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탑에 있던 정인의 영혼에게 따라 나오라 한 것은 알버트 자신이었다. 그러니 영혼이 사라지는 시기를 앞당긴 것도 그였다.
사람이 멍청해도 이렇게 멍청할 수가 없었다. 영혼을 데리고 나오면서 그런 것 하나 생각하지 않았다니.
모든 가능성을 생각해 두어야 했다.
‘네가 안전할 수 있도록, 내 곁에 좀 늦게 오더라도 아무런 탈도 없도록 해야 했어.’
후회는 이미 때가 늦었다.
그저 그녀를 혼자 두는 게 마음에 걸려 탑에서 따라 나오라 했다.
정인은 아무런 의심 없이 그의 말을 믿었을 텐데, 그의 선택이 정인의 죽음에 일조했다.
정인이 사라졌다.
‘네가 내 인생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눈앞이 아득해졌다.
‘세상에 네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어찌해야 해.’
…그런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정인과 함께한 시간 속에서 그는 단 한 번도 정인을 제 삶에서 배제한 적 없었다.
한 달의 유예기간을 준 것도, 그녀와 남은 평생 같이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게 허사가 되었다.
알버트는 로제가 있는 마법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고 살인 욕구만 남았다.
‘죽여야 한다.’
그의 유일한 삶의 이유를 지워 버린 사람이다.
죽이는 것 말고 다른 선택지가 있을까?
그는 로제 가까이 발걸음을 뗐다.
아니, 죽이는 건 너무 쉽다. 그보다 더한 형벌이 필요했다. 로제 아티어스가 사는 것을 증오할 정도의 벌이 있어야 했다.
그 정도에 풀릴 분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끔찍한 고통을 주고 싶었다.
나머지는 차후에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너무 길어서는 안 되었다.
그녀의 곁을 따라가야 하니까.
혼자 너무 쓸쓸하게 둘 수는 없으니까.
알버트는 순식간에 로제 곁으로 다가가 웃고 있는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엄청난 악력에 그녀의 몸 전체가 들어 올려졌다. 하지만 로제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느냐.”
짓씹듯 중얼거린 알버트의 목소리는 겨울바람처럼 서늘했다.
그의 손에서 금방이라도 마법이 튀어나와 로제의 목숨을 앗아갈 것 같았다.
턱을 움켜쥔 손에 핏줄이 불거졌다.
“저, 전하! 전하! 진정하세요!”
부리나케 그의 옆으로 달려온 메르시가 소리쳤다. 알버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답했다.
“진정할 사람은 너란다, 메르시. 내가 아티어스를 쉬이 죽일 것 같니. 죽음은 그녀에게 너무 자비로운 끝이야.”
그는 다른 손을 올려 로제의 목을 조였다. 켁켁거리던 로제의 얼굴이 시퍼렇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건 그저 시작일 뿐인데.”
표정이 사라진 알버트의 얼굴은 섬뜩했다.
물론 로제도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이 아는 주문을 차례대로 외웠다.
방금 건 마법의 여파 때문에 목숨을 건 흑마법은 쓸 수 없었지만 그녀도 강력한 마법사였다.
하지만 로제의 힘은 알버트 앞에서 무의미했다.
분노한 알버트의 힘은 너무 압도적이었다.
알버트는 무감정한 얼굴로 속삭였다.
“네게 죽음보다 더한 삶을 선사하마. 로스투라투 이후에 이렇게 살의가 들끓은 것은 처음이거든.”
“…….”
“무력감이 무엇인지 반드시 느끼게 해주겠어.”
그 말에 로제는 가쁜 숨을 내쉬면서 희미하게 웃었다.
“어, 차피… 그런 건 익숙한걸요.”
자신 있다는 듯한 말에 알버트의 머리끝까지 화가 오르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알버트의 눈빛이 번뜩였다.
“뚫린 게 입이라고 잘도 떠드는구나. 숨부터 막아볼까.”
안 그래도 아까 전부터 떠드는 입을 닥치게 하고 싶었던 참이었다.
결국 알버트는 로제의 입을 막아 산소를 차단했고 로제는 괴로움 속에서 기절했다.
알버트는 정신을 잃은 로제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시선이 옮긴 알버트는 그제야 로제의 마법진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인을 소멸시키기 위해 만든 마법진이 그대로 있었다.
알버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마법이 완성되었는데도 사라지지 않았다고?’
마법진이 완성되어 마법을 성공적으로 걸었다면, 마법진은 응당 사라져야 한다.
하지만 핏빛으로 물든 마법진은 여전히 바닥에 존재했다.
머릿속의 암흑이 걷히고 살짝 빛이 비쳤다. 그는 실날같은 희망을 보았다.
‘아직 살아 있다.’
이곳에서 사라졌을지언정, 정인과 하양이는 아직 살아 있었다. 이 마법진이 그 증거였다.
정인을 소멸시키기 위한 마법진이 아직 사라지지 못했다는 건 아직 마법이 끝나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알버트는 긴 숨을 들이마셨다.
작은 희망이라도 그는 기꺼이 붙잡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의 눈이 서서히 초점을 찾았다.
“메르시.”
“네.”
옆에서 알버트의 표정을 살피던 메르시가 단박에 답했다.
“아티어스를 지하 감옥으로 데리고 가거라. 물 한 모금도 주지 말도록 해. 몸의 수분은 마법으로 아주 적게만 보충해 주거라. 죽지 않을 정도로만.”
마법사들이 자신의 힘을 전혀 쓸 수 없는 공간. 아무리 흑마법사인 로제라도 그곳을 빠져나오기는 어려웠다.
“몸에 상처를 낼 수 없게 사슬을 채우도록 해. 명심하거라. 몸은 멀쩡하되 정신은 고통받아야 한다. 몸에는 상처 하나 내서는 안 돼.”
계획이 바뀌었다. 로제 아티어스는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았지만, 몸의 상태는 완벽해야 했다.
정인의 영혼을 찾게 되면 그녀의 영혼이 들어갈 몸이 필요할 테니까.
찾지 못한다면, 이라는 가정은 그의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낼 것이다.
어디 있을지는 모른다. 찾아야 할 곳은 사막의 모래알처럼 무수히 많았다.
하지만 그 모래알 속, 자신이 원하는 답이 존재한다면 걸리는 시간은 중요치 않았다.
매일 밤을 지새우는 한이 있더라도 해낼 것이다. 억겁의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녀를 다시 볼 수 있다면, 그 이유만으로 족했다.
“네 환상을 통해 그녀의 트라우마가 뭔지 샅샅이 밝혀내는 것이 좋겠구나.”
“알겠습니다.”
새까맣게 내려앉은 밤하늘이 알버트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늘 속 보이는 얼굴이 어두웠다.
알버트는 로제를 흘끔 보며 메르시에게 챙기라 손짓한 후 몸을 돌렸다.
“궁으로 돌아가자.”
알버트의 말에 잠자코 있던 메르시가 고개를 겨우 끄덕였다. 옆에서 보는 알버트의 변화가 아직 낯설게 느껴진 탓이었다.
평소 느긋하고 여유롭던 모습이 사라지고 조급함과 광기가 남았다.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자신을 감추려 하지만 흘러나오는 감정의 잔재가 낯설었다.
알버트가 평생 보이지 않았던 ‘동요’였다.
정인이 대체 그에게 어떤 존재기에?
로스투라투를 대할 때도 이렇게 이성을 잃은 적은 없었다.
알버트가 풍기는 살기 때문에 아까 몸에 돋은 소름을 생각하면 아직도 으스스했다.
마법진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건 아직 정인이 죽지 않았다는 뜻인 건 메르시도 눈치챈 바였다.
그래서 로제를 죽이려 들던 알버트를 막으려 한 것인데….
메르시는 턱을 괴며 생각에 잠긴 알버트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응시했다.
그가 이제 좀 진정할까 싶었던 생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마법진을 눈치챈 알버트의 눈은 여전히 실성한 듯 초점이 없었다.
뭔가 아주 불안했다. 메르시는 계속해서 알버트의 눈치를 살폈다.
턱을 쓰다듬은 알버트가 눈을 내리깔며 속삭였다.
“이 주변부터 뒤지는 게 좋겠지.”
이는 예상 범위 내에 있던 말이었다. 메르시는 살짝 숨을 뱉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언제 시작하실 겁니까?”
“내일은 왕국 전체를 찾아보고… 그다음 날은 코토아르에 가봐야겠다.”
“…예? 하루 만에 다 뒤지신다고요? 왕국을?”
“당연한 것 아니냐.”
…업무는! 당신 왕이잖아! 그것도 즉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왕! 속으로 경악한 메르시가 연이어 물었다.
“코토아르는요! 지금 고자가 싸질러 놓은 똥 때문에 국경도 거의 닫혀 있는 상태인데 어떻게 다녀오시려고요?”
코토아르는 왕국 옆에 붙어 있는 나라로, 현재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곳이었다. 모두 로스투라투의 업보였다.
알버트의 눈썹이 올라갔다. 결정을 철회할 생각은 아예 없는 듯 보였다.
메르시는 애써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전하, 코토아르는 좀 더 생각해 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코토아르와 저희 사이를 생각하면 그냥 드나들 수가 없잖아요….”
알버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가 해사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럼 영토 넓히는 셈 치고 정복하면 되겠구나.”
이렇게 갑자기요?
“수도를 장악하고… 반대하는 귀족들은 대충 해치우면 되겠지. 코토아르는 자원이 풍부하니 잘된 일이 아니더냐.”
알버트는 천연덕스럽게 말했지만 이는 통하지 않았다. 메르시는 눈을 부릅떴다.
그렇게 이유 가져다 붙여봤자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냥 정인의 영혼을 찾으러 가는 거잖아!
그녀가 아는 알버트는 공명정대한 이다. 메르시는 적당한 이유를 대면 알버트가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다.
코토아르를 이렇게 방문하는 건 얼토당토않은 일이었다.
“전하, 코토아르 사람들이 잘못한 것은 없잖아요.”
알버트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아, 처음부터 강압적으로 대할 생각은 아니란다. 우선 협조를 요청하고, 거절한다면 그렇게 할 거란 말이었다.”
“…코토아르가 옳다구나 하고 받아줄 리 없잖아요?”
“그럼 처리하면 되지. 병사들과 마법사, 수도 정도는 나 혼자로 거뜬할 테니 상관없다. 너는 이곳을 지키며 아티어스에게 집중하도록 해.”
누가 들으면 어디 산책 가는 줄 알 것처럼 가벼운 말투였다.
메르시가 입을 쩍 벌리는 동안 알버트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머리가 바삐 돌아갔다.
“코토아르에 없다면 옆 나라로 가보마. 없다면 섬나라까지 가보아야지. 아, 다시 여기 올 확률도 있으니 왕국도 살펴야겠구나.”
덤덤히 말을 이어가는 알버트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메르시는 자신과 알버트의 이야기가 평행선처럼 이어지질 않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메르시는 헛웃음을 지었다. 평생 알버트에게 쓸 거라 생각하지 못한 욕지거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이 xx 돌았는데?’
메르시의 앞에는 잃어버린 연인을 찾기 위해 돌아버린 남자만 있을 뿐, 이성적인 그녀의 주군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