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알버트는 로스투라투를 치기 위한 준비도 찬찬히 이성적으로 하던 사람이었다.
그만큼 일을 체계적으로 하길 좋아했다. 주위 신하들을 존중했고 최소한의 피해로 최대한의 이득을 내는 걸 선호했다.
왕이 되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정인과 관련된 이야기 앞에서는 다른 이가 되었다.
왕으로서의 업무량을 감당하며 온 나라를 다 뒤집어엎겠다는 말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걱정 말거라. 업무를 잊은 것은 아니다. 정인이 돌아올 나라를 황량하게 만들 수는 없지 않으냐.”
알버트가 눈을 나른하게 치켜뜨며 팔짱을 꼈다. 잠시 정인의 얼굴을 떠올렸는지, 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그녀를 위해 온갖 준비를 다 해놓겠다 다짐했거든.”
아직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알버트가 중얼거렸다. 정인과 헤어지기 전에 한 약속은 아직 유효했다.
그녀가 돌아올 때에 맞춰 모든 것을 준비해 놓을 것이었다.
“후….”
결국 메르시의 입에서 긴 한숨 소리가 튀어나왔다. 속이 탔다.
그녀도 정인이 걱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메르시도 정인의 행방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은 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지 않는가.
“진짜 하실 거예요?”
알버트가 되려 놀랍다는 듯 물었다.
“내가 헛말을 한 적이 있던가.”
정정한다. 알버트 그레이는 그냥 미친 것도 아니다. 곱게 미쳤다.
오랜만에 머리가 아팠다. 메르시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심호흡을 했다.
주위 나라를 모조리 정복하며 정인을 찾아다니겠다는 이 미친 계획은 우선 막아야 했다.
‘…이럴 때 리암이 있어야 하는데.’
메르시는 로제에게 환상 마법을 걸려고 했던 자신을 탓하며 울며 겨자 먹기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전하, 나라와 나라 사이의 분쟁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닙니다. 왕으로서 감당하실 업무도 마찬가지고요.”
물론 알버트에게 메르시의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고개를 치켜들며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내가 언제 한 말을 지키지 못한 적 있더냐.”
…사실 알버트가 그런 적은 정말 한 번도 없었다.
알버트를 설득하려던 메르시는 자신이 설득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빌어먹을 저하, 아니 전하는 사람을 자신의 마음대로 끌고 가는 것에 너무 능했다.
메르시가 동요한 것을 눈치챈 알버트가 슬쩍 이야기를 이어갔다.
“정인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내가 직접 나서야 해. 그녀를 볼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알버트는 현재 영혼 상태인 정인을 보고 만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시킬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럴 마음이 없기도 했지만.
물론 메르시도 쉽사리 설득당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입을 뻐끔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버트의 사고방식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메르시는 사랑에 대해 잘 몰랐다.
정인과 만나며 그녀의 상냥하고 유한 성정이 알버트를 끌어당겼다는 건 알았다.
자신이 모시는 주군의 취향은 저렇게 상냥한 사람이구나, 여겼다. 실제로 정인과 이야기할 때 자신도 즐거웠었고.
좋은 사람인 것은 안다. 하지만 알버트의 지금 행동은 선을 넘었다.
‘보통의 기준을 벗어나잖아?’
정인에게는 미안하지만 알버트가 이렇게 사랑에 미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는 언제나 이성적이었고, 선을 칼처럼 긋는 사람이었다.
메르시는 심호흡을 한 후 다시 알버트를 진정시키려 했다.
“전하, 진정하세요. 정인 양과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으셨잖아요. 일을 이성적으로 보셔야 합니다.”
말 그대로다. 알버트와 정인은 탑 안에서 시간을 보냈다.
남녀가 계속 붙어 있으니 사랑하게 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간은 무척 짧았다.
더군다나 알버트는 메르시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냉정한 이였다. 상황을 제대로 판단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거다.
“이렇게 단시간에 결정하지 마시고 시간을 좀 더 두시고 생각해 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저도 물론 돕겠습니다.”
알버트가 메르시를 똑바로 응시했다.
“미안하지만 그럴 수 없구나.”
단호한 답에 메르시는 헛웃음을 지었다.
“전하, 탑에서 지내신 건 고작 몇 달입니다. 그리 긴 시간도 아니에요.”
“내게는 충분한 시간이었단다.”
평행선은 계속되었다.
메르시는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알버트는 뚫리지 않는 방패였다.
그녀가 평생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알버트를 설득하는 건 불가능했다.
이쯤이 돼서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좋아하는 것을 뛰어넘어 광기에 가까운 알버트의 감정이라도 이해해야 지금 그의 행동을 납득하고 따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언제부터 그렇게 빠지신 겁니까?”
메르시는 허탈한 얼굴로 다시 질문을 던졌다.
“대체 정인 양의 어디가 그렇게 좋으셨던 거예요?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전하를 변화시킬 수 있었던 방법이 뭔지 궁금해서 미치겠습니다.”
빈정거림이 섞인 듯한 말이었지만 이는 모두 메르시의 진심이었다.
솔직히 그녀는 알버트가 평생 혼자 살 것이라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이 다가오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의 마음에 차는 사람이 없어서.
“이것만 말해주시면 더 이상 토달지 않겠습니다.”
알버트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답을 말하려 했다.
탑 안에서 정인과 함께하는 일상이 좋았다. 그녀가 선사하는 소소한 행복이 그의 삶을 변화시켰다.
탑에서 있었던 시간은 짧았지만 그의 마음을 변화시키기에 충분했다…, 고 말하려 했다.
무언가 생각날 듯 말 듯 그를 괴롭히기 전까지는.
알버트는 서서히 미간을 좁혔다.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뿌연 기억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정말 그녀가 선사한 것이 소소한 행복뿐이었나?’
그 전에는?
그녀가 계약서를 가져왔을 때는?
알버트는 자신의 기억을 찬찬히 더듬었다.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답이 나왔다.
…그냥 처음 계약서를 가지고 왔을 때부터 그랬다.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자신을 대하는 태도와 말투가 달라졌을 때부터, 그녀를 향한 애정이 샘솟기 시작했다.
마치 기회를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알지 못하던 마음이 자꾸 그를 자극했다.
그녀가 선사하는 일상이, 저를 칭찬하는 모습이, 말투와 행동이 마음속에 순식간에 자리 잡았다.
그조차도 당황스러울 만큼 갑작스런 변화였다.
사람이 바뀌었다고 해도, 그게 사랑에 빠질 이유는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랬다.
마치 저 자신이 그녀를 오랫동안 기다려 오기라도 한 것처럼.
처음에는 그도 이런 변화가 당황스러웠다. 해서 자신의 행동에 변명을 가져다 붙였다.
이건 모두 그녀를 완벽히 이용하기 위해 하는 행동에 불과하다고.
눈을 뜨고 키스할 때도, 이마에 키스를 할 때도 마찬가지의 이유를 붙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갑자기 그녀를 만지고 싶은 마음을 설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속이는 건 오래가지 못했다. 이용한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터져 나왔다.
감정을 표현하고, 그녀를 위한 말을 하는 게 숨 쉬듯 자연스러웠다.
평소 그런 걸 많이 표현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녀 앞에서 노골적으로, 때로는 은유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표현하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게 처음이었다. 하지만 어색하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의 말을 들으며 얼굴을 붉히는 게 좋았다.
그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때면 그녀가 보이는 반응은 중독적이었다. 계속 그녀를 살피게 만들었다.
부러 그녀의 이름을 더 불렀다. 이름을 부를 때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좋았다.
좋지 않은 것이 없었다.
정인의 모든 게 그를 끌어당겼다.
그는 아직도 달빛을 머금은 정인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했다.
로제와 같은 얼굴이지만 전혀 다른 사람이었던, 정인의 미소가 눈앞에 있는 것처럼 그려졌다.
자신의 머리를 잘라주며 난처한 듯 집중하는 얼굴이, 그녀의 올곧은 눈동자가, 그녀 속에 있는 사람이 누구든 상관없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로제, 우리 키스할까.”
모든 것이 사랑스러워서, 키스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거짓말을 인정했다. 그는 정인을 절대 이용할 수 없었다.
그가 먼저 빠져들었으므로.
어느 순간 스며들었는지 의문을 가질 새도 없었다. 그저 그녀와 함께하며 행복한 것으로 충분했다. 어디에 있든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없는 삶은 더 이상 상상할 수도 없었다.
“전하.”
정말 모든 게 궁금했던 메르시가 그의 답을 재촉했다.
생각을 거듭하던 알버트는 느리게 말했다.
“…운명이라는 말을 믿느냐, 메르시.”
그래, 운명이 아니라면 설명할 길이 없었다.
사람이 바뀌었다는 걸 순식간에 알아차린 것도, 정인을 사랑하게 된 것도. 마치 정인을 만나길 기다렸던 것 같던 몸도.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예전에 리암에게 말했던 것처럼, 이 마음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저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단다.”
“…….”
“평생 그녀를 염원해 왔던 것처럼.”
정인을 떠올리는 알버트의 눈이 붉은 태양처럼 타올랐다.
…그렇게 염원했던 사람을 떠나보냈다. 알버트는 이를 악물었다.
이런 상실감은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잠깐. 생각의 흐름 속에서 알버트는 이상한 점을 찾았다.
‘다시… 라니.’
알버트는 자신이 한 생각을 되새겼다. 정인을 만나기 전, 이런 상실감은 겪어본 적이 있던가.
마음이 아린 감정이 이상하게 익숙했다.
첫사랑이 떠날 때 이런 감정을 느꼈던가. 아니, 모르겠다.
그녀의 관한 기억이 서서히 떠오르곤 있었지만 아직 확실하지 않은 게 너무 많았다.
지금 떠오르는 기억이 진짜인지 판별하는 것도 어려웠다.
알버트는 고개를 저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정인을 찾는 것이 제일 먼저였다.
찾지 못한다면 자신은 끝내 미쳐 버리고 말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