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알렉산더를 살리는 선택을 하기 위해 필요했던 건 내 자신을 향한 확신이었다.
내가 과연 아무런 도움 없이도 하양이와 계약하려 했을까.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 자신을 내가 믿지 못하면, 누가 믿어주겠는가.
나는 나를 믿었다.
두려울 수 있다.
같이 보낸 시간도 얼마 되지 않는 하양이를 위해 내 인생을 거는 것이 알렉산더의 도움 없이는 더 힘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알렉산더가 선사한 악몽 속에서 느꼈다.
그 순간 느꼈던 두려움 속에서 나는 어차피 같은 선택을 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하양이를 탑 안에 들이고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는 예견된 일이었다.
미래의 나라면 어떤 일이 있었든지 간에 하양이를 그냥 보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알렉산더를 살리더라도 나와 하양이의 계약은 여전할 것이다.
시련은 계속될 것이고, 나는 여전히 이 자리에 존재할 것이다.
나는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므로.
알버트를 사랑하지만, 하양이는 내버려 둘 수 없었으므로.
하양이도 내 삶의 일부였으므로.
여태까지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지만 이번은 달랐다.
침을 꿀꺽 삼킨 나는 알렉산더의 몸을 흔들어 그를 깨웠다. 문에 걸려 있는 마법은 여전했다.
“알렉산더.”
내 말에 알렉산더가 눈을 떴다. 눈을 비비던 그는 눈앞에 있는 나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보는 인간인데… 시종인가?”
“아니요, 시종이 아니라 당신과 이야기를 하러 온 영혼이에요.”
“영혼?”
알렉산더는 허리 아래로는 흐릿하게 보이는 나를 보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모, 몸이….”
“아직 반밖에 생성되질 않아서요. 힘도 없고. 하지만 알렉산더 님과 이야기를 나눌 수는 있어요.”
알렉산더의 얼굴엔 아직 의심이 기운이 가득했다.
나는 그에게 지금이 시련의 일부라고 말할 수 없다. 내게 미래에서 왔다는 것도. 이는 모두 시련의 일부라고 할 수 있으므로.
내 말에 흠 소리를 낸 알렉산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한테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데?”
“예프넨 후작님에 대한 이야기예요.”
“…좋은 사람이 아니다. 뭐, 이런 말이 하고 싶은 건가?”
알렉산더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 정도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처럼.
예프넨 후작에 대한 소문을 알렉산더가 완벽히 몰랐을 리는 없다.
적어도 예프넨 후작이 그를 대하는 태도와 다른 이를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는 것 정도는 짐작하고 있으리라.
“아니요. 예프넨 후작과 계속 교류하며 그를 이용하는 건 좋은 방법이라 생각해요.”
하지만 내가 이야기하려는 건 그게 아니다.
미래에서 일어날 나비효과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라도 알렉산더와 예프넨 후작의 교류는 계속되어야 한다.
알렉산더가 예프넨 후작을 믿었다는 건 그가 그만큼 공들여 신뢰를 쌓았다는 거다.
그렇다면 그 전에 굳이 예프넨 후작을 밀어내거나 의심할 필요는 없다.
애초에 이곳은 새끼 드래곤이 살기 어려운 환경이다. 이는 알렉산더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지금은 예프넨 후작과 교류하는 것이 알렉산더가 안전하게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그게 아니라고?”
알렉산더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산더에게 이곳과 더 이상 관련되지 말되, 알버트가 탑에 갇히기 전까지만 예프넨 후작과 하라고 해야 하나.
최대한 미래의 흐름을 따르되 알렉산더가 살 기회를 줘야 했다.
“꼭 지금처럼 행동해 주시다 향후 로스투라투가….”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 미래에 일어날 일 중 변하지 않으면서 반드시 일어나야 할 일.
이와 동시에 알렉산더가 알 만큼 널리 알려질 사실.
“탑에 누군가를 가두기 시작한다면, 그때부터 예프넨 후작을 멀리하셔야 해요.”
이는 알버트의 감금이다.
“내가 왜 네 말을 믿어야 하지?”
알렉산더의 시선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당신을 아는 사람의 말이니까요.”
가장 중요한 핵심을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그를 설득시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를 설득할 말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인간들 중에서는 오직 나만이 알고 있을 사실.
“당신의 평생 소원을 이뤄주고 싶은 사람의 말이니까.”
“…내 평생 소원이 뭐라 생각하지?”
하양이와 함께 들었던 알렉산더의 마지막 유언. 나는 그걸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차원을 넘나들고, 역사에 당신이라는 드래곤이 있었다는 사실을 남기는 것.”
그의 마지막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알렉산더의 눈빛이 떨렸다.
“난 당신이 그럴 수 있길 바라요.”
내 진심이 그에게 전달되길 바랐다.
알렉산더는 할 말을 잃은 듯 침묵했다. 내가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다.
알렉산더가 내 머리카락을 빤히 살폈다. 그의 눈빛이 뭔가를 회상하는 듯 흐릿해졌다.
어쩌면 알렉산더도 뭔가 알아챘을지 모른다. 에밋만큼은 아니더라도 그 역시 오랫동안 살아온 드래곤이기 때문이다.
“내가 당신에게 이 말을 할 수 있는 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예요.”
알렉산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세상에 아무 이유 없이 당신이 살길 바라는 나 같은 사람도 있다는 걸, 알아줘요.”
문을 열기 위해 덜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황급히 팔찌를 꼈다.
알렉산더는 내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에게 전할 수 있는 건 전부 전했기에 후회는 없었다.
이윽고 방 안으로 시종들이 들어왔다. 시종들 사이에는 예프넨 후작도 함께였다.
“알렉산더 님.”
예프넨 후작은 어린 알버트를 대할 때의 오만한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굽신거렸다.
그는 직접 두 손으로 그릇을 들어 알렉산더에게 음식을 전달했다.
예프넨 후작이 이곳에 왔다는 건 아무래도 오늘 연회가 끝난 게 아닌가 싶다.
시간을 확인하니 확실히 늦었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알버트가 혹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황급히 방을 나서 홀로 돌아갔다.
홀은 이미 텅 비어 시종들이 치우기 시작한 상태였다.
밖으로 나간 나는 저택 입구 쪽에서 차례대로 마차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알버트 옆에 낯익은 얼굴도 함께였다.
“오늘 정말 감사합니다.”
슈버트는 알버트를 향해 연신 고개를 숙였다. 얼굴의 멍은 여전했지만 다행히 예프넨 후작가를 빠져나올 수 있었던 모양이다.
예전에 만났을 때와 대조되는 깍듯한 모습이 그가 알버트를 얼마나 믿게 되었는지 보여주는 듯했다.
“내가 한 일은 없어.”
알버트는 고개를 저으며 어색한 얼굴을 했다. 자신의 행동을 이렇게 칭찬받는 건 그에게는 드문 일이었으리라.
잠시 후 알버트를 위한 마차가 왔다. 다른 귀족들과 비교해 확실히 허름한 티가 나는 마차였다.
가문의 인장도 없는 것이, 다른 귀족들처럼 가문에서 전용으로 쓰는 마차도 아니었다.
예프넨 후작이 돌아갈 때 마차는 지원해 주지 않은 것이다. 그의 목적을 다 이뤘기 때문에.
끝까지 추잡한 작자였다. 나는 속으로 그를 열심히 욕하다 알버트가 마차에 올라탄 것을 알고 얼른 따라 들어갔다.
“알버트.”
마차 안에 올라타 한숨을 내쉬던 알버트가 내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의 눈이 곱게 휘어졌다.
“당신을 기다렸어.”
알버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었던 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는 내 시련이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내가 여전히 죽지 않았다는 건 하양이 또한 시련을 잘 이겨내고 있다는 거다.
이별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주 가까이.
나는 알버트를 품에 안았다.
“수고했어.”
“…그 말이면 충분했어.”
알버트가 내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애절한 목소리는 전과 같았다.
이런 그를 어떻게 두고 떠날 수 있을까. 속으로 헛웃음을 지은 나는 눈을 감았다.
그의 기억을 지운 것은 그를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내가 차마 그를 떠날 수 없어서였다.
그의 기억을 지우고 미래로 돌아가는 것. 우리의 마지막은 내 최후의 시련이었다.
***
갈색 머리 소년은 떠나가는 알버트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소백작은 자신의 또래임에도 불구하고 태양처럼 찬란히 빛나는 사람이었다.
마음이 새로운 욕망으로 불탔다. 알버트의 곁에서 그를 위해 살고 싶었다. 그의 눈에 알버트는 왕보다 훨씬 커 보였다.
매일매일 사는 것만이 목적이던 삶에 목표가 생겼다.
“알… 버트. 알버트 소백작님.”
소년은 알버트의 이름을 되뇌다 결심했다.
좋아, 오늘부터 난 새로 태어난다. 이름도 알버트와 비슷한 것으로 지어야지.
애초에 길거리에 자란 아이에게 이름은 없었다. 아이도 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기에 항상 아무렇게나 불려왔다.
하지만 알버트의 모습을 보는 순간 모든 게 뒤바뀌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마법을 쓸 줄 알면서 자신을 그냥 보내주는 모습에서 이상한 사람이라 생각했지만, 이제 그는 소년의 안에서 신격화되어 있었다.
“그럼 나도 비슷하게 ~버트로 해야지. 버트라….”
생각에 잠겼던 아이는 이윽고 자신의 이름을 만들어냈다.
“슈버트.”
그래, 그게 자신의 이름이 될 것이다. 무릎을 꿇고 비는 모습도 전혀 비굴해 보이지 않던 주군을 섬기는 자신의 이름은.
그것이면 되었다. 인생의 목표를 새로 세운 소년은 한 가지 난감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 어떻게 섬기지….”
생각은 했지만, 어떻게 해낼지는 알 수 없었다.
끙끙거리고 있는데 주위 귀족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자신을 향한 혐오는 익숙하다.
슈버트는 어깨를 으쓱했다. 죽을 위기를 겪고 나니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알버트를 섬길 방법을 찾는 것과 비슷하게 중요한 일이 하나 더 있었다. 앞으로의 거처였다.
‘어디로 가야 하나.’
예프넨 후작이 얼마나 더러운 놈인지 이번 일을 통해 똑똑히 알았다.
이번에는 풀어줬다지만 다시 보게 될 시에 목숨은 장담할 수 없었다. 그가 자주 오는 곳은 피해야 했다.
어차피 떠돌이 신세라 그리 정을 붙인 곳은 없다. 어디로 가야 하느냐가 문제지만….
뒷골목도 나름의 질서가 있어서 새로운 곳에 가 적응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잠깐.”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슈버트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바삐 뛰어온 듯한 리암 메이슨이 서 있었다.
“…소공작님?”
귀족에 대해 다소 무지한 슈버트라도 알 정도로 유명한 리암 메이슨 소공작이 자신을 부른 것이다. 슈버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주변을 둘러보던 리암이 그의 손을 잡고 물었다.
“…알버트 소백작님을 따를 건가?”
느닷없이 사람을 붙잡고 하는 소리치고는 진지한 목소리였다. 갑자기 이걸 묻는 이유도 알 수 없었다.
맹렬히 머리를 굴리던 슈버트는 아까 전 리암과 알버트의 대화를 생각해 냈다.
빌어먹게 좋은 청력은 가물가물한 정신 속에서도 온갖 대화를 들을 수 있게 해줬다. 그의 오감은 항상 예민한 편이었다.
슈버트는 탐색하듯 리암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느티나무에 핀 잎사귀처럼 청량한 녹색이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한 치의 거짓 없는 시선이었다.
슈버트는 이게 알버트를 섬길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임을 깨달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 대답이면 충분해. 나와 함께 가지.”
리암은 슈버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날, 리암은 메이슨 공작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슈버트를 공작가에 들였다.
오로지 단 한 사람. 그의 주군 알버트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