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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114화 (114/156)

114화.

알버트와 리암 사이에 보이지 않는 유대감이 형성되고 있었다.

겁먹은 리암이 찰나의 순간에 낸 용기가 알버트의 벽을 허문 것이다.

이 시기가 알버트에게 얼마나 중요한 시기였는지 새삼스레 실감했다.

하지만 이 순간이 그에게 얼마나 치욕스러울지도 잘 알았다.

리암과의 교감은 찰나였고 아직 그가 무릎을 꿇고 기어야 할 사람들은 남아 있었다.

알버트는 무표정한 얼굴로 소매를 올려 자신의 입술을 문질렀다.

계속 숙였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느라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었다. 그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그는 나를 보지 않았다.

내가 이 광경을 보고 있다는 걸 알고 싶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눈을 감고 있을 거라는 말을 믿어서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어느 쪽이든 내 마음은 아렸다.

꽉 쥔 손 때문에 손바닥의 여린 살을 손톱이 파고들었다. 하지만 난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야?]

내면의 목소리가 다시금 내 죄책감을 되살렸다. 온몸이 땅으로 꺼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토록 스스로를 무력하다고 느낀 적이 있던가.

다음으로 알버트가 향한 사람은 벨페트였다.

벨페트가 알버트의 모습을 보며 히죽 웃고 있는 것과 다르게 메르시는 불안해 보였다.

메르시가 신호하는 것처럼 벨페트의 손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벨페트는 자리에 우뚝 섰다. 알버트와 그의 눈이 마주쳤다.

“안녕하십니까, 소백작님.”

알버트를 보는 벨페트의 눈에 탐욕이 흘렀다. 시선에 섞인 감정은 예프넨 후작과 비슷한 듯 달랐다.

예프넨 후작은 알버트를 무너뜨리는 것에 좀 더 의의를 두었다면 벨페트는 그를 이용하고 싶어 했다.

둘 다 더러운 욕망임은 틀림없었다.

“제가 먼저 내밀어드리지요.”

벨페트가 자신의 발을 내밀었다. 순간 메르시와 주위 귀족들이 코를 틀어막았다. 알버트도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아빠, 정말 왜 그래요?”

“쉬이- 잘 보거라, 메르시. 소백작님께서 얼마나 대단하신 분인지.”

비꼬는 듯한 말투에 메르시가 눈을 깜빡였다. 벨페트를 낯선 사람 보듯이 하는 모습이 내 시야에 선명히 박혔다.

메르시는 이를 악물며 속삭이듯 말했다.

“아빠, 아까 토사물을 밟으셨잖아요. 그런 구두를 들이밀면-”

“메르시, 똑똑히 보거라.”

벨페트는 빙그레 웃으며 속삭였다.

“내가 이런 사람이란다.”

그가 알버트에게 선사하려는 굴욕은 그저 자신의 만족감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는 메르시에게 자신의 위치를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게 메르시에게 어떻게 다가올 줄 모르고. 태생이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에, 벨페트는 당연히 메르시가 그를 우러러볼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난 메르시의 눈에 담긴 충격을 읽었다.

메르시는 애초에 그와 다른 인물이었으므로, 이런 일을 순순히 받아들일 리 없었다.

알버트는 둘이 싸우는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둘의 실랑이가 끝나길 기다리려는 듯했지만 이는 오래 가지 않았다.

예프넨 후작의 얼굴에 힘줄이 솟는 것을 본 알버트가 이윽고 무릎을 꿇었다.

이건 내 시련이다. 그러므로 나는 가만히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하는 것이 맞다.

속으로 중얼거리며 나 자신을 세뇌하려 했다. 그게 옳았다.

하지만 나는 알버트가 입술을 깨무는 걸 보고 말았다. 냄새를 참기 힘들어 찌푸린 미간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너무 비겁하게 느껴졌다.

내가 없는 삶이라도, 그가 행복할 수 있다면 된 것 아닐까.

아니다. 하양이도 노력하고 있는데 나 혼자만의 생각으로 이런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건 너무 이기적인 일이다.

…하지만 알버트를 그대로 둘 수가 없었다.

그동안 나는 충분히 비겁했기 때문에.

이성의 끈이 툭 끊어졌다.

주문 같았던 알버트의 요청도 산산이 흩어졌다.

지금 가만히 있는 게 시련을 견디는 거라면, 미래 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지금까지는 하양이의 목숨이 달려 있기 때문에, 그리고 알버트가 간청했기 때문에 참아냈다.

그러나 벨페트의 행동은 내가 참을 수 있는 한계치를 넘어버렸다.

나는 껄껄 웃으며 알버트가 제 구두에 얼굴을 맞대길 기다리는 벨페트 앞으로 다가섰다.

그동안 나는 알버트가 가져다준 마법서로 계속 마법진을 공부했다.

덕분에 이제는 팔찌를 벗으면 어느 정도 사람들에게 효력이 있는 마법을 쓸 수 있었다.

이 공간에 존재하는 썩어빠진 이들을 혼절시킬 정도의 마법은 쓸 수 있었다.

물과 전기 마법을 결합한다면, 그리 큰 마법을 쓰지 않아도 가능한 일이었다.

알버트처럼 3만 명의 병사를 쓰러뜨리지는 못하더라도.

팔찌를 벗기 위해 손을 올리던 중, 마법처럼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알버트와 시선이 닿았다.

그 순간, 알버트의 눈이 노을처럼 붉게 빛났다.

고개를 올려 나를 응시한 알버트가 작게 뇌까렸다.

“하지 말라고 했잖아.”

알버트의 말이 끝나는 즉시, 홀은 오로지 우리 둘만 존재하는 공간으로 뒤바뀌었다.

주위의 모든 것이 멈췄다.

누군가 잔에 와인을 따르느라 튀었던 물방울까지 허공에서 그대로 멈췄다.

사람들의 눈에 초점이 사라졌고 움직임이 서서히 멎었다.

나는 알버트의 손에 깨진 모래시계를 보았다. 금빛 모래 가루가 그의 손가락 사이로 흘러 공중에 흩어졌다.

홀 전체를 감싼 모래 가루는 금빛을 내뿜으며 찬란하게 빛나다 사라졌다.

알버트가 시간을 멈춘 것이다.

…지금의 그가 이 정도의 마법을 쓸 수 있는 힘이 있던가? 몸에 쫙 소름이 돋았다.

시간을 멈추는 마법은 대마법사라도 하기 힘든 것이었다. 마법서에서 읽어 알고 있었다.

알버트는 숨을 내쉬며 내게 다가왔다. 그가 팔찌를 빼려던 내 손목을 꽉 잡았다.

“알버트, 뭘 한 거야?”

“시간을 멈췄어.”

“…왜?”

역시나 주변의 모든 것이 멈춰 버린 건 환상이 아니었다. 알버트는 다시 입술을 잘근 깨물다 입을 열었다.

“당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몰라. 하지만 스승님이 오늘 당신이 뭔가 하려고 하면 막는 게 좋을 거라 말씀하셨어. 지금 모습을 보니 그게 맞는 것 같고.”

그제야 나는 지금 시간을 멈춘 마법이 에밋의 선물임을 깨달았다.

에밋이 오늘 알버트에게 있을 일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몰랐을 리 없었다.

내가 알버트를 챙기는 걸 매일 보았던 사람이다. 내 시련의 의미도 알고 있었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미래의 알버트를 위해, 지금의 알버트와 내게 기회를 준 것이다.

사람들이 많은 홀에서 즉각적으로 이런 자리를 마련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에밋은 해냈다.

주위의 시간을 멈춰 버리는 마법으로 내가 선택을 하기 전에 알버트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선사한 것이다.

“시간은 얼마나 멈춘 거야?”

“십 분 정도.”

10분이라도 지금 우리가 존재하는 곳의 시간을 완벽히 멈추는 건 신과 같은 일이었다.

이 정도면 알버트가 에밋의 정체를 눈치채지 않았을까? 내 눈초리가 가늘어지자 알버트가 작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모래시계는 스승님께서 보관해 두던 선물이라고 하셨어.”

나는 에밋이 아직 알버트에게 진실을 숨기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정체가 완전히 드러나지 않도록 변명을 가져다 붙였다.

내 시련은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건 에밋 역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고.

시련이라는 걸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알버트에게 어디까지 설명할 수 있었을까.

알버트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오늘이 당신이 사라질지도 모르는 날이라며.”

내 손목을 꽉 잡은 그가 공중에 떠 있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윽고 그가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괜찮아. 당신이 상관하지 말라고 했잖아. 그러니 상관하지 않을 거야.”

나는 아까 보았던 표정을 떠올린 후 울컥하며 말을 이었다.

“괜찮지 않잖아. 내가 알아.”

알버트가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곧았다. 내가 그를 구할 때 보지 못했던 삶에 대한 욕구가 보였다.

“무엇보다 이건 내가 지금의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잖아.”

알버트가 이 자리에 온 이유는 그저 초대를 받아서가 아니었다.

예프넨 후작의 말을 고분고분 따른 것도 그저 사람들의 압박 때문만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이 그가 왕자가 될 수 있을 거라 말하는데 당사자가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할 리 없었다.

그는 이 모든 상황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두 계산하고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당신이 살라고 했으니 살아갈 거야. 이건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니까, 이 시간 정도는 견딜 수 있어.”

내 손목을 그러쥔 손에 핏줄이 솟았다. 손에 꾹 힘을 준 알버트가 나를 절박한 눈으로 응시했다.

알버트가 내게 애원했다.

“당신은 그저 내 옆에 계속 있어 주면 돼.”

그는 내가 떠난다는 말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다. 나를 붙잡을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던 거다.

바로 지금처럼.

내 손목을 쥔 손의 감촉이 마치 사슬 같았다.

“난 당신을 위해 이 정도까지 할 수 있어.”

날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이 강렬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날 구하고, 삶의 이유를 찾게 해줬는데, 이대로 그냥 가면 안 되는 거잖아.”

말문이 턱 막혔다. 나는 심호흡을 한 후 그를 불렀다.

“…알버트.”

내가 거절할까 두려운 건지 알버트가 황급히 말을 이었다.

“당신이 돌아가야 하는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내가 더 잘해줄 수 있어.”

그 순간, 멈췄던 홀 안에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가 멈춘 시간이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눈에 맺힐 듯 말 듯 했던 눈물방울이 사라지고 감정의 잔재만 남았다.

그가 내게서 등을 돌린 채 다시 벨페트 앞에 고개를 숙였다.

끊어졌던 이성의 끈이 돌아왔다. 내가 방금 무슨 일을 하려고 했는지도.

머릿속에 남은 건 알버트가 떠나지 말라 애원하던 순간뿐이었다.

머릿속의 목소리에 의한 죄책감이 사그라들었다. 알버트가 방금 무얼 했는지 깨닫는 순간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의 선택이 나를 살렸다.

알버트의 말이 아니었다면, 그 순간 나는 마법을 써서 상황을 뒤바꾸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알버트의 미래를 아예 바꾸는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나만 그를 구한 것이 아니었다. 그도 나를 구했다. 내가 시련 앞에서 흔들릴 때 나를 붙잡았다.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알버트는 벨페트를 지나 다른 귀족들에게 다가섰다.

알버트와 이야기를 나눈 덕분에 이성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이윽고 그에게 지옥 같았을 시간이 지나갔다. 알버트는 예프넨 후작에게 다가가 다시 사과를 건넸다.

예프넨 후작은 기분 좋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차례 고비를 넘겼지만 알버트가 연회를 즐길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를 향하는 사람들의 눈총은 여전히 따가웠다.

알버트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 음료 잔을 들었다.

준비되어 있는 건 와인이 대부분인 곳이지만 주변을 돌아다니는 시종에게 요청하면 물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알버트에게 물을 따라주는 어린 시종의 얼굴이 낯이 익었다. 아니, 시종이 아니다. 어린애였다.

아이에게는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환상이 걸려 있었다. 어린애인 그녀의 모습을 성인인 시종으로 보이게 하는 마법이었다.

나는 현재 영혼의 상태이기에 마법의 영향을 받지 않아 볼 수 있는 것 같았다.

황홀한 듯한 얼굴로 알버트를 응시하는 아이는 맑은 갈색 머리카락에 어울리는 고동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잠시만. 연한 갈색 머리카락에 갈색 눈동자? 상황을 깨닫는 건 빨랐다.

눈앞의 여자애는 내가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빙의했었고 알버트를 탑에 가두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던 하녀. 로제 아티어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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