밋은 나를 흘끔 응시했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내게도 케이크를 잘라 건넸다.

“같이 드시지요, 마지막인데.”

마지막이라는 말이 유난히 꽂혔다. 나에게도 지금의 알버트와 함께하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얘기하는 듯했다.

우리는 다 함께 케이크를 먹었다. 최후의 만찬이었다.

그게 마지막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시련이 시작되기 전, 에밋은 다시 한번 알버트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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