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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108화 (108/156)

108화.

사실 처음에는 메르시가 아닌 줄 알았다.

내가 아는 메르시는 짧은 머리에 다소 냉한 인상이었는데, 지금의 그녀는 그 이미지와는 완전히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허리까지 기른 머리카락은 치렁치렁했으며 입가에는 그늘 없는 함박웃음이 걸려 있었다.

메르시는 행복한 얼굴로 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를 가리켰다. 마탑주는 인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주고 있었다.

“저자는 이름을 가지는 것 자체가 과분합니다. 역시 인간의 가식이란 끝이 없군요.”

둘의 모습을 살피던 에밋이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에 짙게 깔린 혐오에 놀랐다.

평소 모든 것을 장난스럽게 넘기던 태도와 상반되어 있었다.

깊은숨을 내쉰 그는 마음을 다스리려는 듯 블래키를 쓰다듬었다. 블래키는 그의 안정제나 다름없었다.

“이래서 사람들에게 관심 가지는 게 싫어요.”

“…….”

“자꾸 쓸어버리고 싶어지거든. 알기 시작하면 끝이 없어.”

섬뜩하게 중얼거린 에밋의 얼굴에 평소와 같은 해사한 미소가 피어났다.

이윽고 그가 알버트를 보며 인사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스승님, 제발-”

“따라오지 마십시오, 소백작님. 오시면 막을 겁니다. 앞으로 마법을 가르쳐 드리지 않을지도 몰라요.”

마법을 가르쳐 주지 않을 거라는 말에 알버트가 움찔했다. 알버트에게 으름장을 놓은 에밋은 금세 사람들 속에 섞여들었다.

“내 말을 들어주시는 법이 없지.”

알버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에밋의 뒷모습을 원망스레 응시했다.

“스승님을 믿어봐, 알버트.”

나는 알버트를 다독였다. 진심으로 에밋이 걱정되지 않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현자 걱정해서 어디다 쓰겠어. 지금까지 에밋이 조용히 살았던 건 그가 그렇게 살길 원했기 때문이 틀림없다.

그에게는 보통 인간에게는 보이지 않는 내공이 있었다. 비정상적으로 매끄러운 마법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과거로 오기 전에 봤던 알버트의 마법과도 수준 차이가 났다.

알버트가 그토록 강력한 마법사였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에밋은 알버트에게 이 모든 것을 감추었다. 그가 밝히지 않는 것을 내가 알버트에게 모조리 말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알버트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로 했다.

“알버트, 폭죽 좀 봐. 색깔 너무 예쁘다.”

힐끔 폭죽을 응시하던 그가 입술을 짓눌렀다. 초조한 듯 보이는 모습이 낯설었다.

이윽고 알버트가 내 손을 잡았다. 그가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스승님 좀 말려줘.”

“내가?”

“당신도 마법사잖아. 대단한 사람이니까.”

선망 어린 시선에 놀랐다. 나를 얼마나 믿어주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알버트, 하지만 네 스승은 현자고 나는 현재 시련을 겪고 있는 영혼에 불과한걸…. 네 스승이 사람이라면 난 그 밑을 기어가는 개미 같은 존재야.

여태 개미로서 사람에게 꼬박꼬박 말대꾸하던 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에밋은 너그러운 사람이니 봐줄 것이다.

사실은 이렇지만 알버트의 선망 어린 눈길을 받고 있자니 현실을 말해줄 수 없었다.

나는 생각을 바꿨다.

그래, 비록 마법은 쓸 수 없지만 에밋이 뭘 하는지는 봐줄 수 있잖아?

“스승님이 걱정돼?”

내 말에 알버트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왜! 매일 그 드래곤 챙기기 바쁘신데.”

“얼굴에 다 드러나.”

“…당신처럼 나 잘 읽는 사람 없어.”

“그만큼 널 좋아하니까.”

내 말에 멈칫하던 알버트는 입술을 오므렸다. 그의 얼굴에 붉은 꽃이 화악 피어났다.

결국 알버트가 자신의 마음을 인정했다.

“…맞아, 난 스승님이 걱정돼.”

오롯한 진심이 담긴 목소리. 에밋이 그에게 얼마나 큰 존재인지 보여주는 듯했다.

무리는 아니었다. 에밋은 이때 알버트가 정을 줄 수 있던 유일한 인물이기도 했으니까.

알버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시련이 얼마 남지도 않으셨단 말이야. 언제인지 제대로 말해주지도 않으시고.”

“알겠어, 그럼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에밋을 생각하는 알버트의 마음이 너무 예뻐서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빙그레 웃은 나는 에밋에게로 향했다.

마탑주와 에밋의 시선이 맞닿았다.

“안녕하세요, 벨페트.”

마탑주 앞에서 에밋은 딱히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에밋이 훨씬 어려 보였기에 마탑주가 화가 날 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마탑주 벨페트는 대신 주위 사람들을 살피다 느릿하게 말문을 열었다.

“처음 뵙는 분인데….”

벨페트의 시선이 흘끔 블래키에게 닿았다. 블래키가 으르렁거리자 벨페트가 움찔했다.

“불꽃이 참 예쁘지요?”

“예, 추악한 벨페트 님 속내와 다르게.”

“하하, 제게 악감정이 있으신가 봅니다.”

눈꼬리를 올린 에밋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따님이 안 계신 곳에서 이야기하는 게 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어떤 말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에밋의 말에 벨페트는 허허 웃으며 모르쇠로 일관했다.

“아빠, 무, 무슨 일 있어요?”

메르시는 불안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며 아버지의 손을 꼭 잡았다.

에밋은 그녀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탑을 방문하던 아이들이 종종 사라지곤 했지? 그 애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려줄까?”

“네에? 아저씨가 어떻게….”

메르시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벨페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가 호통을 쳤다.

“이게 무슨 무례요!”

“말을 이을까요, 말까요.”

벨페트가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펑 소리를 내며 불꽃이 하늘을 눈부시게 수놓았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메르시, 여기에서 구경하고 있거라.”

“아빠, 하지만-”

“가만히 있어!”

생각지 못했던 호통에 메르시가 움찔했다.

메르시의 손이 벨페트의 로브를 잡으려다 떨어졌다. 상처 입은 듯한 눈동자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하지만 에밋의 말에 정신이 팔린 벨페트에게 메르시의 심정이 보일 리 만무했다.

“어디서 할 거지?”

“…저쪽 골목이 좋겠습니다.”

순간 메르시를 바라보던 에밋이 손을 올려 골목길을 가리켰다. 벨페트는 먼저 앞장섰다.

골목길에 들어선 순간, 벨페트는 에밋의 목에 지팡이를 위협적으로 들이밀었다.

“뭘 얼마나 알고 있지?”

나는 이 싸움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았다. 불 앞에 스러질 나방임에도 불구하고 대드는 벨페트의 모습이 참으로 대단했다.

에밋은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당신이 예프넨 후작과 다른 귀족들에게 아이들을 팔고 있다는 거?”

“그 입 닫지 못해?”

벨페트가 화들짝 놀라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에밋은 유유히 공격을 피했다.

그가 두 손을 올려 벨페트의 목을 잡았다. 그의 손에서 지팡이가 떨어졌다.

에밋의 목소리가 서늘해졌다. 벨페트가 억눌린 목소리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마법을 쓰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에밋에게는 아무것도 통하지 않았다.

에밋이 얼마나 대단한 실력자인지 깨닫는 순간 벨페트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어떻게 소백작님까지 이용할 생각을 했지?”

그 말에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전대 마탑주가 알버트를 넘보았었다고?

“나는 응당 값을 주고 소백작을 데려올 작정이었소!”

“그게 불법이라는 것은 알고 계시면서.”

…하지만 그레이 부부라면 충분히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돈에 미쳐 있던 작자들이었으니까.

“워, 원한다면 돈을 주겠소!”

벨페트는 자신이 에밋을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고 회유하려 들었다.

이는 에밋이 바라던 바였다. 그가 고개를 선선히 끄덕였다.

“그러려고 말한 거라.”

“…….”

벨페트는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자신이 미끼를 던져놓고서도 이렇게 빨리 물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그럼 돈은 이 정도로.”

에밋이 종이를 내밀었고 벨페트는 떨떠름한 얼굴로 종이를 받아 들었다. 그가 금액을 보고 경악했다.

“미쳤소? 이 금액을 어떻-”

에밋이 눈을 깜빡였다.

“말할까?”

“…준비하도록 하지.”

벨페트가 눈을 굴리는 게 여기서도 보였다. 돈을 우선 주고 나중에 보복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럼 바로 지금 주는 것으로 하지.”

에밋의 말에 벨페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면 지금 당장 소문을 퍼뜨릴 수 있는데.”

벨페트가 움찔했다. 그는 에밋의 실력을 가늠했다. 지금 에밋의 말이 절대 허세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한참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던 벨페트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시간 뒤에 여기서 보지.”

에밋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벨페트는 부리나케 모습을 감추었다.

벨페트를 보내고 난 후, 에밋과 내 눈이 마주쳤다.

“…알버트를 사들일 작정이었던 건가요?”

“정확히 말하자면 그레이 부부에게서 불법적으로 알버트를 사들인 후 그의 기억을 모조리 지우고 노예로 쓸 작정이었습니다.”

“그래도 들키지 않나요?”

“마탑 안에 가둬두면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을 테고, 대충 환영 마법을 걸어두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을 겁니다. 마탑주도 꽤 강한 마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생각지도 못했던 음모에 나는 입을 쩍 벌렸다.

알버트의 어린 시절에 이런 납치극이 계획되고 있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와 동시에 에밋이 왜 알버트에게 이번 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나라도 알버트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계속 모르길 바랐을 것이다.

의문은 남아 있었다.

“알버트는 무려 소백작인데 왜 이렇게까지 하려던 걸까요.”

“알버트가 왕자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예프넨 후작이 휘두를 수 있는 꼭두각시를 줄이려고 했던 겁니다. 예프넨 후작과 벨페트는 서로 공생하면서 경계하는 존재거든요.”

알버트가 왕이 되는 미래에는 이미 삶을 마감하고 없을 자들인데 과거에 이렇게 서로 뒤통수를 치려 했다는 게 얼떨떨했다.

“벨페트가 미인들을 꽤 좋아한다는 이유도 있을 겁니다. 아이들을 가져다 파는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거든요.”

…변태였어? 상상도 하지 못한 이유에 나는 입을 쩍 벌렸다. 별꼴을 다 본다 싶었다.

“돈은 꽤 많이 요구했고… 아이들 관련 사업에 관한 기억은 깡그리 지울 겁니다.”

골목길의 어둠에 잠겨 든 얼굴이 유난히 퇴폐적이었다.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않으려는 편이지만….”

제 머리를 헝클인 에밋이 눈을 천천히 감았다.

“알버트 일에는 그럴 수 없어졌어요.”

알버트를 떠올리는 얼굴에 허탈감이 보였다. 알버트를 향한 애정은 그도 생각지 않았던 변수였다.

이렇게 오래 산 사람도, 모든 것을 예상하지 못한다.

그게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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