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111화 (111/156)

111화.

예프넨 후작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시종과 마주했다.

“말한 것은?”

“준비되었습니다.”

예프넨 후작의 눈이 음흉하게 빛났다.

연회에서 알버트에게 굴욕적인 시간을 선사하기 위한 준비가 차츰 끝나갔다. 시종이 그의 눈치를 살피다 물었다.

“반항이 거센데, 정말 이 아이로 하시겠습니까?”

“어차피 일이 잘못되면 목을 칠 것이니 괜찮다.”

이 정도면 자비로운 처사였다. 자신의 주머니를 털다 들킨 시점부터 아이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특별히 이번 일을 위해 목숨을 붙여놓았을 뿐이다.

빈민가를 뒹굴던 천한 아이. 알버트와 딱 맞는 조합이 아닌가.

“기대되는군.”

알버트를 위해 마련해 둔 자리를 생각한 예프넨 후작은 즐겁게 웃었다.

로스투라투가 건재한 이상 자신의 앞날은 계속 창창할 것이었다.

조금만 눈을 돌리면 삶이 이렇게 달콤해질 수 있는데, 왜 사람들은 그리 아득바득 살려 애쓰는지 모르겠다.

다음으로 그는 지하로 내려갔다.

이곳은 예프넨 후작만 드나들 수 있는 공간으로, 특별한 열쇠가 없으면 아무도 갈 수 없는 곳이었다.

수도의 저택에 있는 그의 제물 제단에도 비슷한 장치가 되어 있었다.

감옥 안쪽에 쓰러져 있던 아이가 인기척을 알아차리고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나, 나가게 해주세요….”

아이는 꼬질꼬질한 얼굴로 간절히 말했다. 옅은 갈색 머리가 덜덜 떨리는 얼굴과 함께 흔들렸다.

벨페트에게서 사들인 이름조차 없던 고아는 생각보다 더 마법에 재능을 보였다.

그는 이를 이용해 볼 작정이었다.

“내 말을 들으면, 나갈 수 있게 해주마.”

아이의 마력을 최대한 성장시킨 후 자신의 제물로 삼을 것이다.

‘이게 마지막 제물이겠지.’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이들을 제물로 바쳐도 자신의 마력에는 그리 변화가 없었고 시체를 처리하는 일도 점점 까다로워지고 있었다.

어쨌든 이번 아이가 그냥 죽는다 해도, 자신에게는 알렉산더라는 차선책이 있었다.

“무엇이든 할게요. 제발….”

아이가 두 손을 꼭 잡고 빌었다. 눈빛에 간절함이 섞여 있었다.

굶주린 아이는 모든 것에 쉬이 마음을 주었다. 예프넨 후작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럼 네 주인이 누구인지 말하는 것부터 다시 시작해야겠구나.”

로스투라투가 권력을 잡고 있는 이상, 그의 삶에 오점이란 없었다.

***

나는 알버트와 매일 축제를 구경하러 갔다. 온 마을을 뒤덮은 눈꽃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알버트에게 매일 선물을 가져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소한 선물이었지만 알버트는 한 번도 거절한 법이 없었다.

축제가 끝나가며 내 몸에도 변화가 생겼다. 팔찌를 끼지 않아도 내 얼굴이나 몸의 일부가 다른 사람에게 보이게 된 것이다.

영혼이나 마법에 의지하지 않아도 되는 육체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는 하양이가 제대로 시련을 이겨내고 있다는 말이었다.

나는 계속 하양이에게 인사를 보냈다. 하양이에게 보내는 이야기는 하루의 일기와도 같은 일상이 되었다.

보이지 않아도 이어지는 것이 있었다. 나는 하양이를 믿었다.

이윽고 알버트가 예프넨 후작의 연회에 가는 날이 되었다.

그레텐이 특별히 신경 쓴 날이었다.

알버트는 오늘을 위해 특히 질 좋은 크라바트를 매고 보석 커프스를 달았다.

뒤로 쓸어 넘긴 머리는 그를 어른스러워 보이게 했다.

나도 덩달아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소백작님 얼굴이 닳겠습니다.”

옆에서 내 모습을 구경하던 에밋이 질렸다는 듯 이야기했다. 나는 그를 흘겨본 후 알버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옷의 깃 하나하나도 허투루 넘길 수 없었다. 그의 모습을 보면서 할 수 있는 말은 하나였다.

“알버트, 완벽해.”

알버트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당황스러운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돌렸지만 내 마음이 전해졌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내 눈에 완벽한 알버트라도 예프넨 후작에게는 달리 보이겠지.

그의 미래를 위해 보내야 한다는 마음과, 더 이상 알버트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충돌했다.

하지만 나는 에밋의 말을 기억했다.

그는 현재 알버트가 처한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생각 없이 움직이는 인간들이 아닙니다.”

에밋은 알버트를 거들떠도 안 보던 예프넨 후작이 굳이 그를 초대한 것엔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말했다.

얼마 전 메이슨 공작의 방문도 이를 알아차렸기 때문일 것이라 예상했다.

한마디로 이번 연회는 알버트가 왕자의 자격이 있는지 확인하는 자리일 것이라는 말이었다.

알버트가 왕자가 되는 것은 그의 인생을 좌우하게 되는 가장 큰 사건이었다.

머릿속에 울리는 소리가 커졌다.

[네가 알버트를 연회에 보내지 않으면 그는 그냥 백작으로 살 수 있을 텐데.]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다. 나는 몸을 부르르 떨며 한숨을 내쉬었다.

시련은 매 순간 나를 심판대에 올렸다.

알버트의 어깨를 꾹 잡은 나는 진지하게 물었다.

“진짜 가도 괜찮겠어?”

“애초에 내게 선택지는 없었는걸.”

알버트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오늘 그곳에 가면 그를 물어뜯을 사람들뿐일 텐데.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알버트가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괜찮아.”

괜찮다는 말이 이때부터 입에 뱄어! 이런 습관은 고쳐져야 옳다. 나는 단호히 그의 말을 부정했다.

“…넌 괜찮지 않아.”

“맞아.”

내 말에 순순히 수긍하는 알버트를 보니 어이가 없었다. 그러면서 어디를 가겠다고….

“그런데 당신 덕분에 괜찮아졌어.”

알버트가 살짝 웃었다.

“조금 더 살아갈 용기가 생겼거든.”

알버트가 내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당신 덕분에.”

그 말에 고뇌하던 머릿속이 맑아졌다.

그가 피할 수 없는 고난이라면, 함께해 주는 것으로 함께 이겨낼 수 있다.

나도 이런 시련 따위 다 이겨낼 수 있다. 알버트도 보고 하양이도 봐야 한다!

나는 다시 각오를 다졌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저 각오 때문은 아니었다.

나는 내 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나는 에밋과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가 죽는 상황을 바꿀 수 없다면 알버트에게 그의 죽음이 덜 충격적이었으면 했다.

본래 에밋은 알버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련을 맞이한 후, 죽기 전 이곳으로 돌아와 알버트에게 자신의 마지막을 보일 예정이었다.

그의 죽음이 알버트에게 고통스러운 트라우마로 남을 수 있도록. 평생 드래곤을 싫어하게 되도록.

그때 자신이 벨페트에게서 갈취한 돈도 같이 전달해 주려 했었고.

나는 에밋을 설득하려 애썼다. 그와 알버트의 마지막이 그렇게 비극적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말한 것이다.

이는 알버트가 왜 드래곤을 싫어하는지 알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에밋의 죽음이 아니더라도, 알버트는 나와 하양이가 사라지는 모습을 볼 터이고, 나 때문에 드래곤을 싫어하게 되니까.

내 끈질긴 설득에 에밋은 결국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고-몇백 년 살았다고 고집이 훨씬 센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는 결국 알버트에게 자신의 마지막을 제대로 보이기로 했다.

…아니, 그러기로 했는데 아직까지 에밋이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이건 약속하고 다르잖아! 나는 속으로 꿍얼거리며 에밋을 조용히 흘겼다.

내 시선에 후 숨을 내쉬던 에밋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아, 소백작님. 참고로.”

“…예.”

“내일이 블래키의 500번째 생일날입니다.”

알버트가 멍한 얼굴로 에밋을 바라보다 입을 서서히 벌렸다.

알버트의 시선이 점점 사나워졌다. 에밋이 움찔했다. 자신이 잘못한 것은 아는 모양새였다.

“이럴 줄 알아서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내게 겨우 들릴 정도로 작게 중얼거린 에밋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물론 내 양심은 전혀 타격을 받지 않았다.

미간을 좁힌 알버트가 크게 소리쳤다.

“아니, 왜 그걸 지금 말해주시는-”

에밋은 손을 휘휘 저으며 알버트의 말을 끊었다.

“말씀드렸잖습니까. 제게 너무 정 붙이지 마시라고.”

냉정하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순식간에 할 말을 잃은 알버트가 입을 꾹 다물었다.

칼같이 그를 자르는 에밋의 모습에 상처 입은 듯 보였다.

둘 사이에 냉기가 풀풀 흘렀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땀을 흘렸다.

아니, 이러라고 말한 게 아니라고! 스승과 제자의 마지막이 더 아름다워지길 바란 거라고!

“알버트, 그래도 마지막 순간을 너와 함께하고 싶어서 말씀하신 거야.”

나는 에밋 대신 상황 수습에 나섰다.

하지만 알버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가 에밋을 물끄러미 응시하다 물었다.

“…스승님, 정말이세요?”

에밋은 알버트의 시선을 애써 외면했다.

“돌아오면 뵙겠습니다.”

하지만 그는 알버트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에밋의 말투에서 나는 알버트를 보았다.

말로는 서로 아니라면서 몸은 진심을 숨기지 못하는 모습이 똑 닮아 있었다.

쌀쌀맞은 듯 행동하면서 신경 쓰는 모습은 에밋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나 보다.

알버트의 얼굴도 한층 밝아져 있었다. 쑥스러운 듯 자신의 뒷덜미를 긁던 알버트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갈 거야?”

에밋은 오늘 연회가 알버트의 미래를 위해 피할 수 없는 자리임을 알았기에 가는 것을 막지 않았다.

하지만 가지도 않는다 했다. 굳이 알버트가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난 달랐다.

그를 혼자 두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나는 이 자리를 피할 수 없었다.

이번 연회는 내 시련의 일부였으니까.

나는 활짝 웃으며 알버트의 손을 잡았다.

“당연하지, 내가 널 어떻게 혼자 보내.”

알버트가 내 말에 눈을 크게 뜨더니 웃었다.

해맑게 웃던 알버트가 뭔가 생각난 듯 급하게 말을 이었다.

“…계속 나랑 붙어 있을 필요는 없어.”

오늘 자신이 어떤 일을 겪게 될지 대충 짐작하면서, 같이 가는 내게 그런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아 하면서 그는 내가 같이 간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만큼 혼자가 두려웠던 것이다. 나는 알버트와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내가 듣거나 보지 않았으면 하는 게 있다면 다 말해줘.”

“…….”

“네가 원할 때 귀를 막고 눈을 감을 테니까.”

그가 원하지 않는다면, 난 최선을 다해 그의 의견을 존중할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가 어떤 상황에 처할지 몰랐으니까.

그리고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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