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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109화 (109/156)

109화.

“세상일에 관심 가지지 않으려 했고, 이는 알버트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였지만….”

어두운 목소리로 말하던 에밋이 어깨를 으쓱였다.

“제 마지막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 정도 개입은 예외라고 치지요.”

내게로 고개를 돌린 에밋이 말을 이었다.

“예컨대 알버트가 걱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겁니다. 그가 알아야 할 것도.”

나는 가볍게 눈을 흘겼다.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으시니 알버트는 걱정할 수밖에 없지요. 알버트는 에밋 님이 초월자인 것도 모르잖아요.”

“알버트가 저에 대해 더 알 필요는 없으니까요.”

에밋은 유난히 알버트와 거리를 두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세상에 관심 없는 그가 마탑주를 건드리면서까지 알버트를 챙겨준다는 건 한 가지 결론밖에 나지 않는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결국 알버트에게 정을 주신 거고요.”

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에밋이 어깨를 으쓱했다.

“할 말 없게 만드시는군요.”

그가 애써 외면하던 진실을 내가 말한 것이다.

그가 날 흘끔 보며 팔짱을 꼈다.

“처음부터 좋은 의도로 소백작님께 접근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럼 이용하려 하셨던 건가요?”

“복수에 가깝지요.”

생각보다 훨씬 무거운 주제였다. 에밋의 시선이 쓸쓸하게 내려앉았다. 그가 설핏 웃었다.

“이건 제 마지막 양심의 선물이라고 해두겠습니다.”

나는 처음으로 에밋의 일생이 궁금해졌다.

현자가 되고 나서도 그는 조용한 삶을 추구했다.

복수의 대상이 누구든 자신이 직접 해결할 능력이 있었음에도 알버트를 통해 복수를 하려 들었다.

하지만 죽기 전 그가 한 일이라고는 벨페트를 협박해 돈을 얻어낸 것뿐이다. 이조차도 알버트를 위한 일이었다.

비록 다른 이들에게 무심한 편일지라도 에밋은 알버트를 진심으로 아꼈다.

아까 내게 에밋을 부탁하던 알버트의 간절한 얼굴이 선명히 기억났다.

미래의 알버트는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머릿속에 가정이 하나 떠올랐다.

‘…그가 산다면.’

에밋이 살았다면 알버트 삶의 많은 부분이 바뀌었을 것이다.

로스투라투에게 가도 그렇게 자신을 낮추며 살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방금 에밋과 벨페트의 대화만 보아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알버트의 삶에 에밋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에밋이 살아남는다면 알버트가 더 행복할 수 있다.

머릿속에 계시와도 같은 목소리가 떠올랐다.

[네가 에밋의 죽음을 막는다면, 알버트는 어릴 때부터 행복해질 수 있어.]

선명한 목소리는 내 마음에 박혀 들었다.

이건 시련이다.

내게 선택지가 주어졌다. 에밋을 설득해 살릴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그가 죽게 놔둘 것인지.

에밋과 함께하면서 그를 살린다는 생각은 한 적 없었다. 그의 죽음은 미래에 이미 이루어진 일이니까.

하지만 이는 내가 바꿀 수 있는 과거가 되었다.

미래의 알버트는 로스투라투의 밑에서 계속 고통받았다. 하지만 에밋과 함께한다면, 그러지 않아도 된다.

에밋에게 부탁해 그레이 가의 기억을 지우고 다른 나라로 가 여행을 다니면서 산다면, 미래에 탑에 갇힐 일도 없겠지.

그의 인생이 완전히 뒤바뀌는 것이다.

…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대신에.

“말하지 마십시오.”

나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에밋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마치 내 모든 것을 꿰뚫어 볼 것 같았다.

“전 마음이 약해서 설득당할지도 모르니까 가만히 있으란 말입니다.”

그의 말로 나는 더 완벽히 깨닫고 말았다. 지금이 알버트 인생의 분기점이라는 것을.

“이대로 죽게 놔둬요.”

홀가분한 얼굴로 말하는 에밋에게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마음에 무거운 돌이 얹히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만난 알버트의 고통을 외면해야 미래의 알버트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실감 나긴 처음이었다.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에밋이 저 멀리 오는 벨페트를 응시하며 속삭였다.

“이조차도 시간의 흐름입니다.”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하지만 차마 그를 설득할 수는 없었다.

나는 미래의 알버트가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길 바랐다.

그게 지금 알버트를 울릴 것을 알면서도.

나는 지독히 이기적인 인간이었다.

***

벨페트는 무리 없이 돈을 준비할 수 있었다. 오늘 예프넨 후작과 짧게 만나기로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까 전 정체 모를 남자가 요구한 돈은 웬만한 귀족들이 30년은 족히 먹고 살 수 있는 돈이었다.

그가 이 가격을 선선히 지불하려 든 이유는 단 하나였다.

이 사실이 예프넨 후작의 귀에 들어갈 경우에 골치 아파지기 때문이다.

메르시가 벤치에 앉아 불꽃놀이를 보고 있는 걸 확인한 벨페트는 부리나케 예프넨 후작에게로 향했다.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후작님.”

“왔군.”

예프넨 후작이 껄껄 웃으며 인사했다. 벨페트는 생각보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예프넨 후작을 보고 놀랐다.

“이렇게 또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벨페트는 인사를 나누며 예프넨 후작을 면밀히 살폈다.

평소 비위 맞추기 힘든 사람이다. 기분이 좋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텐데….

이윽고 벨페트는 예프넨 후작의 곁에 있는 새끼 드래곤을 발견했다.

“이쪽은….”

“내가 이번에 만나 뵙게 된 드래곤이시니 인사하게. 이름은 알렉산더라고 하시지.”

청색이 유난히 예쁜 드래곤은 예프넨 후작 곁에서 경계심 어린 눈빛을 하고 있었다.

예프넨 후작이 보물이 담긴 상자를 건네며 눈을 느슨히 깜빡였다.

“그래서 이번 투자금은 마법사들의 미래를 위해 쓰일 거라고?”

물론 이는 사실과 전혀 달랐다.

이번에 예프넨 후작이 그에게 전달한 돈은 그동안 해준 뒤처리와 아이들을 팔아넘긴 대가였으니까.

눈치 빠른 벨페트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에 가식적인 미소를 걸치는 건 덤이었다.

“당연하지요. 젊은 마법사들도 분명 기뻐할 겁니다. 그런데 이런 누추한 곳에 새끼 드래곤께서는 어쩐 일로….”

“축제를 구경하러 오셨다더군. 조용히 있고 싶어 하셔서 나와 함께 지내실 예정이야.”

예프넨 후작의 곁에 시종이 다가왔다.

“그럼 저택에 가서 쉬십시오, 알렉산더 님.”

알렉산더는 고개를 끄덕인 후 시종을 따라갔다.

“…새끼 드래곤과 마주치시다니, 역시 후작님이십니다. 계약자가 되시려는 겁니까?”

예프넨 후작은 벨페트의 아부에 껄껄 웃었다.

“아직 500살의 생일까지 좀 남았더군. 그 전까지 계속 신뢰를 쌓아보려 한다.”

“그렇군요. 좋은 생각이십니다.”

벨페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프넨 후작이 마력에 얼마나 집착하는지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예프넨 후작은 그의 가장 큰 돈줄이었다. 그를 경계해야 하는 것과 동시에 잘 섬겨야 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예프넨 후작이 없다면, 자신의 재산도 축적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예프넨 후작은 특히나 아이들의 값을 잘 치러주는 편이었다. 마력을 가진 아이들이라면 더더욱.

“이번에 드린 상품은 마음에 드십니까?”

벨페트의 은밀한 속삭임에 예프넨 후작이 눈썹을 올렸다. 벨페트는 웃으며 알랑방귀를 뀌었다.

“하녀로 쓰기에는 제격일 겁니다. 어릴 때부터 그런 일을 했다고 하더군요.”

벨페트는 예프넨 후작이 아이들을 데리고 정확히 뭘 하는지 몰랐다.

솔직히 알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에게 필요한 건 돈이었으니까.

이번에 예프넨 후작에게 팔아치운 아이는 옅은 갈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마법에도 꽤 재능을 보여서 마탑에 데리고 갈까 싶었는데 예프넨 후작이 웃돈을 주면서 데리고 갔다. 이쪽에서 사양할 이유는 없었다.

“나중에 또 그런 아이가 생기면 데려오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야, 이제 아이들은….”

생각에 잠겼던 예프넨 후작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그가 벨페트의 어깨를 토닥였다.

“아이들은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이제 이 일에서는 손 떼는 것으로 하겠어. 하지만 내 노예는 부탁하도록 하지.”

이제 와서 발을 빼려는 뻔뻔한 태도에 벨페트는 기가 찼다. 하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예, 염려 마십시오.”

이럴 때를 대비해 문서를 남겨두었다. 자신의 사업은 계속될 것이었다.

에프넨 후작 말고도 아이들에게 관심 있는 귀족들은 많았다.

축제는 이런 때에 참 좋은 기회였다. 혼잡한 상황에서는 아이들이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다.

특히 길거리에 사는 아이들은 그의 돈줄이나 다름없었다. 싼값에 계속해서 이용해 먹을 수 있으니까.

어쨌든 오늘 거래도 무사히 끝났다.

벨페트는 예프넨 후작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예프넨 후작이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그럼 이번 연회 때 보는 것으로.”

“예.”

벨페트는 예프넨 후작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침을 퉤 뱉었다. 앞에서는 잘 따를지언정 뒤에서는 적이나 마찬가지였다.

로스투라투의 최측근이 되기 위해서 언젠가는 부딪쳐야 한다.

알버트도 이를 위해 이용하려 든 것이었지만… 앞으로 더 신중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아까 그 남자 외에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신의 계획을 깨달았는지도 알아야 했고.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던 벨페트가 이를 갈았다.

감히 마탑주의 뒤를 캐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인간이었다.

우선은 돈을 주고 입을 막은 뒤 방심을 유도할 것이다.

다만 그에게 주는 돈에 고도의 추적 마법이 걸려 있을 것이다. 그가 돈을 어떻게든 쓰는 순간 마탑으로 소환되도록.

추적 마법은 벨페트의 특기로, 아무리 대단한 마법사라도 쉬이 알아낼 수 없었다.

마탑에서 벨페트는 왕이나 마찬가지였다.

상대의 마법 능력이나 마력이 꽤 대단한 것 같긴 했지만, 마탑에서 자신과 마법사들의 협공을 당해내지는 못할 것이다.

‘잔인하게 죽여주지.’

그는 에밋을 다시 만나러 나섰다. 그를 응징할 생각을 하니 발걸음이 가벼웠다.

에밋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 약속한 돈이다.”

에밋은 보석함을 열어 안에 담긴 보석들을 확인했다. 이윽고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추적 마법이라니, 치졸하시군요.”

“…뭐?”

에밋의 손이 움직이는 순간, 보석함에 걸려 있던 모든 마법이 풀렸다. 입도 뻥긋하지 않고 벨페트의 가장 강력한 마법을 깬 것이다.

벨페트는 그제야 이 남자가 괴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손쓸 도리 없는 괴물.

“제가 왜 조용히 사는지 아십니까?”

“…….”

“어차피 모두 다 스러질 것에 마음을 주는 게 부질없다 느껴서랍니다.”

섬뜩한 눈빛에 벨페트는 숨을 꿀꺽 삼켰다.

그는 겨우 머리를 굴려 자신의 목숨줄을 잡은 눈앞의 남자가 그에게 돈을 요구했었다는 걸 생각해 냈다.

“도, 돈을 더 줄 수 있-”

“아니, 이제 싹을 잘라야지.”

무심하게 답한 에밋은 벨페트에게 포겟 마법을 걸었다.

“커어억….”

벨페트가 신음했다. 에밋은 그의 기억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현자인 만큼 벨페트의 능력은 대마법사의 범주를 뛰어넘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기억을 전부 지울 수 있었다.

에밋은 마탑주 벨페트의 악행을 모조리 깔끔하게 지웠다.

벨페트가 정신을 잃은 채 쓰러졌다.

다시 깨어나면 그동안 자신이 해온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이 사업 자체를 기피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본질이란 쉬이 바뀌지 않는다. 그가 무얼 하든 벨페트는 예전과 똑같이 탐욕을 좇다 파멸할 것이다.

에밋은 알았다.

사람은 쉬이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에게도 해당되는 사항이지.’

에밋은 씁쓸히 웃었다. 그는 벨페트를 내버려 둔 채, 알버트에게 돌아가려 발걸음을 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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