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나는 예프넨 후작의 개소리를 들으며 고뇌했다.
…진짜 죽이며 안 되는 걸까. 그는 어차피 죽을 몸이다. 나는 그걸 아주 조금 앞당기는 것뿐인데 괜찮지 않을까?
아니, 죽일 수 없다면 알버트에게 준 모욕에 준하는 고통이라도 주고 싶다.
내가 생각해도 얼토당토않은 소리였다. 하지만 유혹을 뿌리치는 건 쉽지 않았다.
내가 여기서 알버트를 위해 나서는 순간 너무 많은 것이 틀어질 것을 알면서도, 그러고 싶다는 충동이 강하게 일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 있는데.
대신 복수할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 있는데.
이 모든 걸 어떻게 그냥 넘길 수 있을까.
어떻게 그저 나와 만나는 미래를 위해서라는 말로 지금 그가 상처받는 일을 그냥 넘길 수 있단 말인가.
입술을 악물었다. 만일 통증을 느낄 수 있었다면 피가 나고도 남았을 것이다.
나는 눈을 감으며 되뇌었다.
이건 시련이다. 나는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됐다. 로스투라투는 안 그래도 알버트를 탐탁지 않아 한다.
내가 여기서 알버트를 돕거나 주위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는 장면이 나온다면, 알버트의 미래가 아주 크게 비틀어질 수 있었다.
나는 알버트의 손 위에 내 손을 얹었다.
알버트의 몸이 순간 움찔했다. 살짝 시선을 내리깐 알버트의 눈매가 느슨해졌다.
내가 곁에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것처럼.
이윽고 알버트가 입을 열었다.
“제가 무엇을 해드리면 좋겠습니까.”
덤덤한 목소리는 모든 걸 포기한 듯 들렸다.
예프넨 후작의 만면에 미소가 피어났다. 사람을 짓밟으며 기뻐하는 그의 욕망을 보는 게 추악했다.
턱을 괸 예프넨 후작이 느리게 말을 이었다.
“돈이 궁하신 소백작님께 제가 감히 보상을 바랄 수는 없고….”
후작은 부러 알버트의 치부를 꺼내 사람들 앞에서 조롱했다.
“역시 사과는 마음에서 우러나와야겠지요.”
그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고뇌하는 듯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뜨더니 알버트 앞에 다가서서 말했다.
“그저 사죄하시는 마음으로 여기 있는 모든 이의 발에 입을 맞추시면 됩니다.”
…뭐?
나는 내가 말을 잘못 들었길 바랐다.
“아, 모두 무언가 신고 있으니 구두가 더 맞는 말이겠군요.”
하지만 예프넨 후작은 잔인하게 말을 이었다.
예프넨 후작은 홀에 있는 모두가 알버트를 탐탁지 않아 하는 것을 알면서 그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그들 앞에 개처럼 기길 바랐다.
알버트의 손등에 얹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울분이 치밀어 올랐다.
온몸에 열이 올라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었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방금 전과 비교할 수 없는 감정이 들끓었다.
이건 사람으로서 할 짓이 아니었다.
그가 적어도 인간이었다면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이딴 짓 따위는 시켜서는 안 되었다.
“이 홀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하기 전까지 저는 소백작님의 사과를 받지 않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예프넨 후작의 목소리에는 어떤 죄책감도 존재하지 않았다.
알버트를 짓밟는 일련의 과정이 그에게는 유흥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내민 말도 안 되는 증거에 더 이상 반박하지 못하고, 어불성설인 요구에 화도 내지 못하는 알버트를 보는 것이.
결국 그들의 말을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는 알버트를 보는 것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그들이 맞이할 왕자는 그만큼 보잘것없어야 했으므로.
“시작은 이 아이부터 할까요.”
예프넨 후작은 알버트 앞에 슈버트를 세웠다. 슈버트는 시종에게 붙잡혀 있으면서도 거세게 반항했다.
하지만 몸에 힘이 없는지 이조차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그가 숨을 헐떡였다.
예프넨 후작이 불현듯 생각났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 귀족이 아니라서 좀 꺼려지십니까.”
해답을 찾은 것처럼 눈을 반짝이던 예프넨 후작이 순수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이 아이는 소백작님의 명을 제대로 받들지 못했고, 제게 들키기까지 했으니 죽이는 것이 어떻습니까?”
떨리는 눈으로 알버트를 마주한 슈버트에게 예전의 패기는 없었다. 폭력에 모든 것이 두려워진 어린애만 보일 뿐이었다.
나는 미래의 슈버트를 떠올렸다. 몇 번 만나지도 못한 알버트를 무척이나 따르고 존경하던 모습을.
그는 분명 알버트가 자신의 목숨을 구했다 했었다.
“아니면 이 아이에게도 자비를 주시겠습니까.”
자비는 곧 슈버트를 위해 무릎을 꿇으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슈버트는 체념한 듯 눈을 감았다.
하지만 난 알버트가 어떤 선택을 할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알고 있기에 마음이 더 아렸다.
홀은 고요했다. 모든 사람은 방관자가 되어 알버트와 예프넨 후작의 대화를 오락거리라도 되는 것처럼 구경했다.
속에서 감정이 끓어올랐다.
[어떻게 사랑하는 이를 구할 기회가 있는데도 외면하는 거지?]
그가 진정으로 행복해할 삶이, 과연 나와 함께하는 미래인가?
아니, 애초에 이런 트라우마 없이 맑은 아이로 커 에밋과 함께 사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불행한 과거를 가진 남주인공이 아니라, 행복한 엑스트라로 남는 것이 더 좋은 선택이 아닐까?
알버트의 손등에 맞댔던 손이 멋대로 움직이려던 순간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마.”
알버트가 내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눈을 감아줘.”
그가 살짝 고개를 움직여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가 다시 예프넨 후작을 보았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의 올곧은 시선에 나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알버트는 고요한 눈빛으로 예프넨 후작을 응시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알버트는 슈버트 앞에 무릎을 꿇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시선을 내린 그의 눈가에 촘촘한 속눈썹이 팔랑였다.
누군가 이곳이 신전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성스러운 모습이었다.
슈버트는 바깥에서 신고 다니던 오래된 신을 신고 있었다. 꾀죄죄한 모습과 어울리는 더러운 신이었다.
슈버트의 몸이 움찔했다. 알버트는 얼굴과 그의 발등이 닿았다.
“세상에….”
“어휴, 더러워라!”
“같은 귀족으로서 체면이 있지….”
그를 향한 야유와 조롱이 흘렀다. 모두 알버트의 모습이 웃긴 코미디라도 되는 것처럼 웃었다.
알버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음은 후작님이십니까.”
“예.”
에프넨 후작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지 못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버트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일련의 과정이 마치 영화처럼 보였다. 알버트가 겪고 있는 상황이 현실감 없었다.
하지만 알버트에게 이건 지독한 현실이었다.
그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에도 무표정한 얼굴에는 변화가 없었다.
아까 마차 안에서 나와 얼굴을 맞댔던 어린아이의 모습이 스쳤다.
그가 얼마나 많은 감정을 억누르고 있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난 울지조차 못했다. 고통을 느낄 수 없고, 생리현상 같은 건 느낄 수 없는 영혼에 불과했기에.
나는 처음으로 내 시련이 육체적인 고통이었길 바랐다.
그랬다면 고통에 시달리는 것은 나 자신이고 다른 사람들은 신경 쓸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생각이었다.
정신적인 고통은 그만큼 사람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뭐라도 하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알버트가 내게 아무것도 하지 말라 했으니까.
그가 내게 어떤 심정으로 그 말을 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굳이 내게 속삭이기까지 한 말을 어길 순 없었다.
나는 알버트가 말한 대로 눈을 감았다. 물론 이건 오래가지 못했다.
그를 보지 않으면 머릿속에 더한 것을 상상하게 되었기 때문에.
연회에 오기 전 한 다짐이 무색해졌다.
다음으로 알버트가 향한 사람은 리암이었다. 메이슨 공작은 리암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리암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메이슨 공작이 지금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다시금 되새겨 준 듯했다.
그렇지만 나는 안다.
메이슨 공작이 없었더라도 리암이 여기서 알버트의 편을 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지금 예프넨 후작이 만들어낸 압박감은 어린애가 이겨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리암에게 뭔가를 바라는 것이 더 이상한 자리였다.
이는 알버트도 알고 있을 터였다.
알버트는 덤덤한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알버트의 코끝이 리암의 부츠에 닿는 순간, 리암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소, 백작님. 저는….”
리암이 속삭이듯 울먹였다.
그는 돕고 싶었을 것이다. 오늘 이 자리에 나와 자신이 우러러보는 알버트와 함께 연회를 즐기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메이슨 공작에게 대들었던 패기가 이곳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러기에는 이곳의 위압감이 너무 컸다.
온몸을 가득 채운 리암의 죄책감이 끝내 눈물로 터져 나왔다. 리암이 덜덜 떨다가 입을 열었다.
“도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물기가 잔뜩 묻은 목소리가 늘어졌다.
메이슨 공작의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리암과 알버트가 이렇게 마주치는 것이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라 생각한 듯했다.
알버트가 도움이 필요한 순간, 리암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니까.
고개를 든 알버트는 리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선에는 아무런 원망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다음으로 메이슨 공작 앞에 무릎을 꿇었다.
리암은 울음을 터뜨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알버트의 행동을 막지는 못했다.
이윽고 알버트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리암이 그의 옷깃을 잡았다.
“다, 음번에는 절대 이러지 않겠습니다.”
“…….”
“그러지 않을 힘을 키우겠습니다. 소백작님을 곁에서 지킬 수 있는 힘을요.”
리암이 웅얼거리듯 한 말은 알버트뿐만이 아니라 그 자신에게 하는 다짐이었다.
“리암,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메이슨 공작이 리암을 작게 꾸짖으며 뒤로 물렸다.
리암은 소매로 눈물을 쓱 닦으며 알버트를 간절히 응시했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거였다.
그를 향한 열렬한 호의와 동경. 리암은 알버트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알버트의 눈이 깜빡였다. 그가 낀 가면 속 감정이 보일 듯 말 듯 하다 사라졌다.
멈칫하던 알버트가 작게 속삭였다.
“…다음 대련 때는, 이 부츠 말고 다른 것을 신어주십시오.”
알버트가 리암에게 조금이나마 마음을 열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