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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107화 (107/156)

107화.

그의 대답을 들은 후 물끄러미 알버트를 응시하던 메르시는 고개를 푹 숙였다 올렸다.

그녀가 졌다.

“전하, 그럼 시간이 생명인데 어서 가시죠.”

알버트의 선택은 단 한 번도 메르시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이번 선택도 분명 옳을 것이다.

“업무는 줄이셔도 됩니다. 아니, 줄이십시오. 제가 리암 공작님과 슈버트와 이야기한 후 환영 마법을 쓰겠습니다.”

알버트라면 업무와 정인의 행방을 찾는 일을 병행하고도 남을 능력을 지녔지만, 그도 사람이다.

계속 일을 하면 몸에 무리가 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메르시의 환상 마법만 있다면 알버트가 자리를 비우더라도 그의 모습을 환영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

그녀가 돕는다면 알버트가 정인을 찾을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날 것이다.

피식 웃은 알버트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일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

나는 에밋에게서 무리 없이 알버트와 밖에 나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에밋은 내가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흔쾌히 말했다.

“저도 오늘 나가려던 참이었거든요.”

물론 에밋이 우리를 감시하기 위해 나가는 건 아니었다. 그도 따로 할 일이 있었다.

“계속 머무르는데 밥값은 해야지요.”

오늘 축제 일정 중 마법사들이 보여주는 불꽃놀이가 있었다.

그곳에 마탑주도 참석한다는 말을 들은 에밋이 드디어 자신의 계획을 현실로 옮기기로 한 것이다.

마탑주에게서 돈을 뜯어내기로 한 바로 그… 얼토당토않은 계획을!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알버트는 경악하며 에밋을 말렸지만, 이는 소 귀에 경 읽기였다.

그가 오늘 나가서 뭘 할지 안 알버트가 집에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결국 그렇게 알버트와 나의 외출이 성사되었다.

오늘은 날씨가 유독 추웠다. 알버트가 감기에 걸릴까 걱정되었던 나는 그를 단단히 무장시켰다.

저번 외출 때 샀던 모자와 털코트, 그리고 따듯한 목도리까지. 알버트가 마치 귀여운 곰돌이처럼 복슬복슬해졌다.

사랑하는 사람의 어린 시절을 앞에서 직관할 수 있다니. 시련이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다시 없을 행운아였다.

알버트를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흐뭇해졌다.

밥을 제대로 먹는지 확인한 보람이 있었다. 알버트의 얼굴에 살짝 살이 올랐다.

사소한 일이었지만 매일 그를 살피는 내게는 큰 변화였다. 내 온 신경은 알버트에게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당신, 커서는 모든 사람을 홀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지금은 이렇게 귀여워도 되는 거야?

결국 난 유혹을 참지 못하고 알버트를 꼭 껴안았다. 알버트를 품에 안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알버트으으….”

사람이 이렇게 귀여워도 돼? 되는 거냐고!

“숨 막혀…!”

내 품에 안긴 알버트가 새빨개진 얼굴로 나를 마구 밀어냈다.

나는 아쉬워하며 그를 놓아주었다. 숨 막히면 어쩔 수 없지.

“네가 너무 멋있어서 어쩔 수 없었어.”

“…멋있는 거하고 껴안는 거하고 무슨 상관인데.”

“너의 매력이 그만큼 대단했다는 거지.”

알버트를 한 번 더 칭찬한 나는 그의 손을 잡으며 하늘로 올라갈 채비를 했다.

에밋이 품에 블래키를 안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굳이 걸어갈 필요 없습니다. 제가 텔레포트를 쓰면 되는데요.”

하지만 텔레포트로 가면 예쁜 밤하늘을 걸을 수 없잖아. 나는 밤하늘을 걸으며 손을 뻗던 알버트를 기억했다.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다시 보고 싶었다.

그리고 난 봤다. 텔레포트를 쓴다니까 아쉬운 듯 입꼬리를 내리는 알버트의 모습을!

“저는 밤 산책을 좋아해서요. 마침 오늘 하늘이 맑아서 별도 잘 보이더라고요.”

“…….”

“그리고 혼자 가기는 무서운데 알버트 네가 같이 가주면 안 될까? 네가 나한테 아직 화난 것은 알지만….”

말꼬리를 흐리며 알버트의 손을 꽉 잡자 그가 선심 쓴다는 듯 말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걸어서 가자.”

물론 얼굴에는 지우지 못한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알버트가 창문을 열자 바람에 회색 머리카락이 살짝 흩날렸다. 적당히 동그란 이마가 바람결에 드러났다.

“와아….”

밤하늘을 보며 반짝이는 눈이 너무 예뻤다.

순수함이 남아 있는 모습은 메이슨 공작과 이야기를 나눌 때와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나는 순간 알버트가 평탄한 삶을 살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그가 이런 미소를 간직할 수 있는 삶을 살았다면, 지금보다 덜 철들고, 덜 어른스러울지언정 훨씬 행복했을 것 같았다.

그런 그라도 나는 여전히 사랑했을 테지만.

“가자.”

밤하늘에서 내게로 시선을 돌린 알버트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에밋은 우리 둘을 멀뚱멀뚱 보다 어깨를 으쓱였다.

“저는 바깥바람을 별로 안 좋아해서, 축제에서 뵙겠습니다.”

에밋은 블래키와 자취를 감추었다. 그의 마법은 정말 매끄러웠다.

나는 알버트와 내게 플라이 마법을 걸고 창문 밖으로 나섰다.

검은색 밤하늘과 대조되는 내 하얀색 머리카락이 반짝였다.

처음 산책을 나왔을 때보다 밤하늘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우리는 처음 나왔을 때처럼 밤하늘을 즐기며 걸었다.

알버트가 나를 문득 바라보았다. 나는 알버트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왜?”

내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묻자 알버트는 입술을 꾹 누르며 주저했다.

나는 그를 재촉하는 대신 잠자코 기다렸다. 알버트의 침묵이 싫지 않았다.

그 성격에 주저하는 거면 꽤 큰 고민임을 알았으므로.

잠시 후 심호흡을 한 알버트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요 며칠 당신한테 무례하게 굴었던 거 미안해.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잡을 자격도 없는데….”

알버트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가 올렸다.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도 참 알버트다운 행동이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지 머리를 긁적인 알버트의 모습에서 내가 겹쳐 보였다.

속으로 웃었다. 결국 우리는 똑같구나 싶어서.

서로를 밀어내려 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결국 인정하는 모습이 닮아 있었다.

나는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그럴 자격이 없는 건 아냐. 나한테 서운할 수도 있지. 충분히 이해할 만한 행동이었는데?”

“…하지만 당신의 입장에서는-”

“내 입장을 생각할 필요는 없어. 알버트, 좀 이기적이어도 돼.”

네 주위에는 아직 힘들 일이 너무 많이 남았으니까. 씁쓸한 생각에 마음이 아렸다.

알버트의 눈이 루비처럼 반짝였다. 진한 적색은 미래의 그를 떠올리게 했다.

그가 배시시 웃으며 속삭였다.

“고마워.”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당신 앞에서는 편하게 행동할 수 있거든.”

그 말에 말문이 막혔다.

그레텐을 대할 때의 알버트. 메이슨 공작 앞에서의 알버트. 에밋의 앞에서의 알버트.

그 어느 곳에서도 알버트는 아이처럼 행동하지 못했다.

그의 깊은 나락까지 보았던 나를 제외하고서는.

“…나야말로 네게 그런 사람이라서 영광이야.”

고맙다는 말이 가슴에 사무치게 와닿았다. 겨우 입을 열어 답한 나는 애써 웃었다.

그의 과거를 겪을수록, 그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게 되어 슬펐다.

알버트의 시선이 문득 내 팔찌를 향했다.

팔찌를 물끄러미 보다 내 얼굴 보기를 반복하던 그가 눈을 질끈 감고 물었다.

“계속 궁금했던 건데, 이 팔찌는 왜 항상 끼고 있어?”

“이게 있어야 네가 나를 볼 수 있거든.”

“아아….”

그는 내 존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그리 궁금해하지 않았다. 더 아는 것이 무서웠는지도 모르겠다.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입을 열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준 거야.”

“…사랑하는 사람?”

얼떨떨한 얼굴로 되묻던 알버트가 미간을 지그시 좁히더니 물었다. 무언가 깨달은 모양새였다.

“그 사람 때문에 떠나려는 거야?”

나는 푸스스 웃었다.

그 사람 때문에 떠나려는 게 맞긴 맞는데….

“그냥 여기 있으면 안 돼? 이렇게 떠나 있는데 찾지도 않는 거 보면 좋은 사람도 아닌 것 같은데….”

설상가상으로 알버트는 자신을 흉보기 시작했다. 자기 자신을 험담하는 알버트라니.

이럴 때 웃으면 안 되는데 자꾸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알버트는 내 표정을 유심히 살피다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그러고는 듣기 싫다는 듯 두 귀를 틀어막았다.

“아니다. 이 일에 관해서는 더 안 들을래. 듣지 않아도 답은 알 거 같아. 떠나든 말든 내가 무슨 상관이야.”

또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다. 나는 눈을 가볍게 흘기며 말했다.

“섭섭하네. 나는 네가 신경 쓰여서 떠날 때도 눈에 밟힐 것 같은데.”

“…그럼 가지 않으면 되잖아.”

“미안해, 그럴 수는 없어.”

알버트의 그 물음에는 단호히 답할 수밖에 없었다.

“나를 기다리고, 찾고 있을 테니까.”

과거의 알버트가 중요한 만큼, 미래의 알버트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미래에는 지금과 다른 의미로 나를 설레게 하는 알버트가 있을 테니까.

알버트가 서운하다는 듯 날 보았다. 상처받은 얼굴에 마음이 약해졌다.

…나중에 포겟 마법으로 기억을 흐릿하게 만든다면 이 정도는 말해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보지 마. 우리가 헤어진다고 해서 평생 안 볼 것도 아닌데.”

내 말에 알버트의 눈망울이 커졌다. 잠시 고개를 떨군 알버트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약속한 거다.”

내 손을 맞잡은 알버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우리는 다시 밤하늘을 걸었다.

문득 미래의 그가 보고 싶었다.

어린 당신과 걷는 밤하늘이 예뻤지만, 그보다도 어린 나이에 계속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당신이 너무 아름다웠노라 말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속삭이고 싶었다.

***

축제 입구에는 에밋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확실히 저번에 왔을 때보다 주변이 화려해졌다.

모두 나무를 잔뜩 장식하고 있는 눈꽃 덕이었다.

“저기 마탑주가 왔습니다.”

에밋이 손을 뻗어 사람들 사이를 가리켰다.

나는 그곳에서 메르시와 같은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중년 남성을 발견했다.

얼굴에 인자한 미소를 띤 남자는 확실히 로스투라투와 다른 인상이었다.

겉모습만 봐서는 로스투라투를 따를 것 같지 않은데 역시 사람 속은 모르는 거구나.

에밋이 블래키를 쓰다듬어 주며 한숨을 내쉬더니 중얼거렸다.

“딸도 데리고 왔군요.”

그의 시선 끝에서 난 탐스러운 붉은 머리카락을 치렁치렁하게 기른 메르시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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