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112화 (112/156)

112화.

밖에는 특별히 준비된 마차가 알버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그가 부른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돈을 빌리러 다니는 상황에 마차에 쓸 돈은 없었으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사려 깊은 선물처럼 보였지만, 이건 그를 감시하기 위한 예프넨 후작의 수작이었다.

알버트는 덤덤한 얼굴로 마차 안에 올라탔다.

마차가 덜컹거렸다. 알버트는 다소 초조한 얼굴로 바닥을 보다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긴장되는 모양이었다.

“손잡는 게 도움이 될까?”

나는 알버트의 손 위에 내 손을 슬그머니 얹으며 물었다. 알버트가 내 말에 눈을 깜빡이더니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버트.”

나지막이 그의 이름을 부른 나는 그의 손 마디마디 사이에 깍지를 낀 후 이마를 맞댔다.

덤덤하던 알버트의 얼굴에 화악 열이 올랐다.

“뭐, 뭐 하는 거야!”

알버트가 당황스러운 듯 말을 더듬었다. 나는 뒤로 물러선 알버트 가까이 다가서며 이마를 맞댔다.

마차는 좁아서 알버트가 도망칠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안다고 해서 마음의 준비가 되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가기 전 그 시간을 견딜 수 있을 힘을 주고 싶다.

알버트와 내 시선이 아주 가깝게 닿았다.

“이 세상에 태어나 나와 만나줘서 고마워.”

갑작스러운 말에 놀란 모양이다. 알버트는 할 말을 잃은 듯 멍하니 나를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 안에 내가 가득 담겨 있었다.

“다시 살아가기로 마음먹어 줘서 고마워.”

그에게 언제나 하고 싶었던 감사 인사였다.

알버트는 여전히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이마에 내 이마를 꾹 눌렀다가 떨어졌다.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상처 입지 마.”

“…….”

“아니, 상처 입으면 말해줘. 내가 위로할 수 있도록.”

“…난 당신한테 줄 수 있는 게 없는데 왜 항상 주려고 해?”

알버트가 겨우 입을 열어 물었다. 그의 시선이 의문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내게 준 것이 없다는 건 거짓이다.

나는 그에게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받았다. 미래의 그에게도, 과거의 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환히 웃으며 답했다.

“넌 존재만으로도 내게 매 순간 행복을 선사하는걸.”

내 손을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왜일까, 평소와 똑같은 얼굴인데 그가 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표정을 감추고 싶었던 걸까. 황급히 고개를 숙인 알버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절대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내 손이 그에게 마지막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붙잡았다.

이윽고 우리는 예프넨 후작의 별장에 도착했다.

***

겉으로 보기에도 저택의 규모는 엄청났다.

알버트가 있는 별장의 세 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저택은 무척이나 고급스럽고 호화로웠다. 북부에 있던 리암의 성보다도 컸다.

마차에서 내리자 시종이 우리를 안으로 안내했다.

복도로 들어선 나와 알버트는 연회가 곧 시작될 것이라는 말과 함께 커다란 홀로 안내되었다.

시종들의 눈길이 슬쩍 알버트를 향하는 게 느껴졌다.

알버트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그들의 눈길을 외면했다. 나와 함께 있을 때와 전혀 다른 차가운 표정이었다.

“이쪽입니다.”

잔잔한 음악이 들리는 홀은 대단한 규모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사람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화려하게 장식된 방인데 음산한 분위기가 났다. 저택은 마치 예프넨 후작의 내면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끝자락에 있는 테이블에는 사람들을 위한 간단한 다과와 와인이 마련되어 있었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이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와인 잔을 맞댔다. 챙그랑 하는 소리가 음악과 어우러졌다.

알버트가 홀 안으로 걸음을 내디딘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홀 안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누구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기괴하리만치 집요한 시선이었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데 내 등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알버트는 입을 다문 채 이를 의연히 받아들였다.

알버트는 앞으로 계속해서 나아갔다.

고개를 까닥하며 사람들에게 차례대로 인사를 건넨 알버트는 테이블 가까이 다가섰다.

“소백작님!”

다행히 아는 얼굴이 있었다. 리암이 알버트의 얼굴을 보고 부리나케 달려온 것이다.

“오랜만입니다.”

그는 활짝 웃으며 알버트에게 손을 내밀며 인사했다. 그의 밝은 분위기는 이 저택과 너무 대조되어 이질적이었다.

“저도 오랜만입니다.”

알버트는 살짝 느슨해진 눈을 곱게 휘며 리암의 손을 잡았다.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니 나까지 흐뭇해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는 얼굴이 또 보였다.

에밋에게 협박당했던 벨페트와 그의 뒤를 졸졸 따르고 있는 메르시였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과자를 보고 눈을 반짝이던 메르시는 이내 마카롱을 하나 집어 들고 오물오물 씹어 먹었다.

단것을 먹으며 좋아하는 모습이 천진난만했다.

음식을 먹으면서 알버트를 흘끔흘끔 보는 게 아무래도 관심이 있는 모양이었다.

모든 게 평화로워 보이는데 이상하게 갈수록 불안감이 더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내 예상은 예프넨 후작이 홀에 들어서는 순간 사실화되었다.

그가 들어서는 순간 홀의 공기는 또다시 뒤바뀌었다.

“아, 소백작님. 드디어 오셨습니까.”

“이런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프넨 후작님. 참석할 기회를 얻게 되어 영광입니다.”

알버트는 격식을 차려 예프넨 후작에게 인사를 건넸다.

알버트를 응시하던 예프넨 후작의 시선이 홀과 연결되어 있는 발코니에 닿았다.

뭔가 수상하다.

커튼이 쳐져 있고 아무도 얼쩡거린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발코니를 신경 쓰는 게 마음에 걸렸다.

저 안을 반드시 살펴봐야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예프넨 후작과 알버트가 서로 인사를 나누는 지금이 적기였다.

“알버트, 나 잠시만 뭐 확인하고 올게.”

알버트에게 먼저 속삭이며 양해를 구한 나는 재빠르게 움직여 발코니로 향했다.

의외로 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밖으로 나온 나는 로스투라투를 발견했다.

“이제 시작하려나 보군.”

알버트를 보며 만족스럽게 웃는 얼굴은 마지막 연회를 마음껏 즐기던 얼굴을 닮아 있었다.

그는 커튼 사이의 틈으로 알버트와 예프넨 후작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둠에 잠긴 발코니라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았다. 그가 숨어 누군가를 관찰하기에는 적당한 자리였다.

“과연 왕자의 재질일는지….”

로스투라투가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에밋의 예상이 맞았다.

알버트가 왕자가 되기 전, 로스투라투는 알버트가 어떤 사람인지 확인하기 위해 이곳을 찾은 것이다.

나는 로스투라투의 귓가에 뭔가 있는 걸 발견했다. 목소리를 전달시켜 주는 장치인 듯했다.

보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다소 거리가 있는 발코니까지 알버트와 예프넨 후작의 목소리가 전달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로스투라투의 눈에서 나는 불신감을 읽었다.

그는 아직 알버트를 왕자의 자리에 올릴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다.

[내 행동이 미래를 바꿀 수 있어.]

머릿속에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등줄기에 소름이 다시 돋았다. 나는 주먹을 꽉 쥐며 심호흡했다. 그리고 다시 알버트에게로 돌아갔다.

예프넨 후작과 인사를 끝냈을 텐데 둘은 여전히 대치 상태였다.

아까 전보다 분위기가 훨씬 무거웠다. 잠깐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왜 이렇게 되었지?

홀 안에 기묘한 침묵이 흘렀다.

인상을 찌푸리며 주위 상황을 파악하려 하는데 예프넨 후작이 입을 열었다.

“소백작님, 제 말 이해하셨습니까?”

“예.”

알버트의 시선이 순간 나를 향했다. 내 어리둥절한 얼굴을 본 그가 말을 이었다.

“제가 길거리를 돌아다니던 아이를 시켜 후작님의 지갑을 훔치려 한 것이 아니냐, 말씀 주셨지요.”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우선 돈이 궁핍한 상황인데 다른 사람을 시켜 지갑을 훔치려 했다는 전제부터 논리에 어긋났다.

그것 말고도 아예 말이 안 되는 부분이 많았다.

알버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사람들이 벌써 수군대고 있었다.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를 보았다. 지금 일에 개입하기엔 방금 본 로스투라투가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후작님. 저는 소백작이고 앞으로 후작님을 계속 뵈어야 할 사람입니다. 심지어 저희 집안의 빚을 갚는 데 도움을 주신 후작님께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알버트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예프넨 후작의 모순을 반박했다. 예프넨 후작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그건 지금 알아보면 되겠지요.”

예프넨 후작이 시종을 향해 손짓했다.

그의 말을 듣고 나간 시종이 홀 안에 다시 들어왔다. 그의 손에 한 아이가 끌려 들어오고 있었다.

아이는 꽤 오래 구타당한 듯 온몸에 멍이 들어 있었다. 눈은 천으로 가려져 있었고 온몸은 결박되어 있었다.

“이 아이가 증거가 되어 줄 거거든요.”

시종이 눈을 가린 천을 풀었다.

‘세상에.’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곳에는 멍 때문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슈버트가 있었다.

아이의 참담한 모습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리는 어른은 한 명도 없었다.

경악한 얼굴을 한 건 오로지 리암과 메르시뿐이었다.

홀 안의 정의는 오로지 예프넨 후작의 생각대로 흘러갔다.

“처음에는 계속 말을 아끼더군요. 고통을 주니 그제야 입을 열었습니다.”

가쁜 숨을 내쉬던 슈버트의 동공이 커졌다. 그가 온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알버트는 덤덤한 얼굴로 슈버트와 시선을 맞췄다.

“자, 다시 말해보아라. 누가 네게 내 소지품을 훔치라 했다고?”

슈버트가 입을 뻐끔거리다 꾹 다물었다.

예프넨 후작이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예프넨 후작이 슈버트에게 알버트를 모함하라고 강요했다는 것을.

예프넨 후작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저런, 아이가 덜덜 떠는군요. 자신을 협박한 당사자가 앞에 있으니 겁에 질린 모양입니다.”

“그게 아니-”

슈버트가 발끈한 듯 이야기하다 콜록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를 끌고 들어왔던 시종이 천으로 슈버트의 입을 틀어막았다.

괴담에 나올 법하게 섬뜩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예프넨 후작의 말에 아무도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애초에 증인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적당한 구실이었기 때문에.

모두 한마음 한뜻이었기 때문에.

예프넨 후작이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안심하십시오, 소백작님. 저도 큰 벌을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소백작님과 계속 뵈어야 하는 사이기도 하고요.”

“…….”

“하지만 합당한 벌은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개소리라고 칭할 수도 없는 말에 나는 처음으로 살의를 가졌다.

그가 미래에 죽을 사람임을 알면서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