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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110화 (110/156)

110화.

에밋이 벨페트에게 돈을 받으러 간 사이, 나는 알버트에게 돌아왔다.

알버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에밋의 죽음을 알면서도 그를 설득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피어올랐다.

내가 막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서 더 그런지도 몰랐다.

안절부절못하던 알버트는 내 모습을 보고 얌전해졌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스승님은 어디 계셔?”

“금방 오실 거야.”

내 말에 알버트가 뚱한 얼굴을 했다.

“내가 스승님을 돌봐달라고 했잖아.”

알버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일이 정말 다 끝났는걸. 마탑주가 정말 놀랍게도 에밋의 말을 다 받아들였다니까? 보복 걱정은 안 해도 돼.”

나는 사실을 적당히 뭉뚱그렸다. 알버트가 더 이상 에밋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도록.

“이야기는 잘 끝났어. 돈 가지고 오실 거야. 네가 걱정할 만한 일은 없었어.”

하지만 내 말이 끝난 후에도 알버트는 내 표정을 계속해서 살폈다.

“…흐음.”

가늘어진 눈초리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알버트의 입이 서서히 열렸다.

“그런데 당신 얼굴은 왜 이렇게 어두워?”

“…….”

“나쁜 일이 일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알버트도 묻고 싶은 것이 많을 것이다.

이야기는 어떻게 흘러갔는지, 에밋이 벨페트를 어떻게 협박해 돈을 준비하게 만들었는지. 왜 보복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지.

어디까지 말해줄 수 있을까. 나는 생각에 잠겼다.

에밋의 이야기를 듣고 시련을 겪으며 계속 생각했다.

그가 나만큼이나 믿고 따르는 에밋의 죽음을 그냥 넘겨도 되는 걸까? 그냥 그가 죽게 놔두는 게 정말 순리인가?

에밋은 자신의 죽음을 막지 말라 했다.

그래, 어쩌면 그의 죽음은 막을 수 없을지 모른다.

이미 정해진 사실을 바꾸면 나뿐만이 아니라 하양이의 목숨까지 위험해진다.

나는 살아서 알버트를 다시 만나고 싶다. 내가 지금 느끼는 고통과 죄책감을 이겨내야 한다면, 그렇게 하겠다.

하지만 자잘한 것들은 바꿀 수 있지 않을까?

그가 에밋의 죽음을 좀 더 마음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우선 에밋의 의견도 묻고 생각을 더 해야 했다. 하양이의 목숨도 걸려 있는 일이니 나 혼자 생각만으로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가 겪어야 할 시련을 바꿀 수 없다면, 그 강도만이라도 줄여주고 싶은 게 내 마음이었다.

나는 알버트를 흘끔 보았다. 알버트가 나와 시선을 맞추더니 선선히 말했다.

“당신을 믿으니까 더 묻지 않을게.”

생각지 못했던 답이었다.

내 손을 꼭 잡은 알버트가 다시 단호히 말했다.

“당신을 믿으니까.”

맞잡은 손에서 온기가 전해져 오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눈치가 너무 빨라진 어린 알버트는 사람들의 감정이나 기분을 너무 잘 읽었다.

미래의 그처럼, 내가 원하는 말을 할 줄 알았다.

그를 위로하려 했는데, 되려 위로받고 있었다.

이런 그를 어떻게 살피지 않을 수 있겠어. 그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울컥하는 감정을 삭였다. 몸을 숙인 나는 나보다 훨씬 작은 알버트를 품에 안았다.

그러고는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알버트, 난 네가 정말 좋아.”

“뭐, 뭐….”

“네가 너라서 좋아. 이 세상에 태어나 줘서 고마워.”

그가 이토록 사려 깊은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했다.

좋아한다는 말로 부족했다. 하지만, 사랑한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고백을 해야 할 알버트는 미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다시 만나면 그에게 사랑한다고 계속 이야기해야겠다. 알버트에 비해 항상 내 표현이 부족했던 것 같아서 후회가 되었다.

지금 그를 만나고 있지만, 우리가 서로에 대해 알고 있는 건 너무 다르니까.

내 직구에 당황한 듯 얼어붙은 채로 안겨 있던 알버트가 자신의 손을 들어 내 등을 토닥토닥했다.

그가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너한테 좋아한다는 표현을 너무 안 한 것 같아서.”

“…무슨 일 있었냐니까 이상한 말만 해.”

“조금, 힘든 일이 있었어.”

알버트가 내 품에서 벗어난 후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뇌하던 알버트가 설마 하는 얼굴로 물었다.

“스승님한테 혼난 거야?”

“아니, 그냥….”

그에게 나는 언제나 솔직하게 말했다. 지금의 그가 어린애라 해서 모든 걸 숨기고 싶지는 않다.

본능적으로 지금 내가 시련을 겪고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알았다.

현자이자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에밋은 예외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에게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내 행동이 지금 널 상처 입히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져서 무서웠어.”

“…당신이 나한테?”

알버트가 황당하다는 듯 말하더니 어이없다는 듯 덧붙였다.

“내 목숨을 구한 사람이 날 어떻게 상처 입혀.”

그 짧은 말에도 나는 다시 위로받았다.

그가 내 손을 만지작거리다 고개를 올렸다. 올곧은 시선과 맞닿았다. 알버트가 불안한 듯 눈을 깜빡이다 중얼거렸다.

“당신이 살린 목숨이잖아. 혼자서 겁먹지 마.”

“…….”

“난 당신이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알버트는 내게 벌써 많은 정을 주었다.

나와 함께하는 시간이 그에게 행복한 기억으로 남았다는 것 같아 그만큼 기뻤지만, 그가 얼마나 사람의 애정에 고팠는지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했다.

그는 벌써 내 상태를 살피고 나를 챙기려 든다.

나는 그의 새끼손가락에 내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그리고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우리 하나 약속하자.”

알버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뭘?”

“네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좀 더 표현해 주기.”

미래의 그가 짊어진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다.

“나는 네가 계속 그랬으면 좋겠어.”

나지막이 중얼거린 난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네게 원하는 게 너무 많지. 이기적이게.”

알버트가 눈을 깜빡였다. 그가 침묵하다 중얼거렸다.

“당신한테만 그럴래.”

그의 붉은 눈동자 안에 아직 터지고 있는 불꽃이 담겼다. 그의 시선에 색색의 빛깔이 스며들었다.

알버트가 내 손에 새끼손가락을 꼭 말았다. 미성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가 단호히 나를 마주했다.

“그러니까 당신은 그래도 돼.”

미래의 그처럼 나를 홀릴 듯했다.

“내게 좀 더 많은 걸 바라도 돼.”

그럼 당신이 날 떠날 수 없을 테니까.

알버트의 목소리가 선명히 내리꽂혔다.

하늘에서 터지는 불꽃 사이로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주위를 수놓은 눈꽃과 화려한 불꽃, 그리고 눈까지 내리는 축제의 한가운데는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무엇도 알버트의 간절한 마음처럼 아름답지는 못했다.

***

예프넨 후작은 아침 일찍 알렉산더에게 인사를 올린 후 방을 나왔다.

자신의 본성을 숨기기 위해 이토록 노력한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새끼 드래곤을 만나지 않았는가.

자신의 평생 꿈이었던 대마법사가 될 날이 더 가까워졌다.

살면서 새끼 드래곤을 만나게 되는 건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기 때문이다.

눈앞에 보물이 있는데 어떻게 지나칠 수 있을까.

드래곤은 계약자를 고르는 데 무척 신중한 편이기 때문에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알렉산더는 특히나 경계심이 높았다.

우선 친근한 태도로 다가가 그를 치료해 주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아직 자신을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아마 알렉산더의 신뢰를 얻으려면 앞으로 10년이 넘는 시간을 잘 보살펴야 할 것이다.

드래곤의 시간 개념은 인간과 확실히 달랐다.

물론 계약자가 되고 나서 생길 마력을 생각하면 그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로스투라투가 군림하는 세상에서 권력자로 자리한 자신에게는 전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드래곤은 오랜 시간을 살았다. 사람에게 여러 이면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이였다.

누군가에게는 천사인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악마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예프넨 후작을 단호히 밀어내지도, 완전히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예프넨 후작은 그 앞에서 순수한 학자를 연기했다.

‘500살 생일까지 20년 정도 남았다던가.’

혼자 시련을 맞이하는 드래곤은 흔하지 않다. 주위 인간 중에서 계약자를 찾으려 들 것이고, 생일 바로 전까지 신중할 것이다.

그때까지 좋은 사이를 유지해야 했다.

‘나를 선택하거라, 드래곤.’

예프넨 후작의 눈이 탐욕으로 빛났다. 알렉산더를 떠올리는 얼굴이 흥분으로 차올랐다.

‘그러지 않는다면 네게 죽음을 선사할 것이야.’

이 새끼 드래곤이 그 후에도 자신과 계약을 하려 들지 않는다면 단단히 복수할 것이다.

자신이 이렇게 공을 들이는데 그에 응당한 보상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재해 정도야 자신의 인맥과 돈이면 충분히 커버할 수 있었다. 자신은 옆 나라로 몸을 피하면 아무 문제 없을 것이다.

생각을 갈무리한 예프넨 후작은 입맛을 다셨다.

‘타고나지 못한 것이 아쉽군.’

신은 공평한 모양이다. 그에게 권력과 머리를 준 대신 마력을 주지 않은 것을 보면. 그의 발걸음이 바삐 움직였다.

축제에 맞춰 매번 여는 연회였지만 이번은 좀 달랐다.

특별한 손님이 있었기에 각별히 신경 쓰고 있었다.

‘손님이라는 말은 과분하군.’

예프넨 후작은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저었다.

손님보다는… 자신의 입맛에 맞을 꼭두각시를 찾는다는 말이 더 옳을 것이다.

알버트 그레이. 그가 과연 왕자가 될 만한 자질을 가진 자인지 확인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연회는 알버트가 과연 나중에 로스투라투와 자신의 뒤를 칠 만한 가능성이 있을지 확인하는 자리였다.

한마디로 그를 능욕하는 자리라는 말이었다.

슬슬 로스투라투가 후계자를 뽑아야 할 시기가 오고 있었다. 그 자리에 알버트 그레이는 적격이었다.

하지만 로스투라투는 그가 미인인 것을 알고 탐탁지 않아 했다. 그에게 왕자는 벌레처럼 보잘것없는 존재여야 했다.

나중에 왕으로 추대받더라도 은퇴한 로스투라투와 그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날 수 있도록.

알버트의 얼굴을 떠올리던 예프넨 후작이 인상을 찡그렸다.

‘확실히 생긴 건 반반하지.’

하지만 그게 전부다. 권력이 없는 자의 미모는 오히려 사는 데 방해만 될 뿐이다.

얼마 전에도 자신에게 돈을 꾸러 왔던 그레이 부부를 생각하면 알버트 그레이가 여태 미치지 않은 것이 대단했다.

모두 쉬쉬하면서 그레이 집안을 비웃는 건 덤이었다.

왕가의 혈통을 가지고 있으면서 망가진 집안은 왕자가 되기에 적격이다.

그래서 더 짓밟아야 했다.

알버트가 겪게 될 상황을 떠올리며 예프넨 후작은 희열에 찬 미소를 지었다.

어린 새싹을 짓밟는 일은 이토록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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