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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104화 (104/156)

104화.

내가 알버트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기분 전환을 도와주는 것 정도겠지.

비슷한 또래인 리암에 비해 표정이 없다지만, 그는 아직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서툰 어린애였다.

난 알버트가 지금 상태를 오래 간직할 수 있길 바랐다.

미래의 알버트가 그의 어깨에 짊어진 무게를 견디기 위해 저 자신을 바꾼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미래의 그가 아프다는 말을 솔직하게 표현했을 때 잠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것을 기억한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것이 더 익숙하던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감정이 쌓이면 병이 되는 법이다. 나는 알버트의 손을 슬그머니 잡았다. 내 손이 그에게 온기를 줄 수 있길 바랐다.

“알버트, 우리 나갔다 오자.”

내 말에 입을 서서히 벌리던 알버트는 황급히 얼굴을 굳혔다. 그가 내게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는 이렇게 허술하기 짝이 없다.

내가 보이면 무뚝뚝하게 대하려 애쓰면서 사라지면 실망한다.

그동안 나는 그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알버트를 존중해 줬었다. 이제는 더 다가갈 때가 되었다.

그가 내가 와주었던 것처럼, 항상 다정하고 아름다운 말로 나를 존중해 줬던 것처럼.

그리고 알버트는 애초에 나랑 정말 끝내고 싶은 것이 아니지 않나. 그는 두려운 것뿐이다.

우리가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지 나는 모른다. 그렇다면 계속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하소연했다.

“진짜 오래 고민하다가 데이트 신청하는 거야. 난 잘생긴 소백작님에게 몇 번이나 거절당했었다고.”

“…….”

“나도 상처받아.”

나는 시선을 떨구며 회심의 공격을 날렸다.

슬쩍 고개를 드니 알버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그가 고민하고 있었다.

알버트가 퉁명스레 말했다.

“아무튼 안 돼. 스승님하고 마법 연습하기로 약속했어.”

“그럼 에밋의 허락을 받으면 되는 거지?”

에밋과 말싸움도 하는데 허락쯤이야. 내 말에 몸을 움찔한 알버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 저녁 먹어야 돼. 따라오지 마.”

거절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알버트의 속내가 다 드러났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알버트. 그럼 준비하고 있어. 금방 데리러 갈게.”

“…간다고 한 적 없어.”

“안 간다고 한 적도 없잖아. 나는 네가 갔으면 좋겠어.”

알버트가 눈을 부릅떴다. 그가 겨우 변명을 만들었다.

“스승님이 보내주지 않으실 거야.”

“내가 꼭 허락받을게.”

그리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다.

알버트와 말을 끝낸 후 나는 에밋의 방으로 향했다. 알버트 바로 옆방인 에밋의 공간은 나와 알버트만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다.

에밋이 마법을 걸어 이 방의 존재를 사람들의 인식에서 완전히 지워 버렸기 때문이다.

그레텐은 이 방이 존재하는지조차 까먹고 있었다.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말이 들렸다. 문을 연 나는 자리에 얼빠진 채 섰다.

“뭘 그리 보십니까?”

블래키와 에밋이 먹고 있는 음식이 너무 낯익었기 때문이다.

직접 만들어 온 듯한 음식은 고춧가루를 섞어 만든 계란말이였다.

한두 번 만들어본 솜씨가 아닌 듯 예쁘게 말린 계란말이는 퍽 먹음직스러웠다.

알버트가 저녁을 다 먹으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테니 에밋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도 되겠지.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그게 뭔지 아세요?”

“제가 좋아하는 음식입니다.”

에밋이 뻔뻔히 대꾸했다. 그는 잘 자른 계란말이를 하나 집어 입안에 넣었다.

오랜만에 보는 한식에 나는 여전히 얼이 빠져 있었다. 에밋과 한식은 전혀 생각지 못했던 조합이었다.

“이런 걸 드세요?”

“이런 거라면… 당신이 아는 음식인 모양인데, 그렇다면 다른 세계의 것이었군요.”

“네, 맞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밋이 내가 이곳에 속한 사람이 아니란 걸 바로 알아낸 것은 딱히 놀랍지 않았다.

우선 내 생김새는 이곳 사람들과 달랐다. 더불어 나처럼 검은 눈동자는 흔치 않은 편이었다.

“여기 이런 재료가 존재하는 건 알았지만 저 말고 쓰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거든요.”

“주류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아는 사람이 드물긴 하지만 저는 익숙합니다.”

“왜 익숙하신 건가요?”

“자주 어울리던 친우가 직접 가져왔던 것이거든요.”

처음 나는 이곳에 한국의 재료가 존재하는 게 설정 오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에밋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원을 넘나들 수 있는 드래곤의 계약자라면, 다른 차원에 갔다 오는 것도 가능하다는 얘기다. 내가 사는 곳에도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친우분께서 드래곤의 계약자셨던 모양이군요.”

“예, 다른 차원의 문명 같은 건 가져올 수 없지만, 재료 같은 건 손쉽게 가능합니다.”

드래곤의 계약자가 차원을 드나들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게 이 설정과 이렇게 연결될 줄은 몰랐다.

사람들에게 생소한 재료긴 해도 고춧가루를 비롯해 한식 재료들을 손쉽게 구할 수 있던 탑의 생활이 생각났다.

왜 이곳에 여러 차원의 요리와 재료가 존재하는지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었다.

문명은 다르기에 내가 사는 차원의 기계 같은 건 가져와도 쓸모없었을 테지만, 재료는 다른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당신도 계약자가 되면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에밋의 말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로제에게 빙의한 이후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가능성이었다.

탑에서 그리워하던 모든 것이 떠올랐다.

문명의 이기라 여기던 스마트폰, 컴퓨터, 인터넷처럼 한때 내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던 것들.

하지만 왜일까. 그 모든 것을 다시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생각보다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전 괜찮아요.”

그곳에는 알버트가 없으니까.

내가 사랑하고, 다시 만나야 할 사람이 없으니까.

…나중에 알버트와 싸우기라도 하면 몰라도.

그와 말싸움을 하면 이길 수 없으니 토라졌을 때 잠시 도망가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이곳의 역사가 드래곤과 계약자 때문에 바뀐 경우가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궁금한 것이 생겼다.

나는 시련을 위해 과거로 왔고 내가 하는 행동에 따라 내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

그렇다면 드래곤의 계약자는?

과거와 미래를 혼자 드나들 수 있는 드래곤의 계약자가 과거의 일을 바꾸면 어떻게 되는 걸까?

에밋이라면 그 답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에밋은 초월자로 드래곤보다 오랜 세월을 살아왔으니까. 그가 만난 계약자들도 꽤 되는 듯했고.

“드래곤의 계약자는 과거를 바꿀 수 있나요?”

생각지 못했던 질문이었던 듯 에밋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입을 뻐끔거리다 웃었다.

입가에 머무는 씁쓸한 미소는, 마치 누군가를 떠올리는 것 같았다. 그가 느릿하게 말했다.

“과거를 바꾸는 것은 당신도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존재 자체가 사라질 수 있잖아요.”

“드래곤의 계약자라도 시간의 법칙 앞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에밋이 잠시 뜸을 들인 후 말했다.

“자신의 행동이 어떤 미래를 불러올지에 대해서는 알 수 있게 되지요.”

“정말 잘 알고 계시네요.”

이렇게까지 세세한 답변을 들을 줄은 몰랐다. 에밋은 정말 모르는 것이 없어 보였다.

“…오랜 시간 살다 보면 많은 것을 겪게 되거든요.”

정확한 답을 회피하듯 중얼거린 에밋은 자신의 품에 안겨 얼굴을 비비적거리는 블래키를 보며 흐뭇하다는 듯 웃었다.

블래키를 보니 하양이가 생각났다. 하양이와 언제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양이를 생각해서라도 나는 내 선택에 더 신중해질 필요가 있었다. 내 선택이 하양이의 목숨까지 좌지우지하게 되니까.

내 영혼이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건, 하양이가 시련을 열심히 이겨내고 있다는 말이니까.

에밋이 퍼뜩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올려 나를 응시했다.

“아, 말해주지 못했던 사실이 이제야 생각났습니다.”

그가 마지막 계란말이를 들어 블래키의 입안에 넣어주며 이야기했다.

말해주지 못한 사실이라니. 그가 내게 해줄 말이 더 있던가?

“시련을 겪는 동안 현실의 시간은 훨씬 빠르게 흐른다는 걸 모르는 것 같아서요.”

“예?”

…에밋은 날 놀리려고 작정한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말을 할 수 없다.

마음은 현실을 부정했지만 머리는 팽팽히 돌아갔다.

가만있자, 내가 이곳에 떨어진 지 얼마나 되었지? 처음 알버트를 구한 날로부터….

“그럼 이곳에서의 일주일은 현실 시간으로 어느 정도 되는데요?”

“하루를 10일 정도의 시간으로 잡으면 되니, 70일 정도 흘렀겠군요.”

에밋이 표정 변화 없이 대꾸했다. 하지만 내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뭐, 70일?

나랑 한 달 떨어지는 것도 겨우 참겠다던 알버트다.

…그런데 심지어 두 달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고?

더군다나 내가 사라지기 전 마지막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로제는 그를 가지기 위해 나를 죽이려 들었고 나는 순식간에 사라졌으니까. 그가 내가 죽었다고 여기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알버트가 얼마나 내 걱정을 하겠어.’

나는 정말 잘 있는데, 그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다. 갑자기 모든 상황이 너무 답답하게 느껴졌다.

내가 없는 동안 그가 어떻게 바뀔지 나는 정말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얼마나 내 걱정을 할지 모르겠다.

진정하자. 에밋이 모든 것을 아는 건 아니다. 혹시라도 그가 잘못 알고 있는 걸 수도 있지 않은가.

“모든 시련이 그런 건 아닐 수 있잖아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확률은 적습니다.”

바로 나오는 말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나는 생각을 고쳐먹기로 했다.

아무리 알버트가 날 사랑한다지만, 그는 지극히 이성적이고 인간적인 사람이다.

상냥하고 자비로운 사람이니만큼 내가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슬퍼할 테지만, 잘 이겨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다시 만나기 전까지 알버트는 무사할 것이다.

날 웃으며 반겨줄 거야. 내 하얀색 머리카락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뜨며 이게 무슨 일이냐 놀라겠지.

그리고 기뻐할 테다. 어쩌면 내게 화를 낼 수도 있을 테지만, 그 정도는 당연했다.

나는 반드시 이 시련을 이겨내 하양이와 함께 현재로 돌아갈 테니까.

물론 이는 알버트를 다시 만나기 전 내 착각에 불과했다.

나는 다시 만나게 될 알버트가 어떤 상태일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가 얼마나 미쳐 있을지.

***

로제는 마법진 한가운데서 실성한 듯 웃고 있었다.

“하하! 절 속이면 안 되는 거였어요, 왕자님! 사랑해 주지도 않으실 거면서!”

알버트에게 로제의 말이 아득하게 들려왔다. 그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하양이와 정인이 사라진 곳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끝내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알버트는 망연자실한 얼굴을 했다. 그의 눈동자가 서서히 초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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