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그녀가 알버트를 보는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바로 지금이 로제 아티어스가 알버트에게 반한 순간이다.
반짝이는 눈,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볼. 몸은 감정에 훨씬 솔직했다.
그녀는 알버트가 떠나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알버트가 왕자가 되었을 때 궁 안에서 마주쳤을 거라 생각했는데, 로제가 알버트에게 반한 건 생각보다 오래전 일이었구나.
오래된 짝사랑이 비틀린 듯싶다. 미래에 알버트와 탑에 감금되고 싶어 할 만큼.
하지만 무엇보다 내 시선을 끈 건 그녀의 몸에 있는 구타 흔적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녀의 존재를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것을 보아서는 환상 마법이 걸려 있는 듯했다.
누가 저랬을까.
제일 먼저 생각나는 건 이 자리를 마련한 예프넨 후작이나 벨페트 둘 중 하나였다.
나는 예프넨 후작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이 발코니로 향했다가 로제에게 향하는 게 보였다.
로제 아티어스와 예프넨 후작이 연관되어 있었다.
그저 예프넨 후작이 너무 빨리 죽어 내가 알지 못했던 것뿐이다.
하지만 로제를 향한 안타까움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나는 그녀를 구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기도 하고, 무엇보다 로제 아티어스는 나와 알버트가 만날 수 있게 해준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이조차도 시련의 일부라면, 이번에는 틀렸다.
로제 아티어스의 미래가 변하면, 나와 알버트가 만날 수 있는 접점이 아예 사라지게 된다.
그녀가 알버트에게 무슨 일을 했는지 아는 내가 그녀를 보며 동정하기만 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과거가 과오를 모두 정당화시킬 수는 없으므로.
하지만 유년 시절이 사람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알기에,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만일 예프넨 후작의 밑에 있지 않았더라면, 로제의 미래도 달라졌을까?
나와 알버트처럼, 그녀를 진심으로 위해주는 사람을 만났더라면?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 알버트를 찾아갔다. 그는 물을 마시며 한숨 돌리고 있었다.
그에게 다가오는 나를 발견한 알버트가 살짝 토라진 얼굴을 했다. 왜 진작 오지 않았냐는 것처럼.
“뭘 그리 보고 있어?”
“그냥… 수고했어, 알버트.”
“당신이야말로.”
알버트가 희미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이번 일이 마음속에 응어리지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는 생각보다 훨씬 태연했다.
물을 한 모금 마신 그가 내게 덤덤히 말했다.
“예프넨 후작이 주는 휴식은 잠시뿐이야. 방금처럼 나를 몰아가지는 못하더라도 비슷한 일이 반복되겠지.”
…방금이 끝이 아니라는 것에 나는 작게 신음했다. 나보다 알버트의 상태가 훨씬 걱정되었다.
“시간을 더 멈출 수는 없어. 스승님께서 주신 건 아까 전 선물이 전부였고. 그러니까… 당신은 다른 곳에 있다 와.”
여전히 나를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당연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알버트의 태도는 내 생각보다 훨씬 완강했다.
“당신이 있으면 걱정돼서 안 되겠어.”
그 말에는 할 말이 없다. 나는 침묵으로 답했다. 알버트의 눈이 반짝였다.
“더 빨리 보내줬어야 했는데 같이 있고 싶다는 욕심에 일부러 말 안 했어. 당신이 있으면 모든 게 더 괜찮은 거 같아서.”
“그럼 내가 계속 있어야지.”
나는 계속 침묵을 지켰다. 따가운 눈초리를 받더라도 그의 곁을 지킬 셈이었다.
“나 진심으로 말하는 거야.”
으음. 알버트가 눈을 가늘게 뜨는 걸 보면 확실히 다른 곳에 있다 와야 할 것 같기는 했다.
“제발.”
알버트가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거절할 수가 없어졌다. 나는 그의 말을 따라주기로 했다.
“…잠시만이야.”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선까지만.
역시나 말을 들은 알버트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의미가 없잖아.”
나는 솔직한 마음을 호소했다.
“내가 널 어떻게 혼자 둘 수 있겠어. 차라리 눈을 감을게.”
내 말에 알버트의 얼굴이 붉어졌다.
“당신은 자기가 하는 말의 위력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
“…응?”
그건 미래의 네게 하고 싶은 말인걸. 내가 그를 응시하자 알버트는 헛기침을 하며 부리나케 사람들 속에 섞여들었다.
평소 같은 모습에 그제야 웃음이 났다.
알버트가 저렇게까지 말했는데 조금만 더 있다 가기로 할까.
나는 발코니에 잠시 나갔다. 로스투라투는 여전히 알버트의 동선을 살피고 있었다.
자신의 후계자 고르는 데 퍽 열심이다 싶었다.
이와 함께 예프넨 후작의 만행이 떠올랐다. 아직 홀 안에 보이는 로제 아티어스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았다. 왜 예프넨 후작이 로제 아티어스를 이곳에 데리고 온 건지부터가 의문이었다.
후작이나 로제의 미래를 건드릴 수는 없지만, 만일 둘의 사이를 알아두면 미래로 돌아갔을 때 로제를 처단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알버트는 나를 위해 로제 아티어스가 흑마법사였다는 증거들을 모조리 처분했다.
로제 아티어스에게는 이미 작위가 주어졌고, 백성들 사이에서도 얼굴이 알려져 있었다.
그런 그녀를 무너뜨리는 데는 적당한 이유가 필요했다.
그 이유를, 지금의 내가 찾을 수도 있는 거다.
찾는다 해도 미래에까지 그 증거가 남아 있을진 미지수이고, 어쩌면 아예 찾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남는 시간에 딱 적격인 일이었다.
어디로 가야 할까 고민하던 나는 예프넨 후작의 방을 떠올렸다.
사적인 공간에 가면 뭔가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아마 시종들이 가장 신경 쓰는 방이겠지. 홀을 빠져나온 나는 예프넨 후작의 방을 찾기 위해 저택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주변을 열심히 살피니 시종들이 유난히 열심히 드나드는 방이 보였다. 아무래도 저곳인 듯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열린 문틈 사이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 아니 드래곤이 푹신한 침대 위에 드러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다소 가쁜 숨을 내쉬며 곤히 자고 있는 파란색의 새끼 드래곤이 이상하리만치 익숙했다.
마지막으로 봤던 알렉산더의 모습과 별 차이가 없었다. 그의 모습은 뇌리에 선명히 박혀 있었다.
현재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새끼 드래곤.
나와 하양이를 위해 자신의 마지막 재해를 바꿨고, 차원을 누비며 여행하길 바랐던 드래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섣부른 생각은 금물이다.
드래곤이 한두 마리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이곳에 잠들어 있는 새끼 드래곤이 알렉산더라는 증거는 없었다.
다행히 방 안에는 새끼 드래곤과 나 둘뿐이었다. 하지만 시종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만큼 긴장을 놓을 수는 없었다.
팔찌를 뺀 나는 우선 문에 락(Lock) 마법을 걸었다.
“…알렉산더?”
그리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알렉산더가 잠이 덜 깼는지 눈을 반쯤 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내 쪽을 보지는 못했다.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려다 신음하는 것으로 보아 목에 상처가 난 듯했다.
그는 자신이 잘못 들었다 생각했는지 인상을 살풋 찌푸리다 다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내 말을 알아들은 건 분명했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미래에 허무하게 삶을 마감한 예프넨 후작은 생각보다 더 많은 곳에 연루되어 있었다.
알렉산더가 지금 이 시기에 예프넨 후작의 저택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건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이 새끼 드래곤이 괜히 예프넨 후작에게 당한 것이 아니다.
알렉산더와 예프넨 후작은 생각보다 오래 알고 있었다.
알렉산더도 조심했을 텐데… 이렇게 예전부터 알았으면서 에프넨 후작에게 죽을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니.
미래의 알렉산더는 예프넨 후작에게 배신당해 죽음에 다다랐고, 그에게 억겁의 세월과 같은 악몽과 자신이 모시던 왕의 손에 죽는 최후를 선사했다.
나와 그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다.
시기도 공교로웠다. 지금은 내가 알렉산더와 서로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며칠 전이었다면 완전한 영혼 상태라 내 목소리조차 전달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대로 두면 알렉산더는 죽고 말 텐데.]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리는 순간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고통스러운 알버트의 모습을 보는 게 끝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죽어가는 상황임에도 너를 도와줬잖아.]
허무하게 스러진 알렉산더의 목숨도 그대로 넘길 수 있느냐고, 시련은 내게 또 다른 딜레마를 선사했다.
나는 지금 알렉산더에게 경고할 수 있다.
내가 예프넨 후작을 믿지 말라 말하면 미래의 알렉산더는 죽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전에 알렉산더가 나를 믿게 하는 것이 먼저겠지만….
내 행동이 알렉산더를 살릴 수 있다. 하지만 그를 살리는 게 미래에 어떤 여파를 불러올지도 생각해야 했다.
알렉산더를 만나게 된 건 리암을 통해서였다.
리암이 죽어가는 드래곤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 그의 존재와 재해를 이용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반란을 위해서.
알렉산더가 반란의 일부가 되지 않는다 해도, 알버트의 반란은 무리 없이 끝날 것이다.
알버트의 실력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가능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알렉산더가 죽으면서 일어나는 재해였다.
그의 재해는 나를 만나며 바뀌었고, 심각한 악몽으로 사람들을 공포 속에 빠트렸다.
무엇보다 그의 재해는 내게 하양이와 계약할 결심을 하는 기회가 되었다.
이게 제일 큰 문제다.
알렉산더의 악몽이 없다면, 내가 하양이와 계약을 결심하는 계기 자체가 사라져 버린다.
나는 생각해야 했다.
과연 내가 알렉산더의 도움 없이도 하양이와 계약했을까?
그걸 알기 전에 알렉산더를 구할 수는 없다. 로제와 다르게 알렉산더의 존재는 내 미래를 왜곡할 수 있으므로.
[기회는 오늘뿐이야.]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알버트가 나를 위해 했던 모든 행동이 떠올랐다. 그가 나를 위해 어떤 굴욕을 참았는지도.
하지만 알렉산더가 마지막 잔인한 재해를 나와 하양이를 위해 바꿔준 것도 알고 있었다.
죄책감이 무겁게 마음을 감쌌다.
하양이도 알렉산더를 그냥 보내는 것은 원하지 않을 듯했다. 같은 새끼 드래곤인 만큼 더.
“너 같은 인간도 있었지.”
알렉산더의 말이 떠올랐다. 모든 것이 너무 버겁게 느껴졌다.
나는 숨을 깊게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고통이 무서운 사람이다. 그런 내가 알렉산더의 일 없이도 여전히 하양이의 계약자가 되었을까?
내가 하양이와 느꼈던 유대감이나 함께했던 시간이 고통을 이겨낼 만한 용기를 내게 주었을까?
재해를 겪기 전, 나는 하양이와의 계약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문득 시계에 시선이 갔다.
내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흘러 있었다. 오늘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알렉산더를 살릴지 말지 정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